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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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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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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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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성경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

코로나와 성경-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코로나란 이름이 인류의 가장 혐오스럽고, 악명 높고, 저주스러운 이름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인류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코로나란 이름이 바이러스 때문에 아주 왜곡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본래의 코로나가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바이러스 코로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성경의 코로나를 살펴 봅니다.

[목양저널=이창기 목사] 코로나와 성경 »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COVID-19)로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신문이나 방송도 온갖 코로나 이야기 뿐입니다. 코로나란 말이 성경에 나올까요? 코로나란 말은 라틴어로 라틴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68회). 코로나를 한글 성경에선 ‘금테’(출 25: 11, 24, 25, 30: 3, etc.), ‘화환’(왕상 7: 29, 30, 36, etc.), 또는 ‘면류관’(대상 20: 2, 에스더 8: 15, etc.)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중 면류관으로 번역된 곳이 가장 많습니다(57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코로나란 이름이 인류의 가장 혐오스럽고 악명 높은 저주스러운 이름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인류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코로나란 이름이 바이러스 때문에 아주 왜곡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본래의 코로나,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가르쳐 줍니다. 바이러스 코로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성서의 코로나를 살펴 봅시다.

코로나는 권위,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머리에 코로나, 즉 면류관을 썼으며 다윗도 금 면류관을 썼습니다(대상 20: 2). 성소 중의 성소, 지성소의 법궤도 금으로 테를 둘렀습니다. 그것도 코로나입니다. 말할 수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1. 성도들의 면류관

면류관은 왕들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에게도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알기에 상 받도록 달음질 하며, 또한 이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성도들은 노력하며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고전 9: 24-5). 그렇다고 경기하는 자가 법을 무시하고 이기기만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100미터 달리기 종목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4년 전 올림픽에서 우승한 미국의 칼 루이스(Carl Lewis)와 1년 전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캐나다의 벤 존슨(Ben Johnson)의 대결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결에서 벤 존슨이 9초 79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칼 루이스를 넉넉하게 이겼습니다. 하지만 불과 3일 뒤 벤 존슨은 금메달을 잃고 맙니다. 금지 약물이 그의 소변에서 검출되었기 때문이지요. 성도들도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합니다(딤후 2: 5).

사도 바울은 성실히 믿음 생활 잘 하는 성도들을 볼 때 마치 면류관처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데전 2:19).

성경에는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의 면류관은 사도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딤후 4: 8).

‘생명의 면류관’도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속하였습니다(야 1: 12).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생명의 면류관’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10).

사도 베드로는 특별히 교인들을 돌보는 지도자들(목사들)을 향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며,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 4) 말씀하였습니다.

면류관에 관한 가이사랴의 성 바실(370–379) 주교의 증언은 깊은 감명을 줍니다. AD 320년 동로마의 황제 리니치오가 기독교 신앙 금지령을 내리고 기독교도들에게 우상 앞에 향불을 피우라고 명하였을 때 아르메니아 지역 세바스테(Sebaste)에 주둔하던 로마 제12 군단 번개무장 군단 소속 40명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이에 대해 저항을 하였습니다. 총독 아그리고라오는 이들을 배교시키기 위하여 가장 혹독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저들의 옷을 벗기고는 눈오는 날 호수의 얼음 위에 앉히고 그곳에서 얼어죽도록 하였습니다. 그 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를 버릴 자는 여기와서 몸을 데우라”고 유혹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40명의 용사들은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40의 거룩한 숫자대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몸이 얼어 피가 돌지 못하고 죽게 되었을 때 그 중에서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뛰쳐 나오면서 “기독교를 배반할테니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수직하던 병사들이 그 사람을 더운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목욕탕 속에 들어 가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살았다고 기뻐하며 더운 물에 들어 갔지만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한 병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찬란한 광채가 하늘로 부터 그 용사들 위에 비쳐오는 가운데 천사들이 손에 손에 빛나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들고 내려와서 용사들의 머리 위에 씌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임자 잃은 면류관을 들고 하늘로 다시 올라가려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병사는 기독교가 참 신앙임을 알고 “나도 기독교 신자가 되겠소” 소리를 치며 즉시 옷을 벗어던지고 달려 들어가서 40의 거룩한 숫자를 채웠습니다. 성도들은 빛나고 찬란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았습니다.

찬송가 135장(새찬송가 150장) 후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I will cling to the old rugged cross, and exchange it someday for a crown). 영문을 직역하자면, ‘나는 오래된 울퉁불퉁한 십자가를 붙들리, 미래 어느 날, 그 십자가를 면류관으로 바꾸리….’ 멋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 생활이, 성도들의 수고와 인내와 헌신과 봉사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미래 어느 날, 성도들에겐 그 험악한 십자가를 빛나는 면류관으로 바꿀 날이 올 것입니다.

2. 가짜 면류관

성경에는 주로 진짜 금 면류관이 많이 나오지만, 가짜 금 면류관도 나옵니다. 앞으로 나타나 온 세계에 재난을 일으킬 황충은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계 9: 7)을 썼습니다. 금이 아닙니다. ‘금 같은 것’입니다. 면류관도 아닙니다. ‘면류관 비슷한 것’입니다. 비슷하다는 말은 진짜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짜 금 면류관은 금 면류관 비슷하지만 금 면류관이 아닙니다. 순금 면류관처럼 영광과 권세가 있는 듯 하지만, 순금같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번에 온 세계를 공포에 넣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 모습이 ‘왕관’ 쓴 것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코로나, 면류관이지만, 빛나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아닙니다. 공포의 면류관 코로나입니다. 무시무시하고 가증스러운, 그래서 지금 지구에 사는 인류에게 코로나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악명 높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황충의 재앙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고 불안에 떨게 하는 면에서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강도는 가히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계 9: 5). 더구나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 6) 말씀합니다.

황충 재앙이 쓴 면류관은 가짜입니다. 금이 아닙니다. 금 같은 것입니다. 면류관도 아닙니다. 면류관 비슷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각종 비싸거나 가치있는 것에는 항상 가짜가 있지요. 루이비똥 가방이 그렇고, 진주가 그렇고 각종 보석들이 그렇습니다. 싸구려 물건엔 가짜가 없지만, 세계 최고의 명품들은 모두 가짜가 있습니다. 가짜가 있다는 말은 진짜가 있다는 말이고 그 진짜는 정말 비싸고 좋은 것이란 말이 됩니다. 이단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복음 진리가 정말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정말 귀하다 보니 가짜들, 이단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단들은 복음 비슷하게 꾸미나 복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단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성경에 가짜 금 면류관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짜 금 면류관은 말할 수 없이 보배롭고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준비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실 면류관은 참 보배롭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딤후 4: 8)을 얻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로마 근교에서 목이 잘려 기꺼이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많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은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함입니다(약 1: 12).

주의 종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길 때, “부득이함으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않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벧전 5: 2) 하는 것도 목자장 예수님이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함입니다(벧전 5: 4).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계 2: 10).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이 귀한 믿음을 굳게 잡아 아무나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해야 될 것입니다(계 3: 11).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COVID-19)로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신문이나 방송도 온갖 코로나 이야기 뿐입니다. 코로나란 말이 성경에 나올까요? 코로나란 말은 라틴어로 라틴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68회). 코로나를 한글 성경에선 ‘금테’(출 25: 11, 24, 25, 30: 3, etc.), ‘화환’(왕상 7: 29, 30, 36, etc.), 또는 ‘면류관’(대상 20: 2, 에스더 8: 15, etc.)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중 면류관으로 번역된 곳이 가장 많습니다(57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코로나란 이름이 인류의 가장 혐오스럽고 악명 높은 저주스러운 이름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인류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코로나란 이름이 바이러스 때문에 아주 왜곡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본래의 코로나,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가르쳐 줍니다. 바이러스 코로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성서의 코로나를 살펴 봅시다.

코로나는 권위,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머리에 코로나, 즉 면류관을 썼으며 다윗도 금 면류관을 썼습니다(대상 20: 2). 성소 중의 성소, 지성소의 법궤도 금으로 테를 둘렀습니다. 그것도 코로나입니다. 말할 수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3. 열두 별의 면류관

성경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한 여인’을 해석하는데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이 여인은 예수님을 탄생시킨 마리아라는 주장, 주로 로마 천주교회의 해석입니다.
둘째, 이 여인은 유대민족, 또는 유대교를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셋째, 이 여인은 교회를 가리킨다는 주장, 주로 개신교회의 해석입니다.

좀 더 깊이 살펴 보면 이 여인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모두 틀린 해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것 사실이지요. 예수님으로 시작된 기독교를 탄생시킨 것은 또 유대민족과 유대교입니다. 모세를 중심으로 애급을 탈출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르렀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켜 스데반 집사는 ‘광야 교회’(행 7: 38)라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섬기는 것은 또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마리아도 포함하고 구약의 유대교를 포함하고 신약의 교회를 모두 포함한, 영적이고 우주적인 교회, 거룩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12장의 거룩한 여인과 17장의 음란한 여인은 서로 상반된 대척점에 있는 여인들입니다. 12장의 여인은 거룩한 교회를, 17장의 음녀는 타락하고 세속화된 교회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거룩한 여인은 세속적인 것이 아닌 신령한 것으로 장식을 하고(해, 달, 별(계 12: 1),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계 12: 2), 용과 함께 싸우게 됩니다(계 12: 3, 4). 용의 정체는 9절에서 폭로되는데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 9)입니다. 쉽게 말하면, 거룩한 교회는 마귀와 대결합니다. 마귀와 싸워야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영적인 신령한 교회는 마귀와 싸워 승리하였고 앞으로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탄생을 무효로 돌리기 위한 마귀의 계략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기 위해 애급의 바로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아들을 낳으면 모두 “하수에 던지라”(출 1: 22)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르샤 제국의 하만은 왕의 허락을 받아 “모든 유대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더 3: 13) 하려 하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 임금의 딸로 다윗의 혈통을 잇는 남왕국 유다로 시집온 아달랴는 자기 아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죽자 ‘왕의 씨를 진멸’(왕하 11: 1, 대하 22: 10) 하려 하였습니다. 다윗의 혈통을 끊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탄생을 근절시키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로 이어져 예수님 당시 헤롯 대왕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마 2: 16). 거룩한 교회는 초대교회 이후 현재까지 마귀와 대적하여 미혹과 위협, 환란과 핍박을 받아왔으며, 또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마귀와의 대적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계 12: 4) 하였습니다. 살기등등하여 거룩한 교회를 핍박하고 출산을 방해하는 마귀의 궤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여자가 아들을 낳았습니다(계 12: 5). 그 아들은 바로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계 12: 5),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모세를 머리로 한 구약의 광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약의 교회는 마귀의 계략을 물리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 자랑스러운 거룩한 교회의 승리를 감격스럽게 이렇게 기술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 1). 이 거룩한 여인, 이 거룩한 영적인 교회에게는 열 두 별의 빛나는 면류관이 어울리지 않습니까? 마땅하지 않습니까?

열 두 별의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모세를 머리로 한 구약의 광야 교회는 바로의 궤계를 물리치고 광야를 지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며 승리하였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중심으로 한 페르샤 히브리 유대인들은 하만의 궤계를 물리치고 마침내 부림절의 기쁨과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더 9: 21-32). 다윗의 혈통을 끊으려 했던 아달랴의 궤계는 무너지고 마침내 다윗의 혈통을 잇는 요아스가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며 백성들은 큰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왕하 11: 4-21). 이 여인, 즉, 거룩한 교회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이 마땅합니다.

신약의 교회도 계속되는 마귀의 계략을 물리쳐 왔고 또 물리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시는 그날 완전한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 이 거룩한 교회에게 ‘열 두 별의 면류관’은 정말 어울리는, 찬란한 영광과 함께 큰 기쁨을 안겨주는 놀라운 승리가 될 것입니다. ‘열 두 별의 면류관’은 이 여인, 거룩한 교회의 머리에서 빛날 것입니다.

4. 주님의 면류관

초림하셨던 주님께서는 빌라도 총독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총독의 군병들이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마 27: 29, 막 15: 17, 요 19: 2, 5). 가시 면류관은 고통의 상징이고 비웃음과 놀림, 수치의 상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색 옷을 입히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 27: 29, 막 15: 18)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희롱하며 배척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척점에 있는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 15), 즉,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데후 2: 3), 곧, ‘황폐케 하는 자’(단 9: 27), 적 그리스도는 영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 43).

그런데, 상반된 모습을 보십시요.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는데 적 그리스도는 열 개의 면류관을 썼습니다(계 13: 1). 선한 목자 예수는 ‘은 삼십을 달아서 고가를 삼’아(마 26: 15, cf. 슥 11: 12)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악한 목자 적 그리스도는 ‘영접’하여(요 5: 43) 열 개의 면류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보게 됩니다. 참 목자 예수에게는 가시관을, 거짓 목자에게는 열 면류관을….. 그러나, 악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슥 11: 16)을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참 목자 예수는 버렸지만, 거짓 목자 적 그리스도는 영접할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께서는 대속의 피를 흘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대못에 박혀 십자가에 높이 달려 처참한 고통 속에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요 19: 30) 말씀하시면서 대속의 모든 일을 끝마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몰라 봤지만, 일찍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 성자 예수를 아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시고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 17).

가시 면류관을 쓰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 10).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만민을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재림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악한 자 적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혀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게’(계 19: 20) 될 것입니다. 한 때 사람들을 미혹하고 권세를 행하며 영광을 누리고 행세하던 적 그리스도는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모욕과 수난을 당하며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일찍이 수난 당했던 그가 크신 영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그 머리에 ‘금면류관’(계 14: 14)을 쓰실 것이며 그는 백마(계 19: 11)를 타시고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계 19: 12) 쓰실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오셔서 가장 처참하게 고난 당하신 어린 양 예수께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그 머리에 ‘많은 금 면류관’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그를 기쁨으로 영접할 것이며 함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5. 면류관 벗어 드리고….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은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 9: 24-5), 의의 면류관(딤후 4: 8), 생명의 면류관(야 1: 12, 계 2: 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 4)입니다. 이 면류관을 얻기 위해 성도들은 달음질하며, 절제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시험을 참고, 죽도록 충성을 다합니다. 목자(목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양 무리를 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즐거운 뜻으로 하며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고 양무리의 본이 되기 위해 힘 쓰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나 앞으로 나타날 재앙 황충의 재앙도 무엇인가 그 머리에 쓴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이 아닙니다. 면류관도 아닙니다.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금도 아니고 면류관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아우르는 영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항상 악한 세력, 마귀와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살기등등한 마귀와의 전쟁에서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대결하여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따릅니다. ‘열 두 별의 면류관’을 그 머리에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땅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워 드려야 할 것이지만, 사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고통의 면류관, 희롱의 면류관, 수치의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그를 처참히 죽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는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부활하사 새 생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마지막 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 백마를 타시고 이 땅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많은 금 면류관’을 쓰시고 영광과 승리 가운데 당당하게 오실 것입니다. 승리자로 오실 것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려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면류관도 사실은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마땅히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입니다. 성도들은 기꺼이 자신의 면류관을 주 앞에 드립니다. 모든 성도들은 찬송가 25장(통일 25장)과 같이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찬송하며 보좌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139장(통일 154장)과 같이 “생명의 주여 면류관 받으시옵소서” 찬송 부르며 “나 위해 쓰신 가시관 나 기억합니다” 감격스럽게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 때에 이십사 장로들도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우리 주님께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송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 10-11). 그 날에 성도들은 면류관 벗어 주 앞에 기꺼이 드리며 무릎 꿇고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할렐루아! ◙ Now&Here©유크digitalNEWS크푸르트 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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