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의 교육법
[교육저널=조용선 선교사] 라마의 교육법 »
라마의 교육법에 의해서 형성되는 유대인들의 지성이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 받은 유대인 자녀들이 어떤 사회에 있든 대개 교수나 교사와 같은 교육자로 혹은 회사의 경영인이 되게 한다…
마태복음 27장 46절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And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with a loud voice, saying, “Eli, Eli, lama sabachthani?” that i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46.约在申初,耶稣大声喊着说,以利,以利,拉马撒巴各大尼。就是说,我的神,我的神,为什么离弃我。
1. 라마의 교육법
가. 폴 김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육대학원에서 부원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폴 김이다. 그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교육에 혁혁한 성과가 있어서 UN이나 미국의 교육계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가 상을 받게 된 주된 공로 중의 하나는 작은 교육용 기계를 만들어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급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왜?’ 라고 하는 물음을 던지고 전 세계에서 그 기계를 갖고 있거나 관계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토론에 참여하며 물음에 답을 하는 형태의 체제이다. 이 체제와 기계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단순하게 1+1=2와 같은 질문과 답이 나올 수도 있고 어느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 고 물으면 누구라고 답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점점 더 깊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어느 나라의 정치는 어떤가? 를 묻고 이 두 가지 질문을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민주주의로 볼 수 있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의식은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 폴 김의 이 교육 체제(體制)는 사실 유대인의 교육법에서 따온 것이다.
나. 라마의 교육법
폴 김이 인용한 유대인의 교육법은 ‘라마의 교육법’이라 불린다. ‘라마’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외쳤던 말씀의 일부분이다. 원래의 외침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이것은 대단한 의문이 든다. 이것을 답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학체계가 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심원한 질문이고 가장 깊고 복잡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그런데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인의 교육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교육법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유대인은 대다수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마의 교육법이라고 말한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붙인 이름이지 유대인 자신들이 자신들의 교육법을 예수님과 연관하여 ‘라마의 교육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자녀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왜?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기 때문에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교육법은 ‘라마의 교육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인구는 현재 약 1,65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스라엘에 610만 명 정도, 미국에는 580만 명 정도가 산다고 한다. 그 밖에 지역에서 460만 명 정도가 흩어져 살고 있다. 이 인구는 전 세계 인구 66억과 비교하면 고작 0.0025%이다. 그런데 인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노벨상의 약 30%를 바로 유대인이 가져간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총명하게 만드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원래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게 총명한 것일까? 그러나 이 말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지성과 다른 세계 사람들의 지성을 비교할 때에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유대인의 교육법 때문이다.
2. 유대인의 교육법
유대인의 교육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라마’ 이다. 이 단어는 한국어에 ‘왜’, 영어에서 ‘why’, 그리고 중국어에서 ‘웨이션머(为什么)’에 해당한다. 이 말은 이제 기독교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라마에 해당하는 교육법을 그들이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사실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이 유대인은 질문의 교육법을 중요시한다는 것만 알지 그것이 어떻게 유대인 사회에서 실행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라마의 교육법을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가. 토론의 문화
한국의 EBS에서 이스라엘 여행기를 방영한 적이 있다. 그 중에 이스라엘 랍비 학교를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도서관 같은 곳인데 일반적인 도서관과는 달랐다. 학생들이 둘씩 짝을 지어 토론을 했다. 그것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세 개의 주장이 나온다고 할 정도로 토론에 익숙하다.
나. 어린이의 인격
이스라엘에서 십 수 년을 산 권성달 교수가 강의 중에 이스라엘 어린이들에 대해 말했다. 이스라엘 어린이들은 이미 초등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대학생 정도의 토론을 한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가정에서 교육을 받을 때에 끊임없이 부모에게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는 자녀의 질문에 대해 귀찮아하지 않고 모두 대답을 한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가 자녀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준다. 자녀의 질문이 점점 더 어려우지면 자료를 찾아서라도 대답을 해준다고 한다.
또한 어떤 어린이가 어떤 어른을 만나서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의 견해와 질문을 모두 당당하게 하도록 훈련시킨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어리셨을 때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유대인 랍비들과 질문을 하시기도 하며 대화를 했다는 장면을 연상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라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과 비교한다면 서울의 명문대 교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 예수님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린 예수님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벌써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자체가 나는 상대방이 유명하고 실력을 갖춘 교수라는 생각으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상대가 얼마나 유명하고 유능하고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질문과 생각을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 관계의 문화 혹은 시비(是非)의 문화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한국에 있는 장유유서(長幼有序) 혹은 효(孝)의 생각과 대치되는 점을 발견한다. 장유유서와 효와 같은 관점들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비(是非)를 가리는 토론의 문화에는 치명적 단점으로 작용한다. 중국과 한국은 상하질서를 중심으로 한 관계의 사회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이 생각의 중심이요 사회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한국 사회는 옳아도 옳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잘못된 것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직장생활 등 생존이 문제가 된다. 내가 중국에 처음 왔을 때에 서점에서 본 책이 [싀완거웨이션머(十万个为什么)]라는 책이다.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에게 ‘왜?’를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과학에 국한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미 간단한 정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복잡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이다. ‘왜?’ 라는 질문은 복잡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까지 모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사회는 왜? 보다는 ‘꽌시(关系)’ 즉 관계가 형성되어 왜? 라는 질문을 모두 질식시켰다.
요즘 한국에서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창의성’이다. 학습과정에서 외우고 습득해야 할 것은 이미 완벽할 정도로 다 한 것 같다. 그래서 대학을 갈 때에 그 학생이 얼마나 창의적인가? 를 본다. 그런데 창의성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 나오는 것이다. 왜? 라는 질문은 시비를 정확히 논하는데서 가능한 것이다. 만일 시비가 정확하게 논하여지지 않고 관계에 의하여 대충 얼버무려지는 사회라면 토론이나 논쟁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토론이나 논쟁이 없다면 사람들에게는 기준이 없는 것이고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는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당한 관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는데 구태여 시비를 가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사회적 상황에 만족하고 그냥 살아가는 형태를 갖게 되지 결코 창의성을 따라 새로운 사회로 변모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3. 한국 기독교인 자녀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한국이나 중국은 시비를 가리는 사회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에 의하여 조직된 사회이다. 한국교회에서 교인들이 여기에 아주 적합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에 ‘은혜로 합시다.’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적당히 관계로 일을 처리하자는 뜻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 교회가 이렇게 관계라는 뜻의 적당한 은혜로 일을 처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라나는 교회의 자녀들이 유대인들에게 나타타는 것과 같은 뛰어난 인물로 자라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나의 이 말에 동의한다면 그래서 적어도 나의 자녀는 이런 한국적 관계의 사회에 침잠해버리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면 그 부모가 먼저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상하종속적 관계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부모가 먼저 자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사이라고 할지라도 옳고 그름 앞에서는 솔직한 각 개인임을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 또한 자녀가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 이야기들은 어린 자녀가 성장할 때에 가장 기초가 되는 지식이 될 것이다. 마치 육체가 만들어질 때에 태아시기에 있었던 배아줄기세포와 같다.
4. 유대인은 어떻게 자녀에게 시비(是非)의 문화를 전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의 역사에서 한 가지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은 약 2천년동안 자신들의 땅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각 민족들이 만든 사회 속에서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총명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현재 한국이나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유교나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 자녀를 교육하는 것과 같이 매우 힘든 환경 가운데 그들의 자녀를 키웠다.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과 다른 사회 환경에서도 그렇게 자녀들을 총명하게 키워내는 데에는 그들의 직업과 연관이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어떤 사회에 있든 대개 교수나 교사와 같은 교육자로 양육한다. 혹은 회사의 경영인이 되게 한다.
만일 어떤 돈이 없는 유대인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상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의 유대인은 그냥 일만 하면서 직원으로 퇴직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을 하면서 상점을 어떻게 경영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원래의 주인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경영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점을 경영한다. 혹은 기술 분야라고 한다면 자신을 가르친 장인보다 어떻게 하면 더 뛰어난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은 어떤 사회에 있든지 그 사회에서 축출하면 그 사회가 너무나 많은 손실을 입을 정도가 되는 위치에 선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사회에서 전문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라마의 교육법’ 때문이다. 즉 ‘왜 그런가?’ 하는 질문을 하는 습성이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공부를 하던 기술을 배우든 어떤 분야에서든지 최고의 지위로 오르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유대인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우리들이나 우리들의 자녀가 일반 사회에서 처한 환경은 유대인이 이방인들의 사회에서 처한 상황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자녀들을 그 사회의 전문직에 해당하도록 키워야 한다. 교수, 교사, 목사 등등 또한 사업 분야에서 자신들만의 전문 경영의 방법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술에서도 창의성이 있는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한국 사회처럼 갑질 이 많은 사회에서 어떤 수치도 받지 않고 당당히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5. 결론
이제 결론을 쓰겠다. 한국이나 중국 사회는 자녀들에게 이미 습득되어진 답을 외우도록 시킨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할 것인지를 대화와 토론과 자료를 찾는 것을 통해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묻기도 하고 대답하는 모든 토론과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하는 담대함이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 자녀들이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공부한다고 생각해보라. 또한 유대인 사회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진리라고 하는 절대 기준이 있는 사회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시비를 가리는 사회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자녀들은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지성이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라마의 교육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이방인 사회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전문인들이었으며 그 사회의 지배계층이 무시할 수 없는 기술자들이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어느 사회에서나 나그네와 같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배척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그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도 마차가지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이 그 사회에서 전문인, 꼭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자들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나라가 세상을 떠돌았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마침내 이스라엘 영토로 되돌아갈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교육법을 따라 그들의 전통과 정신과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체의 생명을 살리고 가족들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가? 이 타협을 하게 되면 사실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 사탄이 더 이상 핍박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녀도 결국은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구원조차도 보장할 수 없는 깊은 혼돈에 빠지게 된다. 아 참, 한국적 상황은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서도 세상 사람과 같은 혹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 속에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기독교인들조차 자신들과 같은 상태로 끌어내릴 때가 많다. 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려고 하면 기독교인은 오히려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로부터 핍박을 당할 수도 있고 믿는다고 하는데 신앙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사회에서 의연히 그들로부터 제거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들이 감히 제거할 수 없는 각 분야의 전문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거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여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라마의 교육법’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 Now&Here©유크digitalNEWS
글 조용선 선교사/ INUC 전문인 칼럼니스트/ GMS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