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할 양(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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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양(羊)자와 아래에는 심장의 모양을 한 마음 심(心)자로 구성
근심하다는 양(恙)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羊)의 심장(心)에서 쏟아져 나온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며 근심(憂)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글자
[갑골문자해설=송태정 목사] 근심할 양(恙) » 우리 죄를 위해 그 제단에 쏟으신 피 앞에서 근심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근심할 양(恙)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 ‘기쁨’, ‘행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근심’라는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한문으로 근심하다는 것은 우(憂)자를 쓰는데, 근심하다는 것에 양(恙)자가 쓰이고 있는 것도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근심하다는 것에 대부분 좋은 의미로 쓰이는 양 양(羊)자와 그 양의 희생 심장(心)이 왜 들어 있었던 것일까? 갑골의 대학자인 이학근(李學勤)은 “은허(殷墟) 갑골은 상왕실의 점복 유물이며, 갑골복사 중에는 고대의 예제(禮制: 제사의 예를 행하며 신의 뜻을 묻는 제도)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일어나지도 않을 근심들을 하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쓸데없는 근심들을 하므로 말미암아 스트레스에 짓눌려 수많은 정신적 질병을 앓으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근심해야 할 근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함으로 그 쓸데없는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최초의 한자인 갑골문(B.C1250)에는 아주 단편적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어떤 그 당시의 제사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보다 200년 앞선 기록인(B.C1446) 구약성경을 통해서 재현해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 희생양의 제사는 언제 드려졌던 것일까? 세계 고대 문명에도 보면 온 백성을 위해 대제사장이 어린 양을 드리는 제사가 있었듯이 이스라엘은 유대 월력으로 7월 10일이 바로 일 년의 모든 죄를 속하는 속죄일(贖罪日)이었다. 이 속죄일에 수송아지 한 마리,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숫양 7마리를 속죄제의 번제로 불살라 드려야 한다(민29:7-11). 그러니까 근심하다 양(恙)자에 희생 양(羊)이 들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고, 그리고 백성을 위한 속죄를 위해 염소의 피를 대야에 담아 가지고 지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뿌렸다(레16:6,15). 양의 심장에서 쏟아 부은 피를 담아 놓은 글자가 바로 피 혈(血)자이다. 점(丶)은 희생의 핏방울이고 명(皿) 피를 담은 제사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1900년 전 기록인 허신의 『설문해자』에 ‘양(恙)은 근심하다(憂)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뭘 근심한다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갑골학자들은 이 근심하다는 우(憂)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임의광(林義光)은 ‘얼굴에 근심함이 가득 드러난 모양을 본 뜬 것이다’라고 했고, 왕국유(王國維)는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양을 본 뜬 것으로 부끄러워하다를 뜻하는 근본 글자인 것 같다’라고 하면서 위의 ➂번의 금문의 글자가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두고 근심했던 것일까? 레위기23장 29절에 ‘스스로 괴롭게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고, 심령을 괴롭게 하고 있어야 한다(민29:7)고 하신다. 여기 ‘괴롭게 하다’는 ‘웨인니템’은 ‘괴롭히다’, ‘억압하다’, ‘고통을 주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갑골학자 백천정도 “죽음을 당한 자 앞에서 ‘상심하여 슬퍼하다’, ‘근심하다’, ‘고민하다’, ‘괴로워하다’의 의미이다.”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대신 속죄의 어린 양(羊)이 그 심장(心)에 칼이 찔려 피를 쏟으므로 죄를 대속하는 것을 인하여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근심(恙)함으로 회개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양 양(羊)자에 대하여 허신은 “양(羊)은 상서롭다(祥)는 뜻이며, 상(祥)은 행복(福)이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어린 양(羊)의 피가 제단(示)위에 뿌려 희생하는 것을 상서롭다고 했는데, 이 상서로움이 바로 죄 용서함의 행복이지 세상에 추구하는 복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어떤 지도자들은 입만 열면 세상의 번영과 성공이 복이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제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을 두고, 근심(恙)하며 회개함으로, 십자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와야 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본주의를 가르치는 유교의 예기(禮記)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복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예기·제통』에 “현자의 제사에는 반드시 복(福)을 받는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이 복은 비(備)인데, 모든 도리에 순응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賢者之祭也 必受其福 非世所謂福也 福者 備世 備者 百順之名也 無所不順之謂備)”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복(福)은 갖추는 것(備)으로써 모든 도리에 순응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도(道)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도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의 양(羊 요1:29)이 되신 분이 십자가에서 창에 맞아, 그 심장(心)에서 피를 다 쏟아 주신 사랑 앞에서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근심(憂)하고 괴로워할 때에 주님은 오직 그 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갑골학의 대학자인 이효정(李孝定) 위의 ➁번 금문 글자에 대하여 ‘이 글자는 점획은 심장(心)의 구멍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군인이 창으로 찌른 옆구리 심장(心)에 구멍이 나서 물과 피를 다 쏟아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고대 희생제사에도 제물을 잡을 때 피를 뿜어내는 심장에 칼을 꽂아서 처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보면 ‘근심하다’는 뜻은 ‘해결되지 않는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하다’로 나와 있다. 우리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속을 애태우는 근심(恙)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때에 우리의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그 분께서 이 땅을 고치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
글 송태정 목사/ INUC 저널 칼럼니스트/ 성경적 갑골한자해석연구소 대표, 해남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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