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종소리, 바르비종 하늘은 붉게 물들고
Share This Article
[에디토리얼=이창배 발행-편집인] 저녁 종소리, 바르비종 하늘은 붉게 물들고 »
장 프랑수아 밀레의 고장, 퐁텐블로 바르비종에 가다
곧,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자연과 대지를 통해 생명을 보았던, 농사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연출 되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신비를 밀레는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내겐 밀레의 만종과 교감한 사건이다. 코로나 펜메믹으로 먹먹한 시대, 비대면 언탁트를 뉴노멀로 생활화 한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위대한 이야기가 탄생해야하지 않을까?
밀레의 만종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멀리 아스라이 꿈결에서만 들릴 것 같았던 밀레의 만종(晩鍾)이 현실이 되어 들려왔을 때, 가슴은 뛰었고 머리는 온통 흥분되어 한동안 정신이 멍해지기까지 했다. 그다지 광활해 보이지 않는 들판을 향해 서 있는 일행을 향해 카메라의 앵글을 맞췄을 때, 그 순식간 앵글 안의 들판, 그 들판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프랑스 시골 마을의 풍경은 바로 만종의 배경이 아니던가. 프랑스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울창한 숲과 광활한 농지가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뒤로하고 바르비종 (Barbizon) 마을에 당도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참으로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신기한 방법으로 밀레의 마을까지 오게 됐으니 얼떨떨한 기분이다. 사실은 퐁텐블로라는 지역의 한 수련장에서 행해진 집회에 갔다가 잠시 휴식 시간을 맞아 주변을 돌아보자는 몇몇 사람들의 의기투합에 의해 나선 길이었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고 나선 길은 아니었지만, 농촌 마을의 풍경이 아름다워 여기저기 둘러보다 여기까지 오게 된 우연한 방문인 셈이다.
바르비종은 작은 마을, 오래된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낡고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전형적인 중세풍의 마을인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마을은 그야말로 화가들의 마을답게 곳곳에 문을 연 화랑과 카페 그리고 골목과 거리에는 화가들의 그림을 모자이크로 만들어 눈길을 끌고 있다. 비로소 이곳이 바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의 근거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바르비종은 시골에 있는 그저 작은 마을일 뿐이었지만 19세기 중반, 당시의 파리에 전염병인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이 전염병을 피하고자 파리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이곳, 바르비종으로 이사 온 두 화가에 의해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바로 피에르 에띠앙 테오도르 루소(Pierre Etienne Theodore Rousseau, 프랑스, 1812-1867)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프랑스, 1814- 1875)였다.
미술사에서 ‘자연주의(Naturalism)’는, 자연과 전원생활을 사랑했던 화가들이 파리 근교에 있는 이 마을에 머물러 살며 풍경을 주로 그렸기에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특징은 직접 야외에 나가 대자연 속에서 풍경화를 그렸던, 근대 풍경화가 집단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오늘 나에게 있어서 가장 남는 것은 밀레에 대한 추억이다. 그가 살면서 생애를 마쳤던 집이자 화실은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방문객들에게 열려 있다. 가난함이 물씬 풍겨나는 그 집안에는 밀레의 그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그의 화구들이 놓여 있다. 가난한 화가 밀레에게는 9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일설에는 그가 얼마나 가난했던지 물감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한다. 당시로는 그림 한 점도 제대로 팔리지 않을 정도로 무명 화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특히 농부들의 일상과 애환에 대한 그의 소박한 관찰은 하나의 신앙고백처럼 들려진다.
‘상쎄’라고 하는 사람에게 보낸 밀레의 편지가 런던의 어느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편지의 글 가운데 나오는 대목 중에 “어떤 비평가는 내가 전원에서 아름다운 매력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떤 매력보다도 더한 것을 보고 있네, 무한한 광휘를 말일세. 그리스도가 ‘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솔로몬의 영화가 지극했을 때도 그 치장이 한 떨기 이 꽃만 하지 못했더라….’ 하고 말한 그 조그마한 꽃을 보고 있는 것일세. 나는 저 지평선 위에 떠 있는 구름 위에서 빛을 보내오는 태양을 본다네. 경작기를 끌면서 땀을 흘리는 말을 보고, 돌이 많은 밭에서 아침부터 일하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제 휴식을 취하려는 농부의 모습을 본다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찬란한 극인가? 그것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오. 먼 옛날부터 이 대지 위에 전개되고 있던 광경이오… 나는 원래 농촌에서 자라 농촌풍경밖에 모르고 살았다오…….” 라는 글이 있다.
실제로 밀레는 퐁텐블로 숲 근처의 샤이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그의 대표작인 <이삭줍기>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추수하면서 땅에 흘린 이삭을 주워 가져가는 세 여인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도록 구도를 만들었다, 그림의 배경에는 엷은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멀리 산더미처럼 쌓인 짚더미가 보이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허리를 굽힌 아낙네의 모습은 한 알의 알곡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이 자아내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만종(晩鍾)>은 감자 바구니를 땅에 놓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감사의 기도를 하는 젊은 부부를 앞에 두고 뒤로는 멀리 마을의 교회당이 자그마하게 보여 지고 있다. 바닥에는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은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은은하게 붉어져 가는 노을과 적막한 들녘의 공간으로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는 감춰진 비밀이 있다. 그래서 <만종>은 매우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파리의 오르쉐 미술관에는 <만종>에 대한 이야기가 부연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애절함이 흐른다. 그 시대 지독한 가난과 추위 속에서 배고픔을 견디어내며, 빨리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젊은 부부에게 커다란 시련이 먼저 닥쳐왔다. 아기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들 부부가 죽은 아기를 위해 깊은 슬픔 속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밀레가 화폭에 담은 것이다. 그 뒤로 이들 부부를 위로하듯 멀리 교회당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바구니 속의 아기의 시체는 감자자루로 바뀌어 지고, 슬픔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대체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을 보게 된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했다. 그 이후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진 것인데, 훗날 루브르 미술관은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감자자루가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했다 고 전한다.
퐁텐블로(Fontainebleau)의 바르비종 (Barbizon) 마을, 사실주의 풍경 화가들의 고향과도 같은 이 작은 마을에 밀레가 있었으므로 오늘날 프랑스의 자랑, 위대한 예술이 탄생했다. 지독한 가난과 처절한 환경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땅을 지켜 살았던 농부들의 애환이 한 천재적인 작가와 만남을 이뤘기 때문이다. 농부들을 포함하여 단순한 풍경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던 루소와 밀레의 마을 바르비종은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 숨 쉬는 고장이 됐다.
곧,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자연과 대지를 통해 생명을 보았던, 농사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연출되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신비를 밀레는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코로나 펜메믹으로 먹먹한 시대, 비대면 언탁트를 뉴노멀로 생활화 한 채 살아가야하는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위대한 이야기가 탄생해야하지 않을까?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농부로 그 본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주인공을 발견하는 안목을 열어주소서! 어둠을 헤치며, 그 어둡고 쓸쓸한 공간마져 가득히 따스한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 Now&Here©유크digitalNEWS
필자 이창배 목사/ 본지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