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이후의 동방기독교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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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敎 전파의 주역인 소그드 무역상의 활동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의 신장 위구르와 중국 내지에서 활발한 무역을 통한 동서 문화와 景敎 교리 전파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당대 이후의 동방기독교(Eastern Christianity after the Tang Dynasty) » 11세기 초, 실크로드 초원에는 십자군 전쟁(The Crusades)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동방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긴장감이 서서히 맴돌고 있었다. 그동안 기독교는 유럽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왔지만, 이슬람 또한 강력한 부흥을 통해 서아시아 전체를 이슬람화에 성공했다. 다만, 비잔틴제국에 의해 탄생한 신흥국인 그루지아(Georgia)와 아르메니아(Armenia)는 유독 이슬람 지역에서 유독 기독교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이 두 나라는 페르시아와 더불어 구약 바벨론 포로기 전후(B.C. 586~516)로 많은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뿌리내리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과는 상관없이, 동방기독교와 무슬림은 각자 거대하고 광활한 대지를 향해 선교적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특별히 실크로드 상의 동방기독교 수도원 창건은 더욱 많은 부흥을 가져왔기에 동방기독교는 키르기스(Kyrgyz, 康居)와 기타 여러 곳에 아주 견고하게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수도원의 역할이 없었다면 동방기독교의 성공적인 실크로드에서의 역할을 해석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거침없는 선교의 동진과 더불어, 唐의 몰락으로 인한 그들의 후퇴 행렬은 키르기스와 이식쿨 호수 주변까지 밀려들었고, 고향인 페르시아에도 돌아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에, 자연스럽게 키르기스는 동방기독교의 도피성이 되었고, 대신 이식쿨 호수 주변에는 수도원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되었다. 이때 동방기독교에는 더없이 영성이 깊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설사 그동안 그들은 실크로드 지역에서 왕성한 선교활동을 보였지만, 주어진 사명과 비전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했다. 거대한 설산과 눈보라 앞에서, 그리고 풍토병과 배타적인 타민족 앞에서 스스로의 신앙을 지키고,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데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본다. 당대 이후, 실크로드 상의 동방기독교가 가졌던 어려움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당시 모든 주교는 대체로 주교장를 거치지 않고 직접 바그다드의 대주교에게 통보하는 식이었고 그의 명령에는 철저히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설립한 새로운 교구가 갈수록 거리상으로 멀어짐으로 인해, 대주교와의 연락체제를 유지함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들은 반드시 이슬람 지역을 거쳐 가야 했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두 번째 어려움은, 이윽고 나타난 신흥 기독교 이단의 성행으로 동방기독교가 이단으로 오해를 받아 더욱 어려움에 처한 사실이다. 이에 그들은 전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매번 예배에 대주교를 향한 존경심의 언어와 의식 중 반드시 고대 시리아어와 청동 십자가를 사용함으로 그들만의 전통성과 독창성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비단 그들만이 아니고 당시 이슬람교도 자신들의 의식에서 주로 아라비아어를 사용했고, 가톨릭 역시도 라틴어를 사용함으로 전통을 이어나갔다.
아래는 당시 동서 문명의 교통로인 두 육상 실크로드 간선과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상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1) 육상 실크로드(Silk Road)
육상 실크로드는 크게 두 간선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북쪽의 툰드라(tundra)를 중심한 초원로와 사막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로이다. 우선 이 둘의 지리적인 요소와 역사적인 측면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➊ 초원로(Steppe Road)
실크로드의 3대 간선 중 가장 오래된 길은 초원로(草原路)이다. 초원로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를 지칭한다.
북유럽의 발트해(Baltic sea) 남안에서 시작하여 흑해의 동북 편과 남러시아의 카스피해(Caspian sea)와 아랄해(Aral Sea) 연안을 지나 동진하여 카자흐스탄 (Kazakhstan)과 알타이산맥 이남의 중가리아(Zungaria) 분지에서 몽골 고비사막의 북단 오르혼(Orhon) 강 연안으로 접어든다. 여기에서 중국의 화북(華北) 지방에 이른 후 다시 동남향으로 중국 동북(東北)지방을 거쳐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특히,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지층에서 발굴된 일련의 유물들을 참고하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들이 이 길을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는 점으로 미뤄보면 이 길은 이미 선사시대(先史時代)에도 교통요지로 이용이 잦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스키타이족을 비롯한 고대 기마 유목민들이 두각을 나타낼 때 번성하였다가 흉노족의 등장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원로가 지니고 있는 특징은, 이용이 자유자재하다는 것이고, 말을 통한 이동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흉노(Hun)와 몽골 등 북방 기마 유목민족들의 교역과 이동 및 정복 활동에 크게 이용되었다.
➋ 오아시스로(Oasis Road)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로, 역사상 가장 많이 이용된 길이다. 실크로드 하면 일반적으로 이 길을 지칭하는데, 서단(西端)의 로마에서 동단(東端)의 중국 장안을 말한다. 그 길이가 무려 12,000km, 직선거리로 9,000㎞에 이른다.
오아시스로는 실크로드의 여러 갈래 간선과 지선 가운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 길은 시대의 변화에도 아랑곳 않고, 큰 변동 없이 오늘날까지 이용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이 길을 주변으로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요컨대 오아시스로는 동서 교통로에서 문자 그대로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길은 신석기시대에 개통된 이래 중국인들이 타림분지에까지 진출하였던 B.C. 2세기부터 A.D. 8세기 동안에는 당과 이슬람, 몽골, 티무르제국 등 강대국들의 세계사적 활동이 펼쳐졌다. 특히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활발한 이용이 있었고, 1498년 서유럽에서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가 발견된 이후 오아시스로는 점차 쇠퇴기를 맞았다.
“실크로드”란 명칭은 19세기 말에야 붙여졌다. 그러나 정작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사마르칸트(Samarkand)라든지 타클라마칸(Taklimakan)사막의 호칭을 사용해 불렀다.
실크로드의 공식적 명칭은 1877년 당시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리히트호펜(Baron Ferdinand von Richthofen)에 의해서 였는데, 그는 1868~1872년까지 중국에 머물며 광산과 항구에서 일을 보며, 다섯 권의 지도를 제작하여 처음으로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1936년 스페인의 탐험가 스벤헤딘(Sven Hedin)은 자신이 출판할 탐험서의 제목을 “실크로드”로 사용하기도 했다.

백 년이 넘는 고고학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곳은 동서를 횡단하기 위한 명확한 이정표도 없었고, 잘닦인 도로마저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로마의 아피아 가도(Appian Way)와도 완전히 다르고, 자연기후로 인한 변동이 많아서인지 좀처럼 사람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간혹, 여행객들이 이 길을 지날 때는 늘 가이드를 통해서만 다녀야 했고, 어쩌다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행선지를 변경했어야 했다.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실크로드는 무역상들만이 다니는 통로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상, 이곳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는 다른 곳이었다.
실크로드는 인류 역사상 교통량이 가장 적은 도로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연구의 가치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 길을 통과했던 이들로 인하여 흘러들어온 각지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서로 어우러짐으로 인하여 역사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 다양한 문화들은 이 길에서 서로 현지인들과 융합하고 후에 온 이들과 함께 동화를 꾀했다. 이를 토대로 마을과 도시는 다시 이어지고 그곳에서 경제활동이 활발해짐으로 산 넘고 사막을 넘어온 이들에게 초원의 등대 역할이 되어주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상업만이 주목적이 된 길이 아니라,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 길은 각종 종교와 예술, 문화, 신기술 교류의 대동맥으로서의 연결망 역할도 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당시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서쪽의 시리아 뿐만 아니라 더 먼 곳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공중에서 보면 결코 특별한 지형도, 산도, 협곡도,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인공적인 요소도 전혀 없는 순수 자연 그 자체로의 구간일 뿐이다.
또한 실크로드(絲綢之路)는 인간의 의해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고고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이곳을 답사 조사하였는데, 그 중 한족들이 200~1000년의 기간 동안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였음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이 노선은 인류기원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아주 오랜 역사 이전에 사람들은 이 길을 도보로 넘나들며 중앙아시아까지 넘어 중국 황하 이북과 하남성 안양(安陽)에까지 문물교역이 이루어졌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 주변의 서로 다른 문명은 3천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활발한 접촉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비록 그곳에는 무역상의 한계가 있었지만 각기 다른 인종과 민족이 또 다른 통로를 통해 동서의 길을 만들어내 광범위한 문화적 교류를 진행했었다. 그들은 주로 유목민과 종교 예술가, 장인, 선교사 그리고 사절단과 도적 떼가 같은 길을 오고 갔다. 비록 그들이 주로 비지니스를 주업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주요 목적은 다만 이주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세계 주요 종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들어왔는데, 그중에 불교는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전파되어 토착화에 성공했다.
2) 해상 실크로드(Sea Road)

해로(海路)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보다 더 훨씬 이전부터 연결되어 국가 간의 이익을 도모했다. 고대 유럽에서는 중국의 값비싼 도자기를 선호했고, 유럽에서 값비싸게 팔릴 수 있는 도자기를 대량으로 안전하게 육로로 운반하는 것이 당시 많은 상인들의 고민이었다. 낙타와 말을 이용해서 도자기를 운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결국 해상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곧 ‘도자기 길’, ‘향료의 길’이라고 불렸던 해상 실크로드이다.
해상 실크로드가 자문화 중심의 유럽과 중화인들에 의해 서단은 로마로, 동단은 중국 동남해안으로 규정지어졌다. 하지만 정수일 교수는 실크로드를 지구적 문명교류 통로로 보며 두 문명의 이런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해상 실크로드는 환지구적 통로로 어디서 시작이고 어디가 끝일 수 없다. 마치 둥근 원에서 시작과 끝은 상대적 개념으로써 고정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초원로나 오아시스로는 근대문명에 의한 교통수단이나 날로 활성화되어가는 해로에 밀려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반면에, 바닷길은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세와 현세, 나아가 미래까지도 존속하면서 문명교류 통로로 역할을 줄곧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해상 실크로드는 일찍이 중국의 상(商)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쳐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후 당송 시기의 발전을 거쳐 명청 시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해로는 중국 광동에서부터 인도차이나반도, 자바, 스마트라, 실론, 인도를 거쳐 페르시아만과 홍해(紅海)에 달하는 약 100개가 넘는 국가들과 지역을 거쳤고, 역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해로였다.
초기, 육로를 통한 대상(隊商)들의 이동은 숱한 장애물로 인해 한계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동서양의 무역업자들에 의해 해로(Sea Road)가 열려 훨씬 빠르고 안전한 조우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동방기독교 역시 무역선에 올라타고 계절풍에 밀려 인도, 서남아시아, 인도차이나, 중국(廣州, 泉州) 각지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중국 사기(史記)에 의하면, A.D. 166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후한의 항제(恒帝, 147~167)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것은 일찍이 동서간의 외교적 접촉이 이뤄졌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로마 황제의 사절단은 해로를 통해 수도 낙양(洛陽)에까지 와서 여러 가지 진귀한 상아, 귀갑, 무소뿔 등의 물품을 진상했다. 이때 그들이 경유한 해로는 159년과 161년 천축(天竺)에서 온 사절단과 같은 해로를 경유하였다.
120년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음악가와 곡예단들이 미얀마(Myanmar)에 온 일이 있었는데, 이는 2세기 초부터 미얀마를 거쳐서 중국과 서남아시아까지 교류가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164년경에는 중국학자들이 로마제국의 천문학 서적을 가지고 비교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위(魏)의 조조(曹操) 때에도 로마제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색채가 든 유리제품을 부싯돌로 녹여 결정시키는 기술이 중국에 전해졌다.
284년에는 로마황제 카루스(Marcus Aurelius Carus)가 진(晉)에 공식사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는데 이때 로마와 페르시아 사산 왕조와의 사이는 전쟁시기였다.
로마제국과 진(晉) 사이의 교류는 상호 간의 무역을 위한 것이었고, “육상 실크로드”가 있었지만, 양국 간의 직접교역에는 불편했기에 해로를 이용해야만 했고, 그 통로는 서남아시아 지역인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의 실론섬(the Island of Ceylon)을 거쳐 벵갈(Bengal)만을 지나 미얀마와 캄보디아 남쪽으로 우회해서 중국 광동(廣東)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 2세기 중엽 이후에도 로마제국과 중국 사이에 교역이 지속되었더라면 로마와 남인도 말라바 해안지대에 산재한 동방교회들이 극동선교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캄보디아 개신교 초기 선교사 중의 한 명인 데이비드 엘리슨(D. Ellison, 1898~1963)의 아들 폴 엘리슨(Paul Ellison)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문화에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후 450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에 있었던 동방교회 총회에 인도차이나 지역대표가 참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슨에 따르면, 이 총회에 대표를 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7만 명의 신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엘리슨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시리안 선교사들이 초대교회 시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활동하였음을 강력하게 나타낸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몬크메르족의 소수부족 안에 있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들, 홍수의 설화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 캄보디아 시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비록 그 의미나 내용을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기 위해 집에 그려놓은 십자가 문양 같은 것들이다. 또한 그는 원래 베트남 중부지역을 기원으로 하는 무슬림 참(Cham)족의 고대용어에서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초기 동방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오늘날 그 존재감이 없어진 것은 부정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성경을 그 나라말로 번역하지 않았고, 토착화된 리더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의 주장은 5세기 이후, 해로를 통해 인도차이나 지역에 동방 기독교인이 왔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증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도의 기독교 사학자인 필립(T. V. Philip)이 자신의 글에서 8세기, 중국 당조 시기에 토착화 중이던 동방기독교인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는 존 잉글랜드(John England)의 주장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다.
“6세기까지 우리는 스리랑카와 투르크스탄(Turkestan)으로부터 온 십자가와 묘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8세기 고비사막의 서류들(Sian-fu-stele), 중부에 있는 묘비들, 러시아 투르크스탄의 벽화와 서아시아로부터 온 시리아 문학작품들도 있다. 특별히 인도 남부와 중국 서부지역에 남아있는 글들을 통해서도 발견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3백 년 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더 많은 십자가 유품과 묘비들이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중국 중부 및 북부에서 발견되고, 버마와 말레이에서도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한, 기독교 활동에 대한 당시의 필사본들이 시리아와 이란, 인도, 인도차이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과 문헌들의 고증을 통해 볼 때, 엘리슨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주후 451년의 네스토리안은 에베소 공의회에서 파면을 당한지 채 20년도 경과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미 그 전에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선교를 나가 몇만 명의 무리를 개종시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방기독교가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한 때가 498년, 동방기독교가 인도에 도착한 때가 528년, 그리고 중국에 도착한 해가 635년이었기에 그보다 훨씬 앞선 450년에 인도차이나 지역의 동방기독교인들이 동방기독교 총회에 참석할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인 사무엘 모펫(Samuel H. Moffett) 역시 5세기 말까지 아시아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된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온 무역상 그리고 네스토리안과 교류가 있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조선과 항해기술의 발달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고, 근세 이후, 포르투칼, 에스파니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동방 진출을 위한 매우 중요한 루트가 되었다.

3) 소그드인(Sogdians(Soghd), 스키타이:Scythai)
B.C. 6C~B.C. 3C경 흑해연안의 헝가리 다뉴브강에서 아랄해를 포함한 유라시아 전 지역에서 비지니스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유목민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비단길의 전설 “스키타이”들이다. “그들은 동서무역로의 주역들이며 동시에 주변국들과의 신뢰를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갔다.
“헤로도투스(Herodotos, B.C. 484~425)의 역사(Historia)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동방무역로는 아조프(Azov)해로부터 볼가(Volga)강을 지나 북쪽의 우랄산맥을 넘은 다음 동진하여 알타이산맥 부근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비록 주거지가 이란 동부 산간지역으로 많은 환경적 제약을 받았지만, 오히려 한계를 이용할 줄 아는 머리를 가졌다. 단단한 광대뼈와 큰 눈, 온몸에 털이 많음은 산지의 환경에 살아갈 수 있는 적합한 신체조건이었다. 또 이들은 주로 양, 염소 등 목축업으로 고기와 모피를 얻었고, 산지에서 포도와 호도 등 각종 건과류, 향식료를 재배했으며, 이동에 필요한 기마용 말을 길렀다.
손기술이 발달해 페르시아의 화려한 예술성을 뒤지지 않는 공예품들이 유행을 만들어냈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맺음으로 비즈니스를 통한 부와 주거면적을 동시에 확대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의 신장위구르와 중국 내지에서 활발한 무역을 통한 동서 문화와 景敎 교리 전파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6세기 중국 고대 문헌에 의하면 景敎가 당대 이전에 이미 고창(高昌)과 투루판(吐鲁番) 지역에 활동하고 있었고 소그드어로 번역된 경전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장에 전파된 景敎는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아 신속하게 발전하여 주로 민간에 전래되었다. 또한, 그동안 景敎 전파의 주역인 소그드 무역상들의 활동 범위를 실크로드 상의 무역 관문 도시들에만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景敎徒의 구성원으로는 소그드인, 시리아인, 페르시아인 그리고 소수의 현지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불교도와 조로아스터교들 사이에 섞여 카스(喀什), 허티엔(和田), 쿠처(庫車), 샨샨(鄯善), 투루판(吐鲁番) 지역들에 퍼져 살았다.
덴마크 학자 아스무센(Asmussen)은 일찍이 그들의 일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들이야 말로 최고로 탁월한 상인들이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그들은 장사 쪽으로 돈 버는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남아있는 사료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 상인들은 갑작스런 스키다이의 출현으로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한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만의 물건을 통용시킨 것 외에도, 다른 민족의 상품도 함께 매매하는 중간상인의 역할을 감당해 온 것이다.
또한, 그들은 불교와 마니교, 기독교를 전달하는 매개역할도 감당했다. 아스무센은 그들의 두 가지 특징을 들었는데 장사의 재주와 함께, 기독교 복음 전도에도 열정을 보였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그들은 특별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다.
일찍이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곳에서 활약했던 민족이다. 적어도 천년의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그들은 적은 인구로 큰 민족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약소민족이거나 정권이 약한 정도는 아니었다.
4세기 알렉산더의 동방정벌 이후로 그들의 지리적 위치는 명확히 드러났는데, 아라비아 역사서에서도 기재되었듯이 그들은 주로 자라프산 하류유역(Zarafshan, River of Soghd)에 모여 살았고, 지구상에서 바다와 가장 먼 곳으로 보잘것없이 협소한 곳에 살았지만, 나름대로 고대 독특한 문명의 전달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수당 시기에는 그들을 강국(康國)이라 불렀는데 소무구성(昭武九姓)이 주요 성씨였다. 중원의 중국인 생활구역에도 자주 출현했던 그들은 페르시아인, 인도인과 함께 서호(西胡)라는 통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일 흉노의 침략으로 서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대체로 그곳은 파미르 고원지대이다.
중국 서부의 가장 중요한 이민자들인 소그드인들의 고향은 주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이다. 그들은 중국 서북부까지 이주해 와서 실크로드의 각 도시 주변에 집단생활을 해왔다.
당시 실크로드의 거상(巨商)하면 떠올려지는 이들이 바로 소그드인들 일 정도로 그들은 비즈니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실크로드 각지의 관문마다 숙박업을하기 시작했는데, 통상적으로 주가호(酒家胡)라칭하여 무역의 통로마다 그들의 입지를 다져, 당시에 주가호하면 호희(胡姬)가 기억날 정도였다. 이리하여 중원지역의 숙박업 경영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의 경제적인 활약상 이외에도 다량의 문화예술을 중국에 전해 주던, 오늘날 중국의 자랑인 춤과 음악, 악기, 마술과 서커스 등 이것들은 실지로 고대 실크로드로부터 전래해 들어왔던 호문화(胡文化)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독특한 서역의 음주가무로 상인들의 마음을 끌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경영전략이었다. 가무는 아주 강렬하여서 매주(賣酒), 매예(賣藝) 그리고 매색(賣色)까지 이루어졌다.
그들의 생김새는 대체로 눈이 오목하게 들어갔고 코는 높았으며, 장정은 변발을 하거나 머리를 밀었다. 여인은 머리를 돌려 묶어서 금색 꽃문양의 머리띠를 하였다. 그들은 음주를 즐겨 때때로 길거리에서 춤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주가호를 통해 포도주가 성행했는데 제조기술이 발달하면서 실크로드 변방에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때로는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 포도주가 비밀리에 뇌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구당서에 기록되기를, 소그드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그의 입안에 석청을 발랐고, 손바닥 중앙에는 아교를 발랐는데 이는 아들이 장성해서 장사할 때, 언제나 달콤한 말을 하며, 손에는 늘 재물이 달라붙기를 바라는 풍습을 가졌다. 남자가 20세가 되면 반드시 주변국을 답사토록 하였다. 이는 그들에게 비즈니스의 전통을 이어가게 하는 구실을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인에게는 오랑캐, 도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때때로 서로간의 무역경쟁은 적은 이익으로 인해 다툼도 일어났다. 말하자면 이익이 될만한 것에는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유명한 안녹산(安祿山)의 부친도 소그드인이고 그의 모친은 돌궐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혈통이 아닌 잡호(雜胡)인 것이다. 당시 안녹산은 호무(胡舞)에 능하여서 황제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구당서에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안녹산은 몸집이 거대해서 나이가 들어 더욱 비대해져 뱃살이 늘어질 정도로 체중이 거의 150킬로는 나갈 정도였다. 평상시 도보에는 좌우로 부축해 줘야만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 면전에서 호선무(胡旋舞)를 보일 때면 아주 빠른 몸 회전이 있었고 이는 현종의 구미를 당겼다. 이로 인해 현종의 양귀비(楊貴妃)도 호선무를 익혔다.
어느 날 현종이 안녹산에게 묻기를 “그대의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리도 큰가?“ 안녹산은 즉시 대답하기를 “내 뱃속에는 왕에 대한 뜨거운 충정밖에 없다”고 말해 그의 교활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종의 그의 포장된 마음속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실크로드의 스키타이들은 자신들의 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자신의 전통장례문화인 납골당 문화를 버리고 한족의 매장문화를 받아들였다. 서안과 중국 각 도시에서 발굴된 고고학의 매장문화를 통해서 발견된 소그드인 묘비에서 소그드어와 漢語가 동시에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방기독교는 초기, 당의 개방정책에 힘입어서 비즈니스와 더불어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점차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으며 세속 문화와 정치적 혼란에 버티 질 못하고 중원에서 그 역사의 정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더벅머리 남색 얼굴 괴상한 인간들이 (蓬頭藍面異人間)
떼지어 뜰에 와서 난새춤 시늉하네 (押隊來庭學舞鸞)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솔솔 부는 바람에 (打鼓冬冬風瑟瑟)
남북으로 뛰고 달리니 끝이 없어라. (南奔北躍也無端)
– 신라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鄕樂雜詠) 5首 中에서
저자 김 규 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대만 중화복음신학교 교수, 고대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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