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동방기독교(3~7C)-2회

Share This Article
사우디아라비아, 깊이 묻혀있던 동방 교회 유적 발굴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 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사도행전 13장 47~49절)
중동의 동방기독교(3~7C) / (Eastern Christianity in the Middle East) »
1. 동-남아라비아의 첫 번째 기독교 공동체(The First Christian Community in the South-East Arabia)

오늘날, 걸프만(Persian Gulf)의 동남쪽에 위치하였던 역사적인 교회의 존재는 사실상 찾기 보기가 어려웠다. 기독교에 관련된 사료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전 꽤 유명했던 무슬림 시인 라비드(Labīd, 560~661)가 6세기 때, 자신이 아라비아의 동해안에서 목격했던 기독교인들을 글로 묘사하여 남겼다. 어느 날, 거주지로 향하던 그는 특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어느 한 기독교인이 종을 치는 대신 나무로 만들어진 목판을 두드리며 예배 시간을 알렸다.”고 전했다.
다행스럽게 근래 들어, 그동안 역사 속에 깊이 묻혀있던 동방교회 유적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쪽, 주바일(Jubail)에서 동방교회의 유적이 모래 아래에서 발굴되었다. 쿠웨이트의 파일라카 섬(Failaka Island)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바일 근처 제벨 베리(Jebel Berri), 아부다비의 해안에 위치한 설바니 야스 섬(Sir Bani Yas Island)에서도 동방교회의 유적들이 차례로 발굴되었다.
이 교회들에 관한 언급은 고문서들을 통해 익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르벨라의 연대기 (Chronicle of Arbela)와 비타 이오내(Vita Ionae) 를 읽어보면 4세기 때 중동에서 활동하였던 동방 교회 수도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베트 카트레이(Bet Qatraye)의 남쪽에 수도원을 짓고 주로 아부다비 쪽에서 활동하였다.

피터 헬리어(Peter Hellyer)는 일찍이 아부다비 섬들의 고고학 설문조사를 맡았던 프로젝트 감독이었다. 시이르트의 연대기를 연구하던 그는 이 오래된 문서가 A.D 1036년 쓰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압디소(Abdisho)에 대해 살펴보면, 토마르사(Tomarsa) 총주교가 교회를 담당하였을 때 그는 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바레인과 야마마(Yamama)에 있는 섬까지 가서 세례를 베풀며 수도원을 지었다. 아마 이 섬은 걸프의 북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 고문서를 보면 당시 걸프의 동쪽에는 많은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했음을 엿 볼 수 있다.

2. 아부다비, “설 바니 야스” 섬의 동방교회(The Eastern Church in Sir Bani Yas Island, Abu Dhabi)

1992년, 고고학 탐험가들은 아부다비에서 많이 떨어진 섬에서 고대 동방기독교 수도원을 발굴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수도원들이 걸프만에서 발굴된 건물의 형태와 가옥의 구조와 너무나도 흡사하였다. 이것은 당시 같은 정체성과 원칙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도원들은 대체로, 6세기 때 지어진 동방교회의 것으로 밝혀졌 다. 그리고 A.D 750년 즈음, 수도사들은 귀중한 도자기들과 소지품들을 그대로 놔 두고 수도원을 떠났다.
이 수도원은 오늘날의 수도원과 아주 비슷하게 지어졌고, 대략 20명의 수도사들이 교회를 둘러싼 작게 편성된 구조의 직 사각형 방에서 생활했다. 특히 수도원들의 벽들은 높았으며 중심에는 트인 마당이 있었다.

설 바니 야스(Sir Bani Yas) 교회는 바실리카(basilica) 예배 당과 비슷한 구조였다. 가장 높은 건물은 4미터였다. 공교롭게도 이 교회의 중심에는 무덤이 있었는데, 아마 이 무덤의 주인은 교회의 중요한 주교 혹은 수도사 아니면 이 교회의 건축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무덤은 교회의 남북의 축 밑에 위치해 있었고 성찬식이 열렸던 제단 반대편에 있었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죽어있던 신부가 깨어 일어나 교회를 바라보고 있을 거란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동방교회의 흔한 건축 형태였다.
피터 헬리어의 팀이 이 모든 것을 발굴했을 때, 그들은 이곳을 단순한 마을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조직적으로 잘 형성되었고 한 방향으로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그곳에서 회반죽 십자가를 발견하였을 때, 모두가 감탄하였다. 팀원들은 이 발굴이 국제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이라 믿었다. 이슬람시대의 중동에서 발견된 실제적인 기독교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요셉 엘더스 박사(Dr. Joseph Elders)는 영국교회의 고고학 학자이다. 그는 이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 수도원은 우연히 세워진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지어졌다. 그들은 이곳을 통해 인도와 중국까지 무역을 시도하려 했고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 아라비안 해안에서의 선교는 인도와 아랍의 무역항로를 이용하였다. 심지어 이 항로를 따라 일부 선교사들은 중국까지도 건너갔다. 그 증거로 서안(西安)에서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새겨진 동방기독교의 십자가 비석(경교비)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동방교회의 종교적 언어 코드이다. 그곳 예배당은 A.D. 638년 지어졌다.”

3. 동방교회가 아랍반도에 세워진 계기(How was the Church of the East Organized in the Gulf)
아라비아 걸프만의 동방교회는 두 개의 파로 나뉘어져있다. 베트 카트레이(Bet Qatraye)와 메리타임(Maritime Islands)섬에서는 서방교회를 본받았고, 베트 마주나예(Bet Mazunaye)는 동방교회를 뒤따랐다. 동방교회에는 바레인(Bahrain), 다린 (Darin), 알 카트(Al Khatt), 그리고 알 하사(Al Hasa)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타르 반도도 동방교회에 합류하였다. 동방교회는 소하르(Sohar)로부터 관리 받았다.
A.D 676년, 타루트(Tarut) 섬의 다린(Darin)에서 각 교회의 주교 대표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가톨릭 총주교(Catholicos); 조오지(George), 그리고 동방의 총 대주교; 도마(Thomas), 베트 카트레이의 주교; 이소야베(Iso’yahbe), 다린(Darin)의 주교; 세르기우스(Sergius), 트리한(Trihan)의 주교; 스데바너스(Stephanus), 마주니 예(Mazuniye)의 주교,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주교들과 푸사이(Pusai, Al Hasa) 와 사힌(Sahin, Hatta), 하타(Hatta), 무하라크(Muharraq), 오만(Oman), 아랍 에미 레이트(UAE)을 비롯해 모든 주교들이 모였다.
당시에 비잔틴과 시리아 교회들의 기록을 보았을 때 걸프만 서쪽에도 다섯 군데의 주교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타르는 다섯 군데 중 하나였고, 이 반도의 전체 교회를 감독하였다. 다른 주교직들은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쪽 해안가 베트카트레이(Bet Qatraye)에 위치하였다.
이렇게 멀리까지 전파된 동방교회의 교구를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소외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지구촌의 변두리’ 같은 이 지역에서 그동안 대단한 신학자들과 기독교 학자들이 탄생하여 교회들을 가르쳤고, 다양한 글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이 중 제일 유명한 자는 니느웨(Nineveh)의 성 이삭(St. Isaac)이었다. 아래의 출처를 통 해 보면 그가 베트 카트레이에서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마 루슬리(Emma Loosley)는 그녀의 걸프의 기독교(Christianity in the Gulf)에 글을 요약해 남겼다:
“이쇼 야브 III(Catholicos Isho Yahv)가 베트 카트레이를 방문하였을 당시 성 이삭은 신부였다. 시리아의 저자에 의하면 A.D 676년 조오지(George) 총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 이삭을 자신과 함께 베트 아라메예(당시 Seleucia-Ctesiphon 근처 동쪽의 핵심적인 교회)로 동행하게 하였다. 그 이후 이삭은 니느웨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다섯 달 만에 물러났다.”

이삭은 다시 수도사의 삶으로 돌아와 자기 삶의 가장 중요했던 일들을 기록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추구한 영성으로 인해 시리아에서 가장 이름난 저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글은 시리아 정교회와 동방교회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에 큰 업적을 남 겼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영향은 동방기독교 수도사의 금욕생활에까지 미쳐있다.
베트 카트레이 지역에서 온 주목할 만한 신학자들과 학자들 중에는 마르 아브라함 수도원(Marr Abraham)에서 배운 유명한 다디쇼 카트레이(Dadisho Qatraye)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 밖에 가브리엘 카트레이(Gabriel Qatraye)가 있는데, 어쩌면 동명이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 명 혹은 여럿이든, 이는 성경학자인 아브라함 카트리야 바 리파히스(Abraham Qatrya Bar Lipahis)와 연관된 이름이었다.
리전(Region) 출신의 또 다른 학자는 아홉(Ahob)과 아유브 카트레이(Ayoub Qatraye)이다. 루슬리 (Loosley)는 자신의 논문에서 그가 ‘시편의 원인 (Cause of the Psalms)’을 썼을 가능성이 있는 작가라고 인용했다. 그의 작품의 발췌문은 후일 동방교회의 예전에 자주 사용되었고, 오늘날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게이즈(Ge’ez)와 암하릭 (Amharic)에서 번역된 아랍어로 성경 해설서를 쓴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 Tayyib, D. A.D. 1043)에 의해 활용되었다.
이어서, 이스파나 카트레이(Ishpanah Qatraye), 야곱 카트레이(Jacob Qatraye), 다린 주교 야곱(Jacob, Bishop of Darin), 라반 바 시흐데(Rabban Bar Sihde), 페르시아에서 시므온의 법전(lawbook of Simeon) 시리아크(Syriac)로 번역한 익명의 승려 등 다른 학자들을 열거한다. 승려는 베트 카트레이 출신으로 시므온 신부(Priest Simeon)의 요청을 받아 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라비아 반도의 먼 동쪽에 있는 교회는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았지만, 사실 정통교회의 지적 생명과 신학에 크게 기여했다. 이 작가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 바로 성 이삭(St. Issac)이다. 동부와 서부 시리아 작가 대부분이 이삭의 언어 코드로 번역 일을 하였고,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방의 모나스티시즘 (monasticism)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4. 아랍반도의 동방교회에 일어난 사건(What happened to the Church of the East in the Gulf)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슬람의 박해 때문에 동방교회가 무너졌고, 중동에서 심한 박해를 받아 거의 순교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디스(Hadith)를 읽어보면 모하메드 선지자가 죽어가면서 말하였다, “이 반도에 두 번째의 신경이 없도록 하라!”. 그동안 이슬람 신앙을 지켜나가던 이슬람 계승자들은 비록 아랍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지만, 그들은 항상 모하메드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다른 지방에서는 많은 기독교 남성들이 살해 당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비 행세를 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나즈란(Najran)의 오마르(Omar) 계승자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이라크의 북쪽으로 추방시켰다. 바레인, 소하르, 오만, 예멘, 그리고 중부아라비아에서는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쫓겨나가는 추세였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가옥과 재산들을 지키기 위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A.D.656~661년 4번째 계승자 알리(Ali)의 통치 때, 이슬람이 주도권을 잡았고,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갈수록 많이 줄어들었다. A.D.676년, 아랍 주교들의 마지막 회의가 걸프에서 열렸다. 이후로 아라비아의 기독교인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이론은 증거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주장하기가 힘들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딤미(dhimmi) 신분이었고 지즈야(jizya)라는 막대한 세금을 따로 내야 했다. 하지만 위의 말대로 당시의 박해와 학살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아랍반도에서 일어난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박해는 무슬림들로부터가 아니라 예멘의 유대인 왕들과 동방교회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던 가톨릭의 주교들로부터였다.
두 번째 이론은 조금 더 미묘하다. 존 ‘파샤’ 글럽(John ‘Pasha’ Glubb)의 주장을 보면 이렇다. 그리스(비잔틴)의 신학과 철학은 기독교의 믿음으로부터 아랍인들의 생각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슬람 자체가 비잔틴의 교리에 묻힌 진정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인정하는 항의였다. 아마 이 이유 때문에 많은 아랍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한 것이 아닐까! 복잡한 초대교회의 논쟁 때문에 이들에게는 이슬람이 더욱 진리 같아 보였을 것이다.
발굴된 동방교회들을 보면 건물들이 많이 폐허 되어있지만, 침입자들이 들어와 건물들을 파괴하고 망가뜨린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폐허는 파괴가 아닌 방치 됨 때문이었다. 동방교회의 기록을 보면 이슬람이 팽창했을 때 많은 아랍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설 바니 야스(Sir Bani Yas)에 있던 수도원이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때까지 유지되었다는 뜻은 당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 을 묵인함으로, 기독교인들도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도록 하였음을 뜻한다. 요셉 엘더스(Joseph Elders)는 말했다:
“이슬람이 자리를 잡고도, 동방교회 수도원들은 150년을 더 생존하였다.— 이것은 이슬람이 다른 종교를 묵인한다는 최초의 증명이었다. 수도원들이 해적들로부터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이기지 못해 약해졌을 뿐이었다. 추측으로는 당시 연로한 수도사들이 갈 곳이 없어 수도원에서 생활한 것이 수도원의 마지막 역사이다. — A.D 750년은 평화롭고 조용했다.”

기독교인들의 대량의 개종은 많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첫째로는 디미튜드(Dhimmitude)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성장이 불가능했지만 개종을 하면 신분이 바뀌어 사업과 사회의 네트워크를 넓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 공의회의 많은 신학적인 다툼으로 인해 너무나도 혼란해지고 불분명해지자, 오히려 역으로 이슬람의 교리는 더욱 환영을 받았다.
이로 인해, 고대 기독교의 문화와 언어는 한참 자라나던 이슬람의 문화와 아랍어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행스럽게 오늘날에도 동방교회는 존재한다. 그 이유는 바로 예배의식과 관습을 잘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시리아, 이라크와 인도의 동방교회에서는 여전히 이어져 내려온 동방교회의 예배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드린다.
5. 왜 동방교회가 네스토리안 교회로 불리는가? (Why is the Church of the East sometimes called the Nestorian Church?)
아라비아의 교회는 동서 지역을 중심으로 분열이 되었는데, 동쪽은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예배식이었고, 서쪽은 로마의 라틴 예배식이었다. 동방교회는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든 제자들이 대다수였다. 스승의 사후, 그들 은 동쪽 페르시아로 갔고, 당시 페르시아 왕들의 환대 가운데 동방기독교는 왕국의 두 번째로 큰 종교로 성장하였다. 다만, 페르시아에서는 ‘네스토리안’이라는 이름이 모욕적 표현이라며 아수르 동방교회라고 칭했다.
시간이 흘러 동방교회는 아랍문화에 동화되었는데. 예배할 때 그들의 용어들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 후에 예배의식 때도 아르메니아어와 시리아어는 아랍어에 밀려났다. 아래 도표를 참고하면 고대 기독교의 연대기를 볼 수가 있다. 이 연대기는 오늘날도 존재한다. 연대기를 보면 안디옥의 초대교회 때로 되돌아간다.
4세기 후에 동방교회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 이후 이바달 마시 (Ibadal-Masih), 또는 “그리스도의 봉사자들”(Servants of Christ) 이라 불리는 이들은 알 히라(Al Hira)로 내려갔다. 동방교회에 충실하였던 기독교인들은 비잔틴과 가톨릭교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기에 이들을 더욱 동쪽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옛 무역항로로 다녔으며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남쪽으로는 알 히라와 오만으로 건너갔다.
민가나(Mingana)의 말에 따르면, 이들이 아라비아를 지나갔을 때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 수도원들이 먼저 세워져 있었다.
A.D 424년, 마르카브타(Markabta, 오늘날의 레바논)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동방교회는 정식으로 안디옥의 총대주교와 갈라섰다. 이어서 동방교회는 자기들의 새로운 총대주교를 선출하고 아라비아에서도 많은 주교들을 임명했다. 이 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방교회는 새로운 동방 교황직을 설립하였다. 이 이유는 서방교회(로마)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양측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에베소 공의회 후 정식으로 분리됐다. 이 시기에 걸프에 있는 많은 동방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세워지고 운영되었다.

동방기독교 수도원은 침묵과 고독으로 영성을 깨워나가며 공동체를 중심으로 살아 왔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교회를 둘러싼 방에서 지내왔으며 수도원 주변에는 조그마한 동굴들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들은 수도사들이 고독과 기도를 위해 만들었다. 수도원의 창문들이 옆으로 기울어진 이유는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원은 처음부터 세상에서부터 분리되기 위해 세워지지 않았었다. 설 바니 야스(Sir Bani Yas) 항구에 세워진 수도원을 참고해보면, 이 수도원은 전략적으로 바쁘고 북적인 항구에 세워졌다. 수도사들의 목표는 상인들, 어부들, 그리고 진주를 찾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였다.
2010년 12월 18일, 칼리즈 타임스(Khaleej Times)의 글을 참고해 이곳의 예배가 어떠했는지 보도록 하자:
“제일 좋은 예식의복을 입고 신부는 사다리를 타고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 목판을 두드리며 예배시간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는 예식 옷차림으로 성결한 잔들을 준비하며 쿠르바나(Qurbana, 성스러운 빵)를 구웠다. 제단 건너편에는 신부들이 서서 예배의식을 치를 때, 순례자들과 방문자들은 베트 슬루에토(Bet Slueto, 기도의 집)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동쪽을 바라보며 예배의식을 치렀다. 남자와 여자는 따로 서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의식은 암송되었고 아주 중요한 날에는 심지어 7시간 동안 진행되기도 했다. 빵은 예배가 준비되어있을 때 구워졌다. 특이하게도 이 빵은 발효되었다 (다른 교회들에서는 유월절의 전통 그대로 빵을 발효시키지 않았다). 성경구절을 함께 낭독하였고 복음의 구절은 따로 봉독하였기 때문에 읽기 전에 종이에 입을 맞추어 읽었다. 십자가를 예배하는 의식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으니 감사를 표현하는 의식이다. 신부들은 수염을 길렀고 머리 정수리를 밀었다.
어린 사제들은 교회에서 훈련을 받았고, 준비가 다 되면, 경험 많은 신부와 함께 지 교회를 세우러 길을 떠났다. 이렇게 동방기독교는 중국까지 사역을 펼쳤다. 이미 걸프만에 자리를 잡아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이들의 주된 목적은 선교였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이들의 흔적은 아주 빨리 아라비안 걸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거의 천 년 동안 기독교는 중동에서 발전하지 못하였다.
저자 김 규 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中國 사이비&이단 대책 연구소 소장, 고대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