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기의 친구들에게
[기도/묵상]
고난기의 친구들에게
헤르만 헤세
사랑하는 벗들이여, 암담한 시기이지만
나의 말을 들어 주어라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한 것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구비진 오솔길을 영혼은 걷는다.
그의 말을 읽는 것을 배우라!
오늘 괴로움인 것을, 그는
내일이면 은총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것만이 죽어간다.
다른 것들에게는 신성(神性)을 가르쳐야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영혼이 깃든 마음을 기르는
그 최후의 단계에 다다르면, 비로소
우리들은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으리.
거기서 우리들은 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
고난의 뜻을 묻다
“고난은 잠자던 용기와 지혜를 깨운다
고난은 잠자던 용기와 지혜를 깨운다.
사실, 고난은 우리에게 없던 용기와 지혜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직 고난을 통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정신과의사 스콧 펙의 말이다.
고난에 관한 명언은 수없이 많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참고서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었고, 학원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3 시절을 붙들어 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짧은 창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훈련을 받을 때, 짧은 창을 가지고 긴 창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어야,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고난은 어쩌면 짧은 창으로 긴 창을 상대하는 시간이다. 그 고난의 시간에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입증한다. 그래서 요한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호프너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삶은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며, 시련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시키고, 죽음은 그에게 면류관을 씌운다.”라고 말하지 앟았을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애가 있고 고난이 있으며 콤플렉스가 있다. 사람의 성장은 그런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풍요로운 정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 아놀드 토인비에 따르면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네 가지로 반응한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에 대한 공상에 빠지거나 몸을 움츠리고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거나 위기에 맞서 위기를 유용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한쪽 눈 실명했고, 두 다리가 불편하다. 홍역 바이러스 때문에 수십년간 당뇨로 고생하고 있고, 신장 이식 후 하루 11번 약을 먹어야하며, 극심한 저혈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에서 고난에 관한 질문을 바꾸어보라고 도전한다. “왜 나에게?”(Why Me?)라는 물음 대신 “하나님이 이 속에서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조금이나마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볼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주문이지만.
역사와 경험 그리고 성서는 사람이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라 연단하는 불이다.
헤르만 헤세는 고난의 깊은 뜻을 아는 시인이다. 그는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은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고난의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오는 휴식의 때를 시인은 기대한다. 그 날에 “우리들은 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고 말한다.
“우리의 최고선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오듯이 하나님이 성도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광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 온다.” -토마스 브룩스 ◙ Now&Here©유크digitalNEWS
글, 번역 송광택 목사/ INUC 독서전문 칼럼니스트/ 010-6334-0306/ songrex@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