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통일 준비

Share This Article
독일 통일 31주년 세미나, 김현배 목사 발제
베를린 역사와 통일연구소(소장 김현배 목사) 주최 독일통일 31주년 기념세미나 둘째 강의가 11월 14일 베를린비전교회에서 열렸다. 김현배 목사는 “독일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통일 준비”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독일, 베를린=김현배 목사] 독일 통일 31주년 세미나 두 번째 발제 » 김 목사는 먼저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지배한 서독과 소련이 지배한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또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누어졌다. 서쪽 대 동쪽,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자율성 대 획일성의 두 세계가 충돌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동서독은 경제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 당시 서독 인구는 6,500만 명, 동독은 1,700만 명이었다.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경제적으로 번영한 반면에, 동독은 경제가 무너지면서 삶이 어려워졌다. 기본적인 끼니 걱정은 없었지만 생필품은 물론 TV 한 대 사기도 힘들었다. 더 나아가 동독에서는 서양 음악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잡혀갔다. 어떤 위험한 것에 대해 토론을 한다면 라디오를 작동시키거나 수도꼭지를 틀어야 했다.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독재 정권에서는 기본적으로 공포가 있었다. 이 나라의 공포가 사람들에겐 일상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그중 한명은 고발자였다.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수백만 명의 동독 사람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미행했다. 대규모 도청을 통해 체제 반대자들을 색출해냈다. 불법 가택 수색으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했고, 몰래 촬영하기도 했다. 동독 국민들은 수십 년 동안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 되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동독이 장벽을 설치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동독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불만이 쌓이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결국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동독을 떠나고자 한 모든 사람은 국가의 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억압적인 삶을 못 견디어 동독을 떠난 사람들이 270만 명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155km에 달하는 가시철조망을 걷어내고 벽돌로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 1961~1989)을 세웠다. 장벽의 높이는 2.50미터-3미터의 높은 벽이었다. 전화가 끊기고 철도도 폐쇄되었다. 서베를린으로 출근했던 6만 동독 사람들의 발이 묶였다. 국경 너머 가족과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장벽은 정부의 독재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었다. 억압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동독 사람들의 탈출 방법들에 대해 설명했다.
“더 이상 동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그리운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고, 강물을 헤엄쳐 가고, 강물 밑으로 잠수하고, 열기구와 행글라이더를 타고, 장벽 아래 터널을 파서 탈출했다. 또 육로를 통해서, 엔진을 개조해 엔진 옆에 아이를 끼워 탈출하고, 휴가라는 이유로 이웃 헝가리나 체코, 오스트리아를 통해 독일 남부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정말 다양한 방법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벽에 배치된 7,000명의 군인들이 탈출자들을 총살했고, 탈출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약 140명 정도 됐다.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은 수가 희생당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통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1969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Billy Brandt)는 통일 정책인 동방정책(Ostpolitik)을 발표했다. 즉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 durch)이다. 우리나라의 햇빛 정책과 비슷한 맥락이다. 동방정책 핵심 내용은 이산가족 상호방문, 통신의 교환, 독일교회 상호 방문이다. 동방정책으로 동독과 폴란드, 소련과의 화해와 평화적인 관계를 추진했다. 또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빌리 브란트의 비전과 용기가 탁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목사는 “우리도 현 상황(분단)을 인정하는 것이 정상화를 위한 선결조건이다.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변화의 밑거름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북한의 비핵화는 정상화 과정의 초기가 아닌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독일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독교회는 동독교회와 자매결연 맺고, 콘퍼런스를 개최하여 동독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서독 학생회는 동독 학생회와의 자매결연을 통해 교류의 폭을 넓혀가면서 두 분단된 국가가 한발씩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했다. 독일개신교연합회(EKD)는 1년 예산의 40%를 동독 교회를 위해 사용했고, 서독교회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동독을 방문하여 위로해 주었고, 사랑의 편지를 쓰고, 여러 물품들을 선물로 보냈다. 자동차도 선물했다. 즉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고 강조했다.
또 독일 통일의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던 동독 젊은이들의 기도 운동에 대해서 말했다. “동독 개신교 청년들이 동독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에서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모여 평화기도회를 했다. 작은 수로 출발했지만 갈수록 기도모임 참석자의 수가 증가했다. 교회는 항상 슈타지라는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동독 정권의 온갖 방해와 위협에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회를 계속했다. 니콜라이 교회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1943-2014) 담임목사는 산상수훈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평화(샬롬)와 비폭력에 대해 설교했다. 월요평화기도회는 촛불 시위로 발전했고, 1982년 9월 20일 부터 1989년 10월 9일 까지 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동독에서의 대규모의 촛불 시위에 대해 설명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7만 명의 시민들이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는 ‘우리는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우리는 하나다’(Wir sind ein Volk). 슈타지는 물러가라, 여행의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결국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s)가 사임했다. 하지만 시위는 계속 됐다.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플라츠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들이 자유를 외쳤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성난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행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공산당 대변인 권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 즉시(ab sofort)’라고 말했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는 방송국의 긴급 뉴스가 전파를 탔다. 베를린 장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합법적으로 통일 국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마지막으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준비에 대해 설명했다.
“독일통일은 독일인들의 축제였지만, 한반도의 복음통일은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통일을 원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라는 공감대가 통일의 필요조건이다. 복음통일을 위한 영역별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글 정리 김현배 선교사(베를린비전교회)/ 본지 해외편집위원(유럽)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