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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되는 말
[새벽묵상] 기도가 되는 말 » 약 3:1-12 » 한은선 목사 » Ein Wort, das zum Gebet wird! 곧 좋은 말은 좋은 영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말보다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말의 문제는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요 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랑의…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영성칼럼]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 필자 Dr. Elijah Kim  »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다 할렐루야!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 한 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탈북민들이 성령충만함 받고 영적 재충전과 트라우마로부터 내적치료를 받게 하시고, 안전하게 귀국하시게 하신 주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 강석진 목사 » 이승만의 외로운 대미외교 활동과 시련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을사조약(1905.11)으로 대한이라는 나라의 외교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가 실행되기 4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묵인하였고 바로 이어서 주한미공사관을 폐쇄시켰다. 이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은밀한 선언

◙ Photo&Img©ucdigiN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

김정주 작가의 장편소설 『은밀한 선언』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각 장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드러낸다.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이 소설은 ‘드러내고 싶지만 감추고 싶은, 숨기고 싶지만 알리고 싶은, 욕망을 억압하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광기의 집합체야, 합리와 불합리를 넘나들며 세계를 빨아들이고 내뱉으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그렇지만 소설가에겐 맹목성이 없어. 이리 머리 굴리고 저리 머리 굴려가며 구성과 맥락을 짜는 자들이니까. 그러니까 소설과 소설가는 자학과 가학이 어우러진 주이상스야. 항생제나 마약도 먹히지 않는 고단한 환자들.”(49쪽)

사격장에서 총을 쏘는 것에 몰두하는 소설가, 점집을 전전하는 여자, 남편을 죽인 남편 친구의 세컨드로 사는 여자, 욕질과 톱질로 자책하며 사는 여자 등 열 명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간다. 독자는 처음에 줄거리를 찾지 못해 당황할 수도 있다. 추리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수도 있고, 작가의 독특한 플롯의 매력에 끌릴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대해 ‘어떤 장르’의 소설이냐고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이브리드시대의 문학』에서 김성곤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주류와 비주류, 순수와 비순수, 또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독자들이 서브장르 소설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란 게임이고 수수께끼이며, 환상적이고 SF적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문학의 경계해체가 이루어지고 있다.”(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또는 매슈 펄의 『단테 클럽』이나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 같은 소설들은 모두 수준 높은 소설이면서도 추리소설 기법을 차용해 대중문학적 요소를 갖고 있는 소설이다. 대중작가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돌로레스 클레이본』, 『미저리』 같은 상당히 수준 높은 순수소설을 쓰고 있다.)

추리적 요소가 있기에 독자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 스토리의 여백을 채워나가야 한다. 작가는 우리말의 달인(?)이다. 그의 ‘말장난’(언어유희, wordplay)에 독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을 만날 수 있다. “밥상 위에 교정지를 펼친다. 글자로 빼곡한 종이뭉치 속에서 글자들은 나뒹굴며, 울부짖으며, 어긋나며, 삐걱거리며, 다가오며, 도망치며, 꿈틀거린다.”(22쪽)

“갑자기 도시가 어려워진다. 뜻 모를 어려움이 테러범처럼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비굴한 자세로 걷는다.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내 다리가 간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 팔과 어깨와 가슴과 엉덩이가 움직인다. 이런 느낌, 조금은 으슬으슬하나 넘길 만하다고 속여 본다. 사람들이 보글보글 끓는 찌개처럼 지나다닌다. 어디서 나왔을까 저 사람들.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나온 나와 분주히 걸어가는 저 사람들, 같을까 다를까. 같다 한들 다르다 한들. 어느새 시장 입구에 와 있다. 연극 대본을 끼고 시장이라? 내가 아닌 몸뚱이가 알아서 왔으니 몸뚱이에 맡겨볼 일이다.”(38쪽)

“아침 해가 마당을 돌아다닌다. 투명한 옷자락을 나풀대며 한가로운 계단을 오른다. 계단 꼭대기에 이르자 단번에 수돗가에 널린 살림도구 주변에 내려앉는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보았더라면 좋을 광경. 아침 해가 빠르게 몸집을 불린다. 해는 화관을 쓰고 지붕 꼭대기로 올라간다. 오렌지 재스민이 올려다보기엔 나쁜 위치. 그녀의 화분을 돌아본다. 흠뻑 준 물이 다 빠져있다. 어디서 왔는지 검정볼기쉬파리가 꽃잎에 슬쩍 내려앉는다. 이 무인도에 새나 나비보다 파리. 검정볼기쉬파리가 앞다리를 싹싹 비비며 꽃에게 말한다.

너를 만져도 될까?
탄력 있는 목소리, 탄력 있는 비빔.
나, 너를 만져도 될까? 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러니까 날개가 없다.

날개가 없는 것들은 날개를 원한다. 힘줄이 불거진 두 다리가 있어도, 두꺼운 목덜미와 불끈 솟은 근육이 있어도, 파리의 날개 같은 날개라도 있기를 바란다. 날개가 없어서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때론 괴롭기도 하다.”(177쪽)

이러한 묘사력은 이 소설에 특별한 풍미를 더하는 양념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언어를 비비꼬아 펼쳐놓기도 한다. 물론 비문(非文)은 아니다.

“빨간 펜을 물고 밥상에 눕는다. 팔과 다리와 머리가 밥상 밖으로 꺾인다. 원고 더미에 누운 꼴로 복부를 눌러본다. 뜬구름이 뭉실뭉실 뱃속을 떠다닌다. 폐는 폐허가 되어 간다고 난리를 치고, 간은 간이 맞게 살아달라고 충고를 하고, 신장은 신체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심장은 심기를 흐리지 말라고 토라지고, 창자는 창피하게 살 바엔 죽어버리라고 떠든다. 떠드는 소리가 아우성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두하의 연극에 나왔던 혼합 음. 혼합 음이 혼절할 만큼 시끄럽다. 몸이 밥상 밖으로 쿵 떨어진다. 팔도 다리도, 머리도 폐도, 그외의 모든 것이 미안할 정도로 멀쩡하다.”(25쪽)

책표지◙ Photo&Img©ucdigiN

“소설은 하나의 거울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면 독자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은 거울 속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숨에 우리는 거울 저쪽으로 들어가서 낯익은 사람들 사이에 에워싸이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작가는 주인공 시은에 대해 ‘물속에 있지만 갈증을 느끼는 물고기’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낯익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을 잘 알지 못한다. 몇 가지 정보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앎’은 표피적인 정보일 뿐이다. 우리는 양파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너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서로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파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 말이다. 나는 너를 느끼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288쪽)

그렇다.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지만, 어느 순간에는 상대방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를 때가 있다. 수십 년을 한 지붕 아래서 살아온 가족도 예외는 아니리라.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충격적 반전은 이루어진다.

작가는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에서 한 구절을 가져온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면, 우리는 고통을 통해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이 글을 인용하면서 ‘고통스러움이 어느 인연이 되는 날’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묵직한 가르침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태풍의 진로를 정확히 짚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슬픔의 진행 방향도 가늠하기 어렵다. 긍정적이어야 긍정하는 세상에서, 슬픔을 노출시키고 봐야 하는 일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슬픔 또한 다양한 옷을 입고 있는바, 그 속내를 건져내는 일에 의미를 둔다.”

이 소설은 고통이나 슬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와 부조리의 함정에 빠진 이들을 소개한다. 우리에게 설교하거나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사는 모든 이에게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듯하다.

김정주 작가는 2003년 소설집 『을를에 관한 소묘』를 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 읽기와 철학을 공부하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 

글 송광택 목사/ 본지 독서저널 칼럼니스트(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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