선교와 자신학화

Share This Article
선교사 자신의 확고한 신앙과 신학 과정은 필수…
선교와 자신학화: 자신학화는 단순히 상황화가 아니라 그 문화가 가진 관점으로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는 일이다. 자신의 신학화의 기준이 없으면 선교지에서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선교사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과 신학 과정을 경험했거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미션저널=최하영 선교사] 선교와 자신학화 » 연재물 4회 » 선교사는 선교지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올바른 성경적인 신앙관과 신학적 이론이 어느 정도 확립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 신앙관이라 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언제 어떤 계기로 영접을 했고 그로 통해 진정으로 죄사함에 대한 고백을 했었는지? 그 후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체험을 해 봤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 얻음과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그 기쁜 소식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 봤는지? 그로 통해 주님 품으로 인도했는지 등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인 11살때에 교회가 있는 읍내로 이사를 하면서 뒷집 형의 인도로 처음 교회를 다녔다. 당시 그곳은 장로교회 2곳과 감리교회, 그리스도교회, 천주교회가 있었다. 필자가 다닌 교회는 감리교회로 중학교 2학년 때에 학습을 3학년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극동방송을 통해 성경문제집을 받아 풀기도 하였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서울로 유학을 가서 대학 2학년때 대학생선교회(CCC)를 가입하였고 그해 여름수련회와 거지순례전도여행을 통해 성령체험을 하였다. 사영리를 매개로 하여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때에 순장으로 많은 순원을 낳았었는데, 지금까지 든든한 후원자는 2명 정도이다.
천호동의 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신학교 가라는 권유도 받았다. 3년 간의 직장생활 할 때에 섬겼던 교회에서 학생들을 부흥시켜서 그 교회 담임목사의 권유와 추천으로 준비하여 신학대학원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필자는 여러 교단과 교회를, 또 선교단체를 통해 좀 더 폭넓은 신앙관을 확립해 나갔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나와 여러 교회 부교역자로 섬기다가 서울 신림동에 교회를 개척하여 동기 목사에게 위임한 후에 선교지로 나갔다. 이렇게 필자는 선교지를 떠나기 전에 신앙관을 확립해 가는 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선교지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신학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이를 자신학화(自神學化, Self-Theologizing)라 한다. 자신학화는 단순히 상황화가 아니라 그 문화가 가진 관점으로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는 일이다. 자신의 신학화의 기준이 없으면 선교지에서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선교사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과 신학 과정을 경험했거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 것이 있을 때에 선교지의 자신학화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선교사의 교회와 그 교회역사 가운데 자신학화를 이룬 적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선교지에서 그런 신학적 경험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1884년에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2020년인 올해에 136년째해를 맞이하고있다. 초기 한국교회에 외국선교사들이 중국의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를 사경회 강사로 초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삼자(三自, Three-Selfs)인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자치(自治, self-governing), 자전(自傳, self-propagating) 원리를 권면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는 충실하게 네비우스 삼자 원리에 따라 선교사의 도움없이 예배당을 마련하고 재정 자립에 힘썼고 교인들을 훈련하여 교회 지도자가 되고 스스로 전도하며 가르치며 배우는데 힘썼던 것이다. 거기에 약 500년 조선(1392~1910)의 유교문화와 샤마니즘적인(Shamanistic) 토속신앙을 성경적 재해석과 적용을 통한 자신학화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국 교회 초기인 1907년 대부흥운동(Great Revival Movement) 때 회개한 내용은 유교전통문화에서 죄로 인식하지 않던 축첩과 주초 등까지 고백한 것을 보면 한국교회 자신학화를 이루어 감을 볼 수 있다. 그 외 추모예배와 철야기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안수기도, 대심방제도 등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생활을 위한 성미제도와 체면문화 영향인 교회직분제도와 주보에 올린 헌금자 공개 등이다. 이런 자신학화 과정 중에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등 여러 문제도 발생하였다. 단군신화에서 보편적 하나님 개념으로 유추하여 토착화(indigenization, 현지화) 신학 혹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 신학이 나왔고 해방 신학(liberation theology)과 민중신학 등을 통해 한국적 자신학화를 시도했으나 성경적이지 않아 접목하는데 한계를 드러냈었다.
필자가 1996년 이슬람 땅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에 파송되었을 때에 그곳에서는 1937년 소련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온 우리 동포 고려인들이 있었다. 그 2세들의 통역과 도움을 통해 바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선진국인 고국의 목사를 만나는 것에 큰 호기심을 갖고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명절인 설날과 한식, 추석 등 한국적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소수민족으로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소련시절 러시아인 다음으로 고위직에 포진해 있었다. 이런 고려인들 덕분으로 예배의 모범도 한국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러다가 고려인들이 러시아언어권과 그들의 고향인 극동 혹은 러시아와 한국으로 옮겨가면서 그 고려인 교회는 점점 우즈벡어를 하는 우즈벡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우즈벡 청소년들이 교사와 리더로 헌신하면서 예배도 이들이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에 우즈벡의 유명한 대중가요 율두스(Yulduz Usmonova, 1963~)의 곡에 찬양을 부르곤 하였다. 필자가 들어도 우즈벡인의 정서에 맞고 은혜로웠지만 교회가 공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종교심이 깊어 꿈을 많이 꾼다. 그래서 어느 때에 한 청년이 꿈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설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안된다고 하였다. 설교권은 목사에게 주어진 권한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10년만인 2006년에 다른 사람을 개종시켜 사회를 혼란시켰다는 죄목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2008년에 들어갔지만 다시 2010년에 추방되어 유사문화 및 언어권인 우크라이나에 재배치되어 현지교회를 순회하였다. 2018년에 우즈베키스탄에 가 보니 필자가 개척했던 교회는 여전히 한국형 예배모범을 하고 있었다. 이미 3대 담임목사로 이양이 되었는데도 율두스 곡에 찬양도 하지 않고 우즈벡 청년이 설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필자에게 설교를 하겠다고 했던 그 청년은 현재 대학교 부총장이 되어 있었다.
필자의 우크라이나(Ukraine) 현지교회 순회사역은 주로 설교와 특강이다. 그런데 예배시간은 2시간 훨씬 넘게 한다. 설교는 필자 처럼 초청한 목사 혹은 손님 목사가 오면 시켰는데, 그러다 보니 설교도 두 세번 하였다.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송도 원하면 두 세건 하였고 간증도 두 세건 하였다. 추수감사예배 때에는 가을인 9, 10월에 원하는 주일에 하는데 이웃 교회들이 품앗이 하듯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그땐 설교만 다섯 번도 하였다. 그렇게 두 세시간 예배를 해도 아무도 지루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함을 볼 수 있다.
그런 선교지 우크라이나 현지예배를 드리다가 2018년 우즈베키스탄의 필자가 개척한 교회에서의 한국형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우즈베키스탄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처럼 선교사는 선교하면서 자신의 자신학화를 그대로 옮겨 놓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 가끔 우크라이나 교회는 경제가 안 좋다는 핑계로 미국교회와 한국 선교사 등에 의지하려고 한다.
필자가 작년부터 우크라이나의 한 교회를 담임을 맡으면서 현지인들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도록 권한을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차별주의 영향으로 전도할 엄두도 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재정자립도 아직 멀기만 하다. 그리고 현지교회 자신학화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한국교회는 빨리 빨리하는 역동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갖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정교회의 영향으로 정적이고 사변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신학과 우크라이나 교회의 신학의 차이는 다르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 파송 2위국이며 세계교회를 이끌 정도로 성장하였다. 더구나 한국은 경제 세계 10위 국가일 뿐만 아니라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인에 대해 세계인들이 호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영적으로 많은 강점을 갖고 선교지를 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우월적인 한국교회 자신학화를 가지고 선교지의 교회 공동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한국교회와 선교사가 선교지 교회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화와 상황에 맞게 자립과 자전, 자치, 자신학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협력하면 좋겠다. ©아이앤유크저널
필자: 최하영 목사/ hydavidch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