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문화권 성장 자녀의 정체성 고찰
정체성 모국어에서 시작… 영어로 ‘마더 랭귀지’라 한다
타 문화권 성장 자녀의 정체성 고찰- 이 글은 2014년에 썼습니다. 저의 사상이나 글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더 다듬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6년이 지나서 이 글을 다시 볼 때는 보다 다듬어서 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가 무엇이지를 읽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교사들이 자녀를 교육할 때에 어떤 관점으로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할 수 있다면 이 글은 나름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것입니다…
[교육저널=조용선 선교사] 타 문화권 성장 자녀의 정체성 고찰 » 아래의 들어가는 글은 2018년 GMS 본부에서 조용성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에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어떤 상황과 의식을 갖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었던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부터가 2014년에 쓴 글입니다.
2018년에
추방된 후 본부에서 선교총무 조용성 선교사와 담화를 하다가 선교사 자녀교육에 대한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아들과 대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TCK라고 하는 ‘제 3 문화의 자녀’라는 개념의 교육법에 대해 비평했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총무께서 저를 특이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TCK를 비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선교총무께서는 설명을 듣고 매우 타당한 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저도 사실은 선교총무와 대화하면서 약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말했다고 해서 성경과 비교, 분석해보지도 않고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도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TCK 교육론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데 이것을 보시고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international school의 교육관에 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비평한다면 international 은 그야말로 ‘국제간의’라는 말로 international이어야지 영어가 제국주의처럼 우리의 자녀들에게 교육되어지면 안 됩니다. 국제학교는 모든 언어와 문화에 대해 학생들이 존중하도록 교육되어야 합니다. 제가 1998년 선교훈련을 받을 때에 영어가 좋다고 그 자녀가 영어로 모국어로 쓰도록 교육했던 선교사 부부가 그 자녀로 인하여 엄청 고통을 받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결코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은 약간 억지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외국에서 성장하는 선교사 자녀들이 한국을 기본적으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 의도적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약간 깹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대로 두어 사람들이 읽기를 원합니다.
1. 정체성은 복합적인 것인가?
최근에 나는 나의 작은 아들 한영이로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은 복합적인 것이라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나는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번은 작은 아들이 갖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아들은 한국의 좋은 장점과 서양의 장점을 취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고 했다. 한영이가 갖고 있는 생각은 좋은 관점이다. 그러나 나는 한영이가 정말로 그렇게 했을 때에 그 아이가 만드는 정체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모국어에서 시작한다. 모국어를 영어로는 ‘마더 랭귀지’(mother language)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이 형성됨을 말한다. 여기서 “어머니”란 가족과 사회를 뜻한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들은 실제로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 속에 있지 못하지만 최소한 가족은 같은 언어 속에 있다. 그리고 아주 적은 기회이기는 하겠지만 같은 언어의 또래 집단과 어울리기도 하고 또 때로 자신의 조국을 방문하여 체류할 기회들이 있어 외국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만일 노력만 한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나름대로 나의 자녀들에게 이런 정체성에 관해 교육을 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작은 아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보면서 좀 더 주의 깊게 이 부분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의 작은 아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나는 이것이 나의 아들처럼 해외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 Melting pot and salad bowl에 대한 관점
나의 작은 아들은 한국의 좋은 문화와 서양의 좋은 문화를 함께 받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한 정체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세계에서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장(場)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場)은 공간과 영역을 다 포함하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한국 문화와 정신과 사상의 공간이고 미국은 미국 문화와 정신과 사상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복합하여 이루는 공간과 영역으로서의 장(場)은 없다. 장(場)이란 말을 ‘마당’이란 말로 쓰는 것이 더 좋겠다.
나의 아들이 착각하는 것은 미국이란 나라가 여러 민족들이 함께 살면서 복합적인 문화의 마당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아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글의 제목을 ‘멜팅 팟 앤드 샐러드 바울’(melting pot and salad bowl)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이란 나라의 문화를 살펴보자.
미국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민족들을 함께 복합시키는 ‘melting pot’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다. ‘melting pot’은 ‘스튜’(stew) 라는 음식 그러니까 한국말로 하면 ‘육개장’ 같이 여러 재료가 함께 섞여 끓여진 음식을 말한다. 미국의 지도층은 미국의 여러 민족들이 함께 섞여 하나의 ‘stew’처럼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였다. 미국의 여러 민족들은 자신의 종교와 사상과 언어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공통의 언어로 영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 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melting pot’을 만들려는 노력은 실패했는가?
그것은 이 정책을 실행하는 지도층, 그러니까 ‘WASP’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조차도 ‘melting pot’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WASP’는 ‘화이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white anglo saxon protestant)를 뜻한다. 이 말은 미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백인 앵글로색슨 계열의 개신교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민족들은 ‘맬팅 팟’(melting pot)이 되라고 하니 다른 민족들이 그렇게 되겠는가?
결국 ‘맬팅 팟’(melting pot)은 하나의 이상(理想)이었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미국은 샐러드 바울(salad bowl)처럼 야채와 과일 등 서로 다른 것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그 음식들이 하나의 용기 안에 담겨있는 것처럼 존재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해외에 있는 국제학교와 여러 교육기관들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본다. 나의 아들이 갖고 있던 생각은 현재의 교육 이론에서 모국과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나라의 문화적 장점을 따서 더 좋은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적합할 것 같으나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3. 그러면 어떤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는가?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선교사 바울(Paul)의 경우를 보자. 바울은 유대인이다. 그러나 그는 유대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것이 아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Tarsus of Cilicia)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유대인보다 더욱 정통적인 유대인이었다. 그가 그렇게 자라나는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부모도 로마 시민권자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한 유대인으로 교육했다. 바울은 당시 유명한 유대교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랍비가 되는 수업을 한 사람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한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헬라문화에도 정통했다. 그가 자라난 곳이 헬라문화의 영향이 지배하고 있던 곳이다.
문제는 오늘날 외국에서 자라나는 자녀들도 바울과 같은 상황에서 자라나지만 바울은 현재의 외국에서 자라나는 자녀들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국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을 현재 서양의 교육학에서는 ‘써드 컬춰 키드스’(third culture kids) 라고 부른다. 이것을 줄여서 TCK라고 한다. 본국의 문화도 아니고 외국의 문화도 아닌 제 3의 문화로 자라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문제는 부모의 고향을 ‘제 1의 문화’라고 하고 부모와 함께 혹은 자녀가 외국에서 생활하는 문화를 ‘제 2의 문화’라고 한다면 왜 자녀들이 ‘제 3의 문화’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그것을 TCK라고 이름 하는 것 자체가 의문이지만 일단 TCK라고 부르자.) 다시 말하지만 바울도 현재의 TCK와 같은 환경이지만 그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부모가 바울에게 먼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이란 의식과 문화를 기초에 깔고 그 위에 헬라문화를 받아들였다. 그 다음에 바울은 이 두 가지 문화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는 균형 있는 감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TCK는 본국과 외국의 두 문화를 섞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혼합이든 종합이든 일치이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섞어놓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정체성에는 혼란이 오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론상으로는 두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형성하는 제3의 문화의식이 매우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런 문화의식이 존재할 공간이나 영역이 없다. 그러므로 TCK는 바울이 갖고 있는 형태로 자라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자녀의 정체성은 부모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나는 한번 선교사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한국인 선교사 자녀들이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로 모임을 갖는 것을 보고 깊은 실망을 느꼈다. 한국어를 못하는 그 자녀들은 더 이상 한국인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언어이다. 혈통도 매우 강하지만 사실 언어가 민족을 구성하는 첫째 요소가 된다.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를 하는 아이는 어디에 속한 아이일까? 미국인일까? 영국인일까? 그 자녀들이 돈을 벌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어디에 소속감을 두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감을 둔다고 이야기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시록에도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서는 각 나라와 민족과 방언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계시록 7장 9절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9) After these things I looked, and behold, a great multitude which no one could number, of all nations, tribes, peoples, and tongues,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before the Lamb, clothed with white robes, with palm branches in their hands,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그 방향을 온전히 정하고 해야 한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고 영어를 모국어로 만든 가정들에서 어떤 폐단들이 나타나는지 종종 들어왔다. 이것은 한국인 가정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와 그 문화가 세계의 주류라고 해서 자녀에게 영어를 모국어로 삼게 만드는 대다수의 가정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나는 바울의 부모가 바울에게 행한 것 같은 교육을 하는 것이 TCK에게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TCK의 자녀가 있는 가정들은 바울의 부모가 바울을 양육한 것과 같이 양육하기를 바란다.
4. 바울의 정체성
그러면 이제 바울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의 정체성은 오늘날 자라나는 TCK에게 모범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앞서 살핀 것처럼 유대문화와 헬라문화를 모두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식에서 혼합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문화가 섞이지 않고 그의 정신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와 헬라의 좋은 점을 따서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의 기초는 항상 유대 문화였다. 그것은 부모가 바울에게 유대의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삼도록 교육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철저하게 유대의 율법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바울의 할아버지가 로마군대를 상대로 군수품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공로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다. 그리고 그가 자라난 곳은 지금의 터키에서 남서쪽에 있는 항구도시였던 길리기아 다소(Tarsus of Cilicia)라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의 유대 민족의식의 근본은 율법을 배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누구보다도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2) Are they Hebrews? So am I. Are they Israelites? So am I. Are they the seed of Abraham? So am I.
로마서 9장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1) I tell the truth in Christ, I am not lying, my conscience also bearing me witness in the Holy Spirit, (롬 9:3)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accursed from Christ for my brethren, my countrymen according to the flesh,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5) circumcised the eighth day, of the stock of Israel, of the tribe of Benjamin, a Hebrew of the Hebrews; concerning the law, a Pharisee;
바울은 어떻게 이런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유대 땅에서 자라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민족을 깊이 사랑했다. 나는 TCK들이 바울과 같이 자신의 민족과 국가와 문화와 언어를 사랑하는 자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은 각 나라와 민족과 방언 즉 언어가 그대로 유지되며 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깊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세계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세계의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전역을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의 문화가 심원하였기 때문에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헬라어였다. 로마인도 그 조상이 헬라인이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어와 그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헬라어와 학문과 지식과 문화를 학습했다. 그가 선교를 할 때 보면 아테네와 고린도 지방 등 헬라 땅에서 헬라 철학자들에게 뒤지지 않는 학문적 소견을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내면에는 유대인 의식과 정신문화를 갖고 외면으로는 헬라 의식과 정신문화를 가지며 이 둘이 혼합되어 혼동을 일으키지도 않고 하나의 정신 속에서 잘 연합하여 필요할 때에 두 의식과 문화를 조화롭게 사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TCK들이 이런 방향으로 자라나야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이 문제를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시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현재 미국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사람들이 현재 미국시민권을 획득한다는 것은 좀 더 좋은 문명과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시민권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바울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에 있는 작은 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자신들의 민족과 나라를 부끄럽게 여겼다면 바울에게 민족에 대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자신의 민족과 국가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면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위의 본문에서처럼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있다. 지금 여러 나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이 된 가정에서 적지 않은 가정들이 단지 미국시민권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아니 그 가정 전체가 정체성을 잃게 될 확률이 높다. 당신의 자녀를 바울처럼 교육하라. 그것이 가장 바른 정체성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서,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주님의 도구로 양육하는 것이다. 또한 TCK 자신도 바울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자라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위대한 문화를 이룬 민족들
이제 위대한 민족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러 민족들이 위대한 문화를 이루어 왔으나 나는 유대민족과 중국의 한족을 예로 들고자 한다. 먼저 유대인이다. 내가 그들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70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와 티투스(Titus)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대인은 유대 땅에 살지 못하고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는데 약 2000년이 지나서 1948년에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다. 약 2천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어떻게 유대인이라는 민족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는가?
나는 이 점에서 무엇보다도 유대민족을 위대하게 본다. 지금 TKC 들이 배우는 대로 한다면 외국에 살면서 좋은 점을 취하여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가면 거기에 유대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수천 년이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그들의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정신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것은 성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들 유대인이 혈통 상 가장 첫 번째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을 때에 가나안의 여자를 구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에 가나안의 여자는 쉽게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의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이 신앙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던 밧단아람으로 사람을 보내 며느리를 구해오게 했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종 엘리에셀을 보냈다. 그 의미는 엘리에셀이 보는 눈과 자신의 눈을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구해오지만 그것은 사실 아브라함이 구해온 것과 같다. 또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보낼 때에 낙타 10필에 짐을 실어 보냈다. 그것은 며느리를 구했을 때에 그 집에 주고 올 예물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며느리를 낙타 10마리에 실어 보내는 값진 물품들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그렇게 며느리를 구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을까? 그것은 며느리의 신앙과 의식이 그대로 아브라함의 손자, 손녀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에 그것을 ‘마더 랭귀지’(mother language)라고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이 성장할 때에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는 언어를 통해 자녀들의 사상과 문화가 거의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인들은 사람을 유대교에 입교시킬 때에 아버지가 외국인인 것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어머니쪽이 유대교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면 그 자녀는 반드시 시험을 치러서 유대교 신앙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지를 점검한다. 이런 의식들이 유대인들의 내면에 면면히 흐르며 2천년을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또 하나 위대하게 보는 것은 중국인이다. 중국의 화교들을 보면 외국에 살면서 수세대가 흘러도 그들끼리는 중국어를 사용한다. 물론 중국어를 잊고 다른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미 중국인이 아니다. 대다수의 중국인 화교들은 어떤 나라에서 살든 자신들끼리는 중국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한다. 그들은 언어가 문화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5천년 역사를 자랑한다. 한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혹은 뒤섞여 버리지 않고 5천년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중국의 한족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다른 민족의 통치를 받은 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한 것은 정복을 한 민족이 정복당한 민족의 문화에 반대로 정복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몽골족과 여진족이 한족을 정복했으나 몽골족은 현재 오히려 자신들의 영토가 줄어든 형태가 되었고 여진족은 지금 자신들의 언어도 사라지고 문화도 한족에게 흡수된 형태가 되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다. 각 민족은 여러 도전을 받는다. 혹독한 환경, 전쟁, 기근 등등 그러나 그런 도전에 대해 어떤 응전을 하는가? 하는 것이 그 민족이 번영할 것인지 혹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어 멸절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외국에서 자라나는 모든 TCK들은 이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너희들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자라나야 할지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해라. 그리고 그런 정체성 위에 세계적인 안목을 더해라. 그것이 바르게 자라나는 것이다.
6. TCK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관점
TCK는 부모의 국적과 다르게 그들 자신이 출생하거나 성장한 나라의 국적을 획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문명과 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이라고 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케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유럽의 선진국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TCK는 민족과 국가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TCK의 국가는 당연히 그가 취득한 국가여야 한다. 그런데 역사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일본인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미국 시민이 되어 살았다. 그 자녀들도 미국인인줄 알고 영어를 쓰며 미국인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비겁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의 화력이 집중되어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했다.
그 때, 미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미국 정부는 캘리포니아 지역에 있는 12만 명의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 구금했다. 이 일본인들은 미국 국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계 미국인 1세와 2세들이 모두 직장과 사업을 잃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것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1만7천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에 잘 보여서 가족들이 혹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싶어 자원하여 미국 군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구금된 일본계 미국인들이 얼마나 불안 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만일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계속 진행되었다면 구금된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유가 억압당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도 위험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말 생명조차 위협받는 구금생활을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계 미국인들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먹고 살길이 막막해 집과 토지를 모두 헐값에 팔았다. 후에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가? 물론 일본 군국주의 정부의 행동은 매우 비열했다. 전쟁의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야비한 행위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을 모두 수용소에 구금한 것은 전쟁 당시에는 묵인되는 행동이었지만 역사 전체로 볼 때는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르는 문제였다.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수용소에 구금되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본인으로서 미국 국적을 가진 TCK들은 이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신들은 일본인인가? 미국인인가? 미국 정부가 어떻게 자신들을 구금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앞으로 또 다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있다면 그 때는 미국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해 구금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모를 일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미국 정부는 다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구금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냉정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태평양 전쟁 때에 일본계 미국인들의 구금은 백인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 ‘멜팅 팟’(Melting Pot) 이란 정책이 왜 실패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매우 힘들었기는 했겠지만 이성을 잃지 말고 일본계 미국인들을 신뢰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분노, 어쩌면 다른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분노를 위하여 희생양이 필요했기에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구금했을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 내부에서 일본에 협조하는 간첩이 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대로 위험요소로 안고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구금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기 1장과 2장에 보면 이집트로 내려갔던 야곱의 가족들이 약 2백만 명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집트는 유목민이 세웠던 힉소스 족속의 왕조에서 이집트 본토인이 세운 왕조로 바뀌어 있었다. 이집트의 왕은 2백만 명이나 되는 유목민 전통의 히브리 민족을 그대로 시민으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만일 힉소스 족속과 같은 유목민들이 공격해왔을 때에 같은 유목민인 히브리 민족이 적과 내통하여 안에서 반기를 든다면 그야말로 이집트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를 겪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은 히브리인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그래도 히브리 민족의 인구가 늘어나자 이번에는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죽이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잔인한 짓이다. 이집트의 왕이 진정한 통치자였다면 두 민족이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았어야 했다.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짓누르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이집트 왕의 정책은 역사에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16-20세기까지 시행되던 제국주의의 침략과 같이 사악한 것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다민족 국가는 정부가 자신의 국가 내에 있는 여러 민족들에게 정책을 실행할 때에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한다. 또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민족 국가는 그 국가 안에서도 여러 민족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 부당한 정책을 실행한다면 미국 내의 한국계 미국인들은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또 그 정도가 심하다면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을 돕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볼 때는 명백한 이적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모두 체포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민족국가로서 강대국을 이루는 경우에 그 정부는 정의(justice)에 입각한 국가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 내의 모든 다민족들은 자신들이 속한 정부를 신뢰하고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다민족 국가의 정부는 민족이란 구성단위를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역사에서 그런 노력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같은 나라들은 정복한 민족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피정복지의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이 침공하여 다니엘을 잡아간 후 그에게 바벨론 식 이름으로 ‘벨드사살’(Belteshazzar)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여러 민족과 국가들의 저항을 받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각각의 민족을 인정해주고 대신 공정한 법에 의하여 질서가 잡힌 사회를 제공해주면 여러 민족들이 오히려 다민족 국가의 정부에 대해 충성을 하고 그런 나라들이 오래 지속되었다.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각각의 민족을 인정해준 나라들은 예를 들어 페르시아, 로마제국, 중국의 당나라, 몽골의 원나라 등이 있다. 이런 나라들은 오래 지속되거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이루었다.
7. TCK의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 소개
한국의 한 TCK의 전문가는 부모의 나라를 노란 나라라고 하고 부모를 따라 가서 사는 나라가 파란 나라라면 그 자녀는 초록 문화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TCK 전문가들은 TCK 들이 다 자라서 노란 나라든지 아니면 파란 나라든지 잘 정착하여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교육의 방향을 따라서 TCK가 노란 나라든지 파란 나라에 정착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TCK가 노란 나라의 문화도 아니고 파란 나라의 문화도 아닌 전혀 새로운 초록의 의식과 문화를 지속하려고 할 때이다. 만일 초록의 의식과 문화가 펼쳐질 수 있는 초록 나라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초록의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TCK를 돌보는 전문가들도 노란 나라나 파란 나라로 정착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TCK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초록의 나라는 없다. 즉 초록의 문화와 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 주장하게 되면 정체성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TCK들이 바울의 경우를 따라 자신의 모국(母國)을 정체성의 기본으로 삼기를 바란다. TCK 전문가들은 파란 나라에 정착하는 것도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모국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된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해서 말했던 것이다. TCK들이여! 너희들의 모국, 즉 노란 나라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라. 그것이 최선이다.
8. 어떻게 하면 TCK가 모국의 문화를 잘 알 수 있는가?
나는 선교의 원론을 항상 세 가지로 생각한다. 그것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사람을 양육할 때에 그 사람에게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의 언어와 역사와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선교사가 양육한 그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잘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향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TCK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삶은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자신의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TCK 자신도 자신이 속한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 또 TCK의 부모도 자녀가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지 않도록 언어와 역사를 말해주어야 한다. 내가 ‘말해준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가정에서 교육이란 것이 딱딱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가족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래, 영화, 소설 등 문화를 통해 TCK에게 자신이 속한 민족과 친해지도록 유도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9. 사회(society)와 공동체(community)의 개념
사회(society)는 공동체(community)가 모여 구성한다. 한 나라(nation) 안에 사회가 있다. 사회는 지역에 따라 나누는 지역 사회, 재산의 정도에 따라 나누는 상류 사회, 중류 사회와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사회 안에 다시 여러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는 대개 같은 목적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공동체가 된다. 한 나라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언어와 혈통과 같은 민족 단위도 공동체가 된다. 미국 사회 안에서 한국인 공동체, 중국인 공동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 내에서도 다시 더 좁은 목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그 공동체가 다시 사회로 불리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 모임은 한인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한인 공동체 내에서도 기독교, 불교와 같이 종교로 구분된다면 그것은 한인 사회 내에서 기독교 공동체, 불교 공동체와 같이 다시 세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은 어떻게 다른가? 공동체는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으며 그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다. 사회는 여러 공동체들이 공정하게 살도록 질서 유지의 기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도 그 국가 안에 있는 여러 사회들이 공정하게 살도록 법을 준수하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말이 좀 복잡해졌다. 종합해보면 국가와 사회는 공의, 공정, 공평의 기준으로 국가와 사회 안의 여러 공동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기본 구조를 제공해야 한다. 공동체는 같은 목적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 국적의 기독교 TCK는 한국인 공동체, 기독교 공동체에 소속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미국 국적이기 때문에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공의(公義), 공정(公正), 공평(公平)의 가치관을 갖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동일하게 미국이란 국가도 공의, 공정, 공평의 신념과 가치관을 갖고 정부가 운영되어야 한다. 이럴 때, 모든 공동체, 모든 사회에 속한 국민은 그 나라에 애국심을 갖고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10. 이 순신 장군의 공동체 개념
이 글은 외국인들이 읽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순신 장군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다. 이 순신 장군은 1545년에 태어나 1598년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다. 한국에서 그는 성웅(聖雄)이다. 그는 나라를 구한 영웅인데 그냥 영웅이 아니라 ‘거룩한 영웅’이다. 그가 이렇게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으로 쳐들어온 일본이 쉽게 정복하지 못한 것은 이 순신이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 선조는 경솔하게 이 순신이 일본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罷職)하고 수도 한양으로 압송하여 고문하였다. 그리고 다른 장군으로 하여금 일본을 공격하다가 조선 수군이 다 궤멸당하고 말았다.
조선의 왕, 선조는 이 순신을 다시 조선 수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군선은 12척만 남아있었다. 이럴 때, 만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의 배는 수백 척이다.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신은 다시 조선 수군(水軍)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을 버릴 각오로 명량 앞바다에서 12척의 배로 적선 333척과 맞아 싸웠다. 이 해전에서 이 순신이 빠른 조류와 조수간만의 차로 생기는 회오리 물살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빠진 조선 수군의 마음을 용기로 바뀌게 하여 마침내 해전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 이 순신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정부가 그에게 한 것은 죽음에 이를 만한 고문이었다. 왕은 국난을 극복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 순신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목숨을 다하여 적을 막아내는 거룩한 용기를 발휘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이 순신이 민족 전체를 자신의 공동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백성’이라고 불렸던 조선 민족에 대한 마음! 그것이 그로 하여금 생명을 다하여 침략자 일본을 막아내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뜨거운 눈물로 그를 흠모하며 그가 생명을 다하여 지키고자 했던 이 민족이 영원하기를 염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순신 장군을 소개한 것은 민족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안목은 쉽지 않다. 우리는 기껏해야 가족공동체, 종교공동체, 직장공동체 정도를 갖고 살 것이다. 그러나 이 순신 장군의 마음은 민족을 공동체로 볼 수 있는 큰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당시 이 순신에 대한 국왕의 행위와 태도는 이 순신으로 하여금 충분히 이 순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해 소극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갖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왕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반응보다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 전체를 그의 공동체로 보고 생명을 다하여 지키려 했던 것이다.
TCK들아! 너희는 너의 민족을 공동체로 여기도록 자라나라. 혼란스러워하지 마라. 너희들의 정체성은 너희들의 민족에 근거를 둔다. 그리고 그 위에 세계를 더해라. 사도 바울이 갖고 있던 정체성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각 민족에 근거를 둔 TCK들아! 너희들의 길이 주님의 인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11. 서구 세계의 이슬람 공동체
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프랑스에는 약 1백만의 아랍 민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수천 개의 이슬람 학교를 세우고 그들의 자녀를 가르치고 있다. 영국에는 3백만 명이 있다고 들었다. 역시 수천 개의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이 이슬람 종교로 자라도록 하고 있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제 이민 세대가 아니라 유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유럽인이 아니고 이슬람의 알라신을 믿는 아랍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대다수가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아랍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거기서 살아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아랍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내를 통하여 TCK의 전문가가 현재 서구 사회나 아시아에서 자라나는 TCK들은 TCK의 부모들이 속한 나라나 민족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고 들었다. 사실 내가 전해들은 것은 “TCK는 절대 본토인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이슬람을 믿는 아랍민족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아랍 땅에 있는 자신의 민족과 같은 정체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비교해 볼 때, 현재 서구 사회의 TCK 교육 전문가들이 선입견을 갖고 TCK에 대한 잘못된 교육의 방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유럽의 아랍 민족들은 성경의 바울과 같이 비록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정확하게 자신들의 민족은 아랍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바울은 고대 사람이니까 그런 정체성을 갖기 어렵다고 말하려고 해도 현재 유럽의 아랍인들이 바울과 같이 정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서구 사회의 TCK 전문가들이 말하는 TCK에 대한 교육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12. 국제학교의 교육원리
국제학교는 영어로 ‘인터네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 이라고 한다. 이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나라간의 학교’이다. 그런데 현재 국제학교는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모국어로 만들려고 하고 영어가 만든 문화를 학생들의 문화로 만들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매우 제국주의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라난 국제학교의 학생들 가운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영어와 영어가 만드는 문화는 우월하며 그 밖의 다른 언어와 문화들은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올바른 교육의 원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국제학교의 교육원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학교는 우선 학생들이 자신들의 부모가 속해 있는 민족과 나라와 역사와 문화와 언어를 존중하는 원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세계의 공용어로서 영어와 영어가 만드는 문화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제학교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속한 나라나 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해야 한다.
이 부분은 학생의 부모와 긴밀히 협조하여 학생이 국제학교에서 배우는 시간동안 잘 이루어져야 한다. 아시아권의 일부 부모들은 자녀가 영어를 잘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국제 학교도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곳들이 있다. 빨리 이런 생각들을 바꾸고 참된 국제학교의 교육이 시행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국제학교란 그야말로 나라와 민족과 언어들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모두를 존중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민족과 나라와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사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물론 날카롭게 자신의 민족과 나라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국제 공용어로서의 영어와 영어 문화가 소개되어지고 학생들의 생활에 젖어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국제학교란 언어와 사상과 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자신의 모국의 언어와 문화에 정통하고 또 영어의 문화에 대해서도 정통한 ‘바이링구월’(bilingual)이 되도록 혹은 bilingual의 기본적 태도와 소양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 Now&Here©유크digitalNEWS
글 조용선 선교사/ 본지 전문 칼럼니스트/ GMS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