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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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敎碑, 명말 1623년 장안 城西에서 출토
景敎碑의 근본 설립 목적은 단순히 景敎의 교의와 신학 주장 만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사와 더불어 景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안사의 난을 평정시킨 그 공 역시 景敎徒에 의한 정치적인 공헌이 있었기에 그들의 역사상의 지위를 정당화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에 조정은 景敎碑 설립을 주저하지 않았다…
[7회]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1.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발견
1) 경교비의 발견과 장소

속수협서통지고(續修陜西通志稿)에서 언급하기를, 명 희종(天啓 5년)(1625) 때, 예수회 소속의 신부 알바레데 세메도(Alvarede Semedo)는 서안에서 멀지 않은 “盩厔”에서 景敎碑가 출토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현장으로 가서 景敎碑에 대한 연구에 매달렸다. 안타깝게도 세매도는 시리아어를 몰라 결국 비석의 크기만 기록했을 뿐, 그 내용은 결코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역사적 고증을 거쳐서 다시 확인한 바 “이 비석은 명말 1623년 장안 城西에서 출토”되었고, 그 부근에는 金勝寺가 세워져 있었으며 …….(淸光緖 년간), 성 외곽에 있는 이 비를 보존하기가 어렵기에 결국 碑林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명나라 후기와 청나라 초기 왕조의 고대 서적에서 “天”과 “GOD”의 단어를 찾고자 했던 가톨릭 예수회에 있어 경교비(Nestorian Stele)의 발견은 의심할 여지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중국의 고대 유물에서 기독교의 복음 전파의 증거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확실한 물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매도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어떤 사람이 城西 근처에서 집 한 채를 지으려고 준비하던 중에 땅속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꺼내어 보니, 이 돌은 높이가 236cm, 넓이가 86cm, 두께가 25cm인 큰 비석이었다. 비석 양면에는 많은 비문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전혀 확인할 수 없는 고대 시리아어의 이름들이 많았다.
명 숭정(崇禎) 17년(1644), 예수회 신부 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는 그의 논문에서 설명하기를 “이는 비석이며 명 天啓 3년(1623), 關中 관원의 명령 하에 발굴하였으며 옛 터 밑에서 얻었고 …교외의 금승사(金勝寺)로 옮김….”
일본의 구와바라(桑原鷺藏)박사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고 보았다. 전겸익(錢謙益)의 경교고(景敎考)에 의하면 景敎碑는 明萬歷 연간(1573~1620)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근거는 림동(林侗) 래재금석고략(來齋金石考略)에 의하면 景敎碑는 아마 명 숭정 연간(1628~1644)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예수회 신부 니콜라스 트리가울트(Nicolas Trigault)에 의하면 발견된 장소는 장안의 대진사라고 하였고,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盩厔縣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명 天啓 5년에 장안 義寧坊의 景敎碑를 대진사로 옮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에 西安府는 景敎碑를 金勝寺에서 지금의 서안 碑林으로 옮겼다.
일본학자 구와바라(桑原鷺藏)에 의하면 이전에 현장에서 옮기는 상황을 친히 목격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고사유기(考史遊記) 중의 일기 부분에서 이 일에 대해 기록하였다. 비록 景敎碑의 출토장소에 대해 학자들의 논술과 여론이 일치하지 않지만 귀납해보면 4가지 견해를 볼 수 있다. 長安설, 盩厔설, 三原설과 長安盩厔 사이설이다.
그 중 長安설이 가장 유력하며 유명한 학자 홍업(洪業)은 1932년 4월 20일 사학년보(史學年報) 제4기의 논문에 박경교비출토위주지설(駁景敎碑出土于周至說)을 발표하였고 景敎碑가 세워진 본적지는 당연히 장안이고 출토장소는 장안 대진사 옛터라고 하였다.
사실 景敎碑가 최초로 세워진 곳은 장안의 대진사가 아니다. 새로운 사실은 景敎碑는 “주질(盩厔)”이라는 곳에서 출토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출토 장소로 두 장소를 놓고 주장하는데, 1928년 고고학자들이 盩厔 유적지를 방문해 살펴본 결과 사원 내에서 오봉구목산대진선사종동명(五峰丘木山大秦禪寺鐘銅銘)을 발견했다. 이는 景敎碑가 “盩厔”에서 세워진 것을 입증해주는 결과이다.
명 숭정 17년(1644), 예수회 소속의 신부 마누엘 디아즈의 재해석을 통해 이 비가 1623년에 발견된 것이라 확신했고, 그 결과 漢字 해석본인 경교유행중국비송정전(景敎流行中國碑頌正銓)을 완성했다. 1625년에 비문 발견 경위와 내용을 교황청에 상세히 보고했다.
일부 서양 선교사들은 비문을 탁본해서 본국으로 보냈고, 이후 각국은 이를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중국 景敎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어서 학계 학자들의 많은 노력과 더불어 景敎碑에 관한 번역과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기에, 그들의 연구 성과로 결국 비문의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2) 景敎碑의 건립
景敎碑의 설립 배경은 당숙종(756~761) 때, 景敎徒 이사(伊斯 Mar Yazdhozid)가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도와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평정시킨 큰 공을 세움으로 후일, 덕종의 허락으로 景淨이 이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781년(建中 2년) 정월 초이레, 즉 2월 4일 일요일에 세웠다고 한다. 또한, 大秦景教流行中國碑에는 역대 황제들로부터 景敎徒들이 예우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며, 동시에 황제들의 德政을 서술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비문은 景敎 총주교 경정(Adam)이 지었고, 글과 제목은 조의랑(朝儀郞) 전행태주사참군(前行台州司士參軍) 려수암(呂秀巖)이 기록하였다. 비석의 높이는 236cm, 넓이가 86cm, 두께가 25cm, 비석에는 “景教流行中國碑颂并序” 총 1,870자와 40개의 시리아어, 비석의 하단부와 그 양측에는 景敎 성직자 8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77명의 시리아 성직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형태는 세 부분으로 이수, 비신, 귀부로 이루어져 있다.
3) 景敎碑의 내용

일반인들은 처음에는 이사의 기념비라 알고 있지만, 막상 비문을 읽어 내려가면 많은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景敎碑의 주요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 첫째 부분은 서문으로써 내용이 비교적 길다. 이사를 업적을 치하하기 전, 먼저 景敎의 유입과정과 그의 교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였고 그 후에는, 景敎가 정관 9년(635)에 입경할 때부터 당태종을 비롯한 이후로의 5대 황제(고종, 측천무후, 현종, 대종, 덕종) 건중 2년(781)까지의 장안에서의 150여 년의 역사를 기재하고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당나라의 문헌이다.
이어서, 비문의 제2부분은 찬사이며 이 찬사는 서문보다 더욱 짧으며 내용은 다시 비문의 줄거리를 두루 서술하였으며 운문으로 표현하였다. 景敎의 기본교리와 중국에서의 활동상황에 대해 논술하였다. 비문에는 당시, 중화문명의 정신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와 페르시아 문명도 소개되었다. 시리아 문자와 헬라 원년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용어와 기독교 사상까지 포함되었다. 이는 여러 문명을 한 몸에 지닌 것과 같으며 동서 문명 교류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불후의 걸작인 것이다.
역사 부분에 관해서는 景敎碑에서 이르기를 대진국(페르시아)의 주교 알로펜이 정관 9년(635)에 당나라 수도 장안에 왔으며 당태종의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태종은 房玄齡으로 하여금 의장대를 거느리고 장안 西郊에서 성대하게 접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알로펜 등이 황제의 藏書樓에서 성경을 번역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태종은 자신의 내실에서 복음의 도리에 대해 알로펜의 설교를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태종은 이런 복음의 도리가 자신의 통치에 유익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3년 후 정관 12년(628)에, 태종의 배려로 장안 義寧坊에 “大秦寺”(지금의 예배당) 한 채를 지었다. 이 일은 중국 사적에서도 佐證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과거의 역사학자들은 景敎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불교의 한 분파로 여겼다. 당나라 때 외래의 3대 종교(조로아스터, 마니교, 景敎)는 모두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전해졌기 때문에 당인들은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종교들을 통틀어 페르시아 호교(胡敎) 혹은, 양교(洋敎)라고 하였다.
북송 왕부찬(王溥撰)의 당회요(唐會要) 49권에는 당태종 정관 12년 7월의 조서가 기록되었다. “道無常名,聖無常体,随方設敎,密濟群生,波斯僧阿羅本遠將景敎,來獻上京。詳其敎旨,玄妙無爲,生成立要,濟物利人,宜行天下,所司即于義寧坊建寺一所,度僧二十一人。” 이 조서와 景敎 비문에 기록된 내용은 거의 같으나 비문에는 貞觀年間에 와서 전도한 자는 대진국 大德 알로펜이라고 하였고 唐會要에는 “페르시아 주교 알로펜”이라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 본인은 시리아 안디옥 사람이고, 당나라 초기, 동방기독교 교회는 이미 페르시아에서 성행되었다. 그중 교사들은 대부분 시리아인들이었다. 알로펜은 비록 페르시아에서 왔지만, 꼭 페르시아인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 당시에 동방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했던 언어는 古시리아어이다.
4) 景敎碑의 가치
景敎碑는 출토(1623)된 후, 많은 동서양의 사학자들과 종교계, 그리고 학술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이에 관한 꾸준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그 후 3세기가 족히 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연구는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20세기로 들어선 후, 景敎碑 연구로 인해 동방기독교 유입역사는 더 명확히 증명되자, 중국에서는 景敎에 대한 더 큰 관심과 함께 더욱 학회의 연구 영역의 신조류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발표된 많은 연구 성과들은 역사학술의 발전과 도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일찍이, 예수회 신부 증덕소(曾德昭)는 이에 관련된 내용들을 이탈리아어와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였으며 예수회 신자 이지조(李之藻)는 景敎碑 탁본의 연구 등을 유럽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景敎碑는 동방기독교가 당조로 유입되었을 때, 중국에서의 복음사역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비석사료일 뿐만 아니라, 景敎 의학이 중국에 전해 들어옴으로 인하여 중국 동서 의학교류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고고학발견사에 있어서 명성이 가장 높은 “사대비석”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그중 景敎碑의 학술가치와 고고학가치가 가장 높았는데, 후에 일부 기독교계에서도 이를 “중국기독교 역사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 동서양 일부 나라에는 景敎碑의 모조품이 만들어질 정도로 동서양 역사교류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당나라에서의 景敎의 존재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비문은 대량의 불교 어휘들을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도교 용어와 중국 고전문자들도 인용했다. 통계에 따르면, 비문 중 시경(詩經)의 30여 곳의 내용, 역경(易經)의 30여 곳의 내용, 춘추(春秋)의 20여 곳의 내용, 經書와 관련된 내용이 150여 곳이나 되었다. 그리고 史書의 100여 곳, 자서의 30여 곳의 내용을 인용함과 동시에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시리아 등 나라의 문법들을 인용한 흔적이 나타났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景敎碑야말로 중세기 인류문화 최고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서 문화교류의 결정체”라고 하였다. 특정 비석에 대해 이렇게 높이 평가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서방선교사와 학자들 역시 서안에서 출토된 景敎碑에 대해 처음부터 아주 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비문을 유럽 각국 문자로 번역하여 아주 자세한 연구와 함께 여러 빌미를 동원해서 몇 번이나 구실을 만들어 景敎碑를 구입하여 유럽으로 밀반출하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續修陕西通志稿에 기록된 바 “清季有西人訪得此碑,依式模刻,以重金賄賂僧,欲以新刻者易原碑,僧大駭,鳴諸官而止,…….西人運新刻者以去。”
서북대학교사 자료의 기록에 의하면 光緖 33년(1907) 영국은 덴마크인 프리츠 홀름(Frits Holm)을 시켜 3천 냥의 은으로 지방관리들을 매수해 景敎碑를 런던으로 밀반출을 시도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사전작업으로 복제본도 만들었다. 당시 산시(陝西)성 순무(巡撫) 차오훙쉰(曹鴻勛)은 홀름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고협서 각 계층과 더불어 적극적인 胡碑와 투쟁을 하였으며, 협서 당국은 영어에 정통한 협서 고등학당 교무처장 왕유(王猷)에게 명령하여 친히 나서서 홀름과 교섭하여 매매계약을 폐지하고, 金勝寺에 있던 景敎碑를 서안 성내의 碑林으로 옮겨서 최종 안치하였는데 이때가, 1907년 10월 2일이었다.
후일, 홀름은 복제한 비석을 뉴욕으로 옮겨 1916년까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임대하여 전시하다가, 1917년에 뉴욕의 한 가톨릭 교인에게 판매하였고 그 교인은 구입한 복제 비석을 바티칸에 기증하였다.
초기, 중국에 온 일부 서양 선교사들은 景敎碑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이 비석에 관한 역사적인 소개와 더불어 출판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사에키 오시로(佐伯好郎)는 景敎碑와 돈황에서 발견한 景敎 문헌을 연구하기 위하여 10년 넘게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명 天啓 3년(1623)에 발견된 景敎碑는, 그 뒤에도 300여 년 동안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하고 서안 金勝寺에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는 서안의 비림(碑林)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景敎碑는 동서문화교류 연구사 연구에 있어서 대체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가 있기에 이에 대해 일본인 아타치 히로쿠(足利喜六)는 그의 “長安史記의 硏究”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유럽학자들이 景敎碑의 가치를 인식한 후에 일부 사람들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여 이 비석은 당연히 유럽으로 옮기면 좋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덴마크의 홀름 등은 분분히 서안에 왔으며 삼천 냥의 은으로 이 비석을 매수하여 런던으로 운송할 시도를 하였다.”
사실은 중국기독교 선교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의 景敎를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景敎碑의 연구를 통해 당의 문화와 고대 동서양의 교류, 즉, 大秦景敎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기간에 이뤄졌던 동서양 의학교류를 연구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초기 기독교가 중국에 전해들어온 유력한 물증이다. 景敎碑의 건립은 동방기독교가 중국의 역사와 함께 번영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후로 景敎는 비록 당 후기에도 계속 존립하였지만 더욱 큰 발전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景敎碑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 景敎 연구 뿐만 아니라, 전체 기독교 교계에 아주 중요한 문헌이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주로 景敎의 교리와 예배 방식, 그리고 당의 역대 왕조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동방기독교가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천 년 동안 세계무대에서 활동했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문헌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景敎碑는 당연히 景敎에 관한 아주 진귀한 역사적 가치이자, 하나님의 동방선교를 위한 복음의 실제적 물증인 것이다.
5) 景敎碑의 목표
景敎碑의 근본 설립목적은 단순히 景敎의 교의와 신학 주장 만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사와 더불어 景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안사의 난을 평정시킨 그 공 역시 景敎徒에 의한 정치적인 공헌이 있었기에 그들의 역사상의 지위를 정당화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에 조정은 景敎碑 설립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곳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두 신앙인이 있었다. 그들은 먼 고향을 등지고 고생을 마다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이곳 당에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6) 景敎碑의 은폐 음모설
1623년에 발굴된 景敎碑를 숨기려는 가톨릭 교황청의 집요한 노력과 음모는 당시 역사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로마 가톨릭이 중심이 된 라틴 기독교는 景敎碑에 대해 위작 또는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며 격하시키기도 했다. ◙
저자 김 규 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 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중화복음신학교 교수, 고대 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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