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쉬 공동체 주목
인위성을 배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예배의 회복
아미쉬 공동체 주목-코로나19 사태로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포비아’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첨단 산업사회를 살면서 제4차 산업혁명의 혁신을 꿈꾸는 자본주의 정점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우리들은 다시금 근본적인 정체성을 물으며, 여러 면에서 도전받고 있다.
[영성저널=이장형 교수] 아미쉬 공동체 주목 »ㅊ아미쉬 공동체를 왜 주목하는가? 예기치 못한 코로나 19사태의 장기화는 사회 및 교회 공동체에게 여러 면에서 충격을 주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문제는 교회에서 회집하여 드리는 예배가 자유롭지 못한 점과 세계화와 국제 간 교류의 축소로 인한 세계 경제의 하강과 소비생활의 위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 소종파인 아미쉬 공동체의 모습을 통하여 생활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미쉬의 삶이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나 대안이 될 수는 없겠지만, 코로나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비관론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의 삶은 위축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미국 대륙에서 주로 펜실베니아(Pennsylvania), 오하이오(Ohio), 인디애나(Indiana)주 등 3개 주에 걸쳐서 많은 종교 인구를 갖고 있는 비교적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계 소종파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자동차와 전기 등 현대 문명을 이용하지 않는 집단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2006년 펜실베니아 니켈 마인즈(Nickel Mines)의 아미쉬 학교에서 마을의 우유배달 트럭 기사 찰스 칼 로버츠 4세(Charles Carl Roberts IV)가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5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아미쉬 사람들이 범죄자인 로버츠 4세를 용서하고 그 의 가족들을 위로한 일화가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중에게는 아미쉬의 일상이 영화 위트니스(Witness)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막연한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많다. 반면 그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많지 않은 현실이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가 전개되면서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반기독교적인 정서에 편들기를 하고 있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 앞에서 교회는 스스로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성(聖)’과 ‘속(俗)’의 문제에 있어서 속 보다는 오히려 성이라는 종교 자체의 정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현재와 기성 공동체 중심의 시야인 ‘인사이트’를 넘어서서 객관화와 타자화된 시각에서 조직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아웃사이트’의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바람직한 종교성 회복과 긍정적인 사회문화적 담론 형성은 한국교회의 시급한 과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주는 아미쉬 공동체의 가정 중심적 예배, 지역 중심의 생산 및 소비모델 등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아미쉬의 가정 중심 예배와 규모 있는 경제생활
첫째, 예배 공동체로서의 아미쉬가 갖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고 공식적인 신학교육이나 교회 조직 등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 그룹 내 역사 속에서 교권주의자들에 의한 피해와 정부의 조직적 핍박 등 재세례파들의 눈물겨운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에 신교 및 구교 양측으로부터뿐만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핍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격주로 설교예배를 드리는데, 교구 내에서 모든 집들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영감 있는 예배를 기원하면서, 회중 중심의 예배를 지향하고, 그중 설교자가 지정되기는 하지만 회중을 사로잡는 공동체의 예배가 있다. 주일 오전 9시에서 정오까지 진행되는 주일예배는 격주로 진행하며 통상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예배는 교우들의 집을 순회하며 드리기에 이웃 교인들의 협력을 받으며 의자 정돈 등이 이루어진다. 예배 후에는 공동식사와 시인방문 등이 행해진다. 세례받지 못한 어린이들과 공동체 이외의 구성원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 행동을 통해 복종과 경의, 집단의 결속을 다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설교예배 이외의 명절로는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예수 승천일, 오순절, 추수감사절 등이 지켜지는데 지역 공동체마다 지키는 특징이 다르다. 특히 아미쉬는 성찬식에 이어지는 세족례를 통해 독특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세족례를 거행할 때는 보통 때보다 긴 설교가 행해지는데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까지 이어지는 긴 설교가 행해지고, 남녀가 각각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의식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의 교제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별히 아미쉬 사람들은 16세기식 찬송가를 고수하는데 모음집이란 뜻의 아우스분트(Ausbund)를 사용한다. 악보 없이 단순하게 시(詩)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희생양이 된 신도들의 비극적인 삶과 사건들을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독창부는 대화형식으로 희생자, 심문자, 고문자, 당국, 사형집행인 사이의 대화까지 담았다.
설교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설교보다는 성령의 주도를 지향하고자 하는 영성을 강조하여 미리 준비한 원고나 메모 없이 한 시간여에 걸쳐 메시지를 전한다. 이는 인위적으로 메시지를 작성하여 효율적인 기법을 통해 전하려는 현대적 수사학 행태의 설교를 각성하게 해 준다. 물론 정통 기독교의 입장으로서는 응당 직접계시나 예언행위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이들이 수행하는 원시적이며 순수한 메시지 전파에 대해서는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목사는 설교를 담당하는데, 두세 명의 목사가 순서를 정하여 교대로 설교를 한다. 속한 교구에 예배 모임이 없는 주일이나 자신의 설교가 없는 목사는 다른 교회를 방문해 설교를 한다. 목사는 미리 준비한 원고나 메모 없이 교도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하고, 교도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 준다. 아미쉬 교회의 목사들이 목회자를 위한 특별 교육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는데도 사전 준비 없이 한 시간여에 걸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감당해 내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미쉬의 예배 형태가 오늘날 기독교에 주는 교훈은 예배의 원시성(元始性)이다. 현대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기계화되고, 의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현대화에 발맞추어 대형화된 예배, 첨단 악기와 장비에 의존한 예배, 판매와 카페시설 설치는 물론이고 부속기업을 경영하는 등 세속화되어 가는 경향이 농후하다. 침묵 가운데 절대자의 소리를 듣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종교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이며 인간의 삶에 많은 풍요로운 가치들을 가져다주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 모습을 통해 물질주의, 번잡함에 지쳐있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성경 중심 (찬양은 기본적인 곡조로 악기 없는 일종의 찬트식으로 기억되고 있음)의 찬양은 지나친 악기, 소수의 프로페셔널함에 의존되어 공연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예배를 아미쉬 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앞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를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현대사회에서의 기독교 예배는 ‘과연 누구를 위한 찬양인가?’, ‘누구를 위한 설교인가?’, 그리고 ‘진정한 영광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면에서 별도의 전용 공간 없이 가정에서 돌아가면서 드리는 예배, 성경을 암송하고 해석하는 소모임은 개신교의 셀모임이나 기타 공동체도 본받을 만한 조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인위적인 조직을 구성하거나 관리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감당할 만한 숫자들이 교구라는 단위로 결속되어서 가정을 중심으로 협력하게 될 때 많은 신앙적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세계 경제의 급속한 위축에 신앙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기독교는 소비문화의 폐해를 잘 파악하고 절제되고 규모 있는 경제생활을 수행하면서 정신적, 도덕적 영감의 회복을 통해 진정한 영성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하게 될 때 그 존재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미쉬 공동체, 메노나이트 교단, 퀘이커 교단의 직업, 기업윤리를 고려하면서 수도원운동, 공동체 생활운동, 협동 조합운동, 기타 분파주의적 기독교운동 등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이 시대를 향해 윤리적 소비와 도시문명에 대한 통전적 반성을 촉구한다. 그들은 소비, 생산 그 자체에 가치를 둔다기보다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생활을 우선적 가치로 여기며 그들 특유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아미쉬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에 종사한다. 그들은 생계수단의 자급자족을 추구하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결코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땀 흘려 뿌린대로 거두고자 하는 정직한 양심과 태도가 이들의 심적인 밑바탕이다. 이들이 자동차를 비롯한 현대적인 기계문명을 멀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계문명이 가족 간의 거리를 멀리하게 만들고 그 결과 가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금하는 이유도 같은 선상에 있다. 다양한 오락과 성적인 문란함이 텔레비전을 통해 들어온다고 판단하고 이를 우려하고 있으며 텔레비전이 가족공동체를 위협이 된다고 본다. 그들은 목수, 소공예 등 자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그 규모는 7명 이하의 작은 기업에 한정된다. 큰 규모의 직장은 결코 선호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비,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성실한 노동의 참여와 공동경영을 통한 경제를 도모한다.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그들은 공동농장이나 공동소유를 지향하거나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는 경우가 많지만 경작지 확보는 그들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그들이 이주하고 확산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미주 일대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경작지를 찾아서 확장된 면이 있다.
아미쉬는 사회보장제도나 연금, 보험 등에 대해서는 종교적 자유를 축소하고 침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연방법에 의해서도 그들은 보험, 연금 등에 있어서는 예외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세, 교육세 등 주요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정부와 협력하는 측면도 있다. 선거에 있어서는 개인적 선택권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물론 사안에 따라선 그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임한 기록도 있다.
소통하는 아미쉬 공동체
현대사회 속에서 생존이 어려울 것 같은 원시성을 갖는 아미쉬 공동체의 생존 원동력은 소통하는 공동체라는 점에 있다.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지만 이들만의 방언인 독일어의 한 갈래를 갖고 있으며 찬송과 성경도 독일어 판을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들과는 영어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도시에 사는 외부인들의 회사 트럭이 아미쉬 사람들이 생산한 우유를 모아서 가져가고 달걀, 농산물, 가축을 시장까지 운반하며 버터, 빵, 식료품을 주간 일정에 맞추어 외부인들이 아미쉬 농장으로 배달해 준다. 즉 그들의 생활 방식은 게토화된 담으로 둘려진 그들만의 특별한 지역에 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잉글리쉬라고 말하는 이웃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제하며 생활한다. 이주의 역사 속에서 종교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그들 특유의 문명에 대한 금기와 생활 방식을 추구하다 보니 일종의 집단 거주지역이 형성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웃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미쉬의 생존의 바탕에는 격주로 드리는 순회예배와 원룸스쿨의 강한 교육적 결속이 있다. 아미쉬의 외견상 가장 허약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면은 조직력이 느슨한 듯한 ‘교회’와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허약하게 비쳐지는 교회와 예배에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숨어 있다. 세족식의 경우에도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그들은 교회와 예배를 통해 그들은 동지애와 선조들의 신앙정신을 계승하게 하는 진정한 교육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학교도 무학년제이고 교육시설 또한 열악한 형편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은 그 어떤 학교교육보다도 뛰어난 공동체 정신을 교육하며 이 정신을 지탱하고 확산하는 힘을 갖는다.
현대화된 교육제도와 학교라는 시스템을 통해서만 교육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례를 바로 아미쉬 공동체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전학생을 한 교실에서 수업하는 방식을 취한다. 소위 원룸스쿨인 것이다. 교사도 한 명뿐이고 수업시간도 최소한이며 고학년이 되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는 친밀한 구성 체계를 갖는다.
교회 또한 현대화된 학교식의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는다. 이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체계를 지향한다. 아이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 격주로 드리는 설교예배에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예배의 준비와 참여의 모든 과정을 목격하고 배움으로 살아있는 교육이 된다.
공동체 전승의 계승과 삶의 태도를 통한 학습 자체가 이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은 이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감을 갖추게 하며, 태도와 능력까지도 함양하게 한다. 물론 원룸스쿨이 갖는 한계도 있다. 특히 초보적인 교육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 걸맞는 전문인들을 양성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사진만 해도 많은 유사성이 있는 메노나이트 교파의 교역자들이 초청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수백 년의 어려운 기간에도 그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중심의 교육을 통해 꾸준히 공동체를 지켜 온 저력을 존중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포비아’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첨단 산업사회를 살면서 제4차 산업혁명의 혁신을 꿈꾸는 자본주의 정점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우리들은 다시금 근본적인 정체성을 물으며, 여러 면에서 도전받고 있다. 처음에는 신천지라는 일부 종교집단에 대한 대중의 혐오가 기독교 및 종교 전반으로 확대되는 위기에 한국교회는 처해 있다. 기독교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예배, 교육, 친교 등을 위한 회집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함께 대두하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우리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회복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런 면에서 아미쉬 공동체의 생존과 확장은 우리들에게 또다른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아이앤유크저널
글 이장형 교수/ 백석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 및 신학대학원 졸업
숭실대학교 (Ph.D.)
(Visiting Scholar)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현) 백석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청수백석대학교회 담임목사, 니버연구소 소장
(전) 숭실대학교, 장신대학교, 한남대학교 강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 전문위원
(저서) 한국기독교윤리학의 수용과 정립』, 『글로벌 시대의 기독교윤리,
라인홀드 니버의 사회윤리 구상과 인간이해, 기독교윤리의 교육적 실천
<출처>
교회 통찰_코로나 · 언택트 · 뉴노멀 시대 교회로 살아가기
안명준 외 45인, 세움북스, 2020, 453-4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