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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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근원 – 무엇이 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가? 그리고 그토록 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 목적은 무엇인가?
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 목적은 무엇인가? 전자의 질문은 종교의 의미나 원천에서 이미 대답을 하였다. 그 대답은 바로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객관적으로 보인 종교현상을 역동적으로 살아가게끔 해주었다는 해석이다. 만일 그 현상을 통해서 또는 위해서 인간 자신이 어떤 본질적 삶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좀 더 나아가서 왜 그런 경험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종교적 경험은 어떤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지금부터 논의해보려고 한다.
종교적 경험이 일어나는 목적에 관해서는 역사적이고 사회적 원인, 철학적이고 실존적 인간의 상황 또는 심리적 분열의 원인 등과 같은 여러 요인들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현대의 학문적인 많은 노력들이 있어왔다.
제임스는 인격의 내면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보았다. 36) 하나는 의식적이지만 현실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이상적 자아이다. 일반적으로 그 두 개의 자아는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평화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하나의 자아가 다른 하나의 자아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이다.
현실적 자아가 이상적 자아를 억누르면 평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실질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상적 자아를 누르고 있어서 심연의 깊은 고통을 갖고 있다. 그 반대로 이상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억누르게 되면 황홀감을 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 도피적 삶을 살아간다.
제임스는 그 분열되어서 상호투쟁 관계에 있는 자아를 통합하여 조화로운 상태, 즉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교적 경험의 목적으로 보았다. 특히 현실적 자아의 억누름 때문에 갇힌 다양한 무의식적 충동들을 의식적으로 소화시켜서 보다 내면적 평온을 되찾게 하는 것이 그 경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불행이란 내면적 자아의 분열 그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이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는 보다 넓은 의미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므로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니다. 즉 억눌린 무의식적 본능들을 의식적으로 순화시키려는 삶의 태도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이러한 통합의 경험은 회심이라든가 신비주의의 경험 속에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회심의 경우에는 내면적 투쟁을 삭감하여 그 분열된 자아를 연결시켜주는데 이른바 외면적 종교가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되는 통합적 인격을 만들어주는 매개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종교적 상징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여 원형적 자기를 경험하게 해주듯이, 회심자에게는 자신이 고백적으로 받아들인 종교를 내면화시켜서 자신의 분열된 인격을 연결시켜 전인적 삶을 살아간다.
그런 회심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은 회심을 하기 전에는 종교의 다양한 요소들이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어서 의식의 주변부에 놓여 있지만 회심 후에는 정반대로 모든 삶의 중심이 받아들인 종교의 의미에 모아져 있다. 더 나아가서 전인격을 모아서 그 의미를 구체적 삶 속에서 표현하려고 한다. 종교적 경험 이전에는 삶의 모든 에너지를 세상적 일에 쏟아부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는 종교적 삶에 쏟아붓는다.
계속해서 종교가 회심자에게 분열되었던 자아를 통합하도록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그 회심자의 삶은 계속해서 헌신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기능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그 회심자는 다시 회심 이전의 상태인 분열된 자아의 고통을 더욱 깊게 받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비주의 경험의 경우에는 어떤 매개물을 통해서 분열된 자아를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자아를 통합시킨다. 이 경우 의식적 자아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이상적 자아가 주도가 되어서 일어나는 통합과정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이러한 통합의 경험은 종교 전통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다양한 형태 안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제임스는 그 통합의 경험은 두 가지 형태를 띠면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하나는 점진적 통합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통합과정이다. 전자는 의식적이고 자발적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후자는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붙잡혀서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제임스는 한 번 더 스타벅의 연구를 참조하고 있다. 스타벅은 전자의 통합을 ‘의지적 유형’(volitional type)으로 후자를 ‘자포자기의 유형’(the type by self surrender)으로 명명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 제임스는 전자의 형태를 『천로역정』의 작가인 존 버니언과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의 삶 속에서 찾았고, 후자의 형태를 사도 바울의 종교적 경험에서 찾았다. 물론 이밖에도 비종교적 형태를 포함한 수많은 예를 제임스는 ‘회심’과 ‘신비주의’ 부분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다.(41-43쪽)
저자 : 윌리암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미국의 사상가로 뉴욕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심리학, 종교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풍경화가인 헌트와 함께 그림을 공부하였으나 계속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하버드 대학의 로렌스 과학부 화학과에 들어갔다. 그뒤 다시 진로를 바꾸어 하버드 의과대학에 들어가 1869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제임스는 심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미국 대학 최초로 1875년 심리학 강의를 시작하였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생리학과 철학 교수 등을 지냈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제임스의 지적 순례는 한 분야에 고정되지 않고 학제 간의 연구를 다양하게 실천하였다. 그 결과 그의 사상은 현대에도 심리학, 종교학, 문학, 그리고 철학 등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 Now&Here©유크digitalNEWS
[출처] 윌리엄 제임스 저 | 도서출판 한길사 | 부분발췌(4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