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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되는 말
[새벽묵상] 기도가 되는 말 » 약 3:1-12 » 한은선 목사 » Ein Wort, das zum Gebet wird! 곧 좋은 말은 좋은 영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말보다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말의 문제는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요 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랑의…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영성칼럼]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 필자 Dr. Elijah Kim  »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다 할렐루야!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 한 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탈북민들이 성령충만함 받고 영적 재충전과 트라우마로부터 내적치료를 받게 하시고, 안전하게 귀국하시게 하신 주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 강석진 목사 » 이승만의 외로운 대미외교 활동과 시련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을사조약(1905.11)으로 대한이라는 나라의 외교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가 실행되기 4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묵인하였고 바로 이어서 주한미공사관을 폐쇄시켰다. 이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당대 초기의 경교景敎 유입 역사(6회)

◙ Photo&Img©ucdigiN

당 태종 정관 9년(635),  동방기독교 정식 활동 소급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장 1~3절)

[6회] 당대 초기의 景敎 유입 역사 (History of the introduction of jing-jiao in the early Tang Dynasty) »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중국에 전래해 온 것에 관하여는, 문헌과 유물을 통해 현재로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 사건 이후 6백여 년 만인 당초(唐初) 즈음으로 소급된다.

자료◙ Photo&Img©ucdigiN

경교의 유입과정과 발전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신학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와 1907년 스타인(Aurel Stein)이 서역 탐사 중에 감숙성 돈황의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한 경교 인물화상, 펠리오(P. Pelliot)에 의해 대진경교삼위몽도찬, 존경(大秦景敎三威蒙度讚, 尊經), 선원지본경(宣元至本經),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대성통전귀법찬(大聖通眞歸法讚),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두루마리(一天論 第一, 喩第二, 世尊布施論第三)등을 통해 경교 경전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 왕조는 문화개방정책으로 인해 페르시아에서 성행되고 있는 동방기독교의 전래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으나 동시에, 페르시아와 더불어 점점 강성해진 이슬람교도의 위협 때문에 협력을 모색할 방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서한 시기(B.C. 206~A.D. 8)에 로마는 벌써 중국과 연계를 맺었다. 동한 明帝 연간(A.D. 58~75) 기독교는 이미 중국내륙에서 활동하였으며 위진 남북조(魏晉 南北朝, 220~581) 시기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북방과 계속 연계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 중국 남방과도 밀접한 왕래가 있었다. 삼국시기 오나라 黃龍 5년(226) 로마 상인 진륜(秦倫)은 수로를 통해 건업(建業)에서 왕래하였으며 손권(孫權, 182~252)의 접견을 받았다.

서진 초기(西晉, 265), 대진국은 또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여, 그 역사와 문화를 근거로 하여 다원성과 지속성을 주장하였고 로마 문명이 동진하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동방기독교의 전입연대, 지금 현존한 역사자료 중 가장 믿을만한 것은 당태종 정관 9년(635)이고, 이로써 동방기독교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은 외족들을 포용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문화개방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이유는 당왕조가 중국 통일을 위한 전쟁을 치르는 중에 소수민족의 도움을 받음으로, 전통적인 오랑캐에 대한 관념이 비교적 옅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세가 안정된 후, 서방과 이웃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함으로 당문화를 찬란한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사마르칸트 박물관 벽화◙ Photo&Img©ucdigiN

당왕조의 문화 포용정책은 종교의 발전에도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불교와 도교에도 진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외래종교에도 생존의 토양을 마련해주었는데, 예를 들면 정관 5년(631) 장안에 조로아스터교 예배당과 12년(638) 경교의 대진사를 세워줬다.

따라서, 경교도들은 결코 서역이나 중원지역에만 활동구역을 스스로 제한하지 않았으며, 유입 초기부터 황실의 호위를 받음으로 왕실의 왕족과 귀족들조차도 경교의 힘을 경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경교는 왕실의 각별한 비호로 중국 전역에 확산되어 성도수가 5만명에 이르는 성장을 가져왔다.

당태종의 개방정책과 경교에 대한 뜻밖의 환대는, 결국 경교로 하여금 당의 권력층을 기반으로 탄탄히 적응하게 하였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불교와, 무종의 도교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210년간의 버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당의 강성으로 실크로드가 새롭게 복원되었는데, 이에 비잔틴, 페르시아, 아라비아,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대사와 유학생, 상인들이 장안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또 다른 추측은 정관 9년에 공교롭게 우전국(于闐國)의 왕자가 당의 수도 장안을 공식 방문하는 날짜와 알로펜 일행의 방문 일정이 서로 겹치면서 동일한 날에 함께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 조정에서는 서역의 왕자를 환영하기 위해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재상 방현령(房玄齡, 578~648)이 황궁 西門 밖까지 나가 알로펜 주교 일행을 극진히 맞이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양교(洋敎)라고 불리기도 했던 동방기독교는 의술과 의약 제조술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교구를 잘 구성하여 발전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동방기독교와 알로펜(Alopen)이라는 주교의 명성이 장안에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당대 이후의 경교 역사(History of Jing-Jiao after the Tang Dynasty)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사야 60장 22절)

 

천산북로의 초원길◙ Photo&Img©ucdigiN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제국을 이루고 살던 위구르인들은 840년 대당제국의 붕괴와 함께 크게 3갈래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들 중 투루판과 카스(喀什)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로 유입된 위구르족이 각각 투루판의 고창(高昌) 회홀(回鶻)과 카스 중심의 카라한 왕조(Karakhanid dynasty)를 건설하였다.

마니교를 국교로 하던 위구르족과 이주 전 이미 신장에 수백 년 전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던 경교와의 본격적인 접촉은 9세기 중엽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고대 위구르족인 회홀인의 경교와의 접촉은 이미 6세기 중엽부터라고 주장한다.

당대 통치자의 지지로 급속히 발전한 내지의 경교는 845년 당무종의 멸불정책에 의해 외래종교로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高昌은 8세기 이슬람 세력에 밀려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경교도와 중국 내지의 핍박을 피해 모여든 경교도들에 의해 경교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선교 중심기지가 된다. 특별히 중국의 송대와 원대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高昌은 비단 경교도 뿐만 아니라 불교도, 조로아스터교도, 그리고 마니교도들이 엉켜 살며,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당시 벽화예술을 보면 경교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이 짐작하게 된다.

5월의 천산북로◙ Photo&Img©ucdigiN

위구르족 무슬림의 자존심,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 남부의 카스 또한 당시에는 경교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카스는 경교의 제19교구였으며 총주교로부터 주교가 임명 파견되었다. 이때 카스는 이미 이슬람 세력이 점점 커졌지만 西遼와 원대 몽골의 관대한 종교정책에 힘입어 선교가 가능했으며 천산이남 대부 분의 지역에까지 전파되었다. 과거 많은 탐험가들이 기록을 통해 카스, 허티엔(和田), 사처(莎車), 쿠처(庫車), 투루판(吐魯番), 하미(哈密) 등지에서 자주 경교도들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마르코폴로는 신장 각지에서 경교도, 불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섞여 사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탐험가들에 의하며 당시 경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 신앙에 대한 변론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경교도가 이슬람의 일부 종교적 습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배 시에 하체를 정결케 하고, 매주 금요집회를 가지며, 육식을 했다고 한다. 이는 경교 선교 전략상 현지 환경에 맞도록 예배 환경을 조정, 토착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신장의 천산북부는 남부에 비해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교 대교회당과 주교가 별도로 있기도 했다. 특별히 몽골족과 투르크 유목민 가운데 상당수의 경교도가 생겨남으로써 유목민 안에 경교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유목민 활동 무대인 이리(伊犁) 지역을 중심으로 원대의 대량 경교도 묘석과 석각이 출토되어 유목민 가운데 경교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한다. 송대까지만 해도 경교의 주 세력이 투루판에 한정되었던 것이 원대에 경교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남신장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되었고 경교 역사상 영향력 있는 경교도 위구르인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왕성했던 경교가 14세기 중엽 이후 신장 전체에서 뜻밖의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다. 1349년 새로 제작되었던 경교 25개 교구 편성표에서 경교 선교의 중심지 중 하나인 제19교구 카스가 제외되었다. 이는 카스에서 경교가 거의 소멸되었음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경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투루판 또한 14세기 말에 이르러 완전히 이슬람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신장을 통치하던 몽골 통치자가 이슬람교 확장정책으로 경교도들을 강제로 개종하도록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천산남부 자락에서는 이슬람을 제외한 경교와 기타 종교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북신장에서는 이슬람과 불교가 동시에 활동하면서 경교 또한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이리 지역과 투루판 주변 지역에서는 여전히 시리아어로 예배를 드리는 소수의 경교도들이 남아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정 러시아가 이리를 점령하여 당시 남아있던 3~4백 명의 경교도들을 강제로 경교 신앙을 버리거나 동방정교로 개종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의 정절을 지켰지만, 이후에 신장의 경교는 실크로드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 

저자 김 규 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 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중화복음신학교 교수, 고대 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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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동방기독교
Dr. 김규동: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유물/연구소장(광신대), 광신대학교 초빙교수(한국), 총화복음신학원 객원교수(대만), 하베스트대학교 교수(치앙마이), 동방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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