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꾼 모멘텀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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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만난 결코 잊지 못할 두 사람
필자는 1999년 1월 13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콘티넨탈신대원(CTS)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한국은 IMF 사태로 국가와 기업과 교회 등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때에 해외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 잘 몰랐다. 너무 믿음이 출중해서였던지, 당시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이끌고 유럽으로 나왔으니 말이다.
[에디토리얼=이창배 발행/편집인] 내 삶을 바꾼 모멘텀의 순간 » 벨기에로 떠난 유학 그리고 맞이한 인생 전환점 » 아니나 다를까, 유럽에 도착하고 겨우 수업을 들을 무렵부터 받기로 되어있던 유학비 입금이 점점 지체되기 시작했다. 매일 출근하듯 은행을 들러 송금이 왔나 확인하였지만, 나중에는 아예 1원 한 푼도 받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돈 부탁할 곳도 없었다. 급기야 돈이 다 떨어지고 생활비가 급해진 바람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카메라 세트를 헐값에 처분하였지만 한 달을 버틸까 말까 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로 막막했다. 머나먼 벨기에 땅에서 어디 손 벌릴 곳도, 아는 사람도 없어 큰일이 났다 싶었다. 그러니 매달릴 방법이라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아버지를 찾는 일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이 전무후무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출석하는 한인교회에서 한 성도분을 알게 되었는데, 한참 나이가 많으시고 국제결혼을 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 가정을 유심히 살펴봐 주셨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은 족히 떨어진 도시 안트베르펜(앤트워프)에서 교회를 나오시는 분이, 주일 예배가 마치면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을 들르시고는 집세를 내주고, 쌀과 반찬을 챙겨주셨다. 본인도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음에도, 벨기에 남편의 눈치를 피해 어려운 우리 가정을 도와주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천사와 같으신 분이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이다. 이 경험이 우리 가족이 디아스포라로 겪게 된 첫 에피소드일 것이다.
이렇게 궁핍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모든 게 궁했다. 먹는 것 하나를 사도 가격표를 살펴서 가장 저렴한 것을 골라야 했다. 할 수 있는 한 절약해야 했던 시절이니, 거리가 멀어서 버스를 타야 하는 등굣길도 걸어가야만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지만, 겨울철이나 이른 봄철같이 추운 시기에는 왜 그리 비가 오는 날이 많던지 벨기에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유독 비가 많이 왔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아내는 꼭 버스를 타고 가라며 차비를 손에 쥐여주었다. 하지만 아까운 돈을 쓰기 미안한 마음에, 끝내 비를 맞으며 학교까지 걸어갔다. 우산조차 없이 코트 깃을 세우고 묵묵히 걷다 보니 비 맞은 생쥐 꼴로 학교에 도착했다.
벨기에 사람들은 남에게 과도한 관심을 내보이지 않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신의 일이니 내가 돌아볼 일은 아니라는 식의 시민의식은 눈치 보지 않고 생활하기에 편했다. 하지만 그때 만큼은 내 속이 편치 못했다. 수업 전이라 교수들이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불쑥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 비에 쫄딱 젖은 채 등장하였으니 일순 놀란 눈을 하고는 정적에 휩싸였다. 어디론가 숨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하루 집에서 쉴 걸 내가 왜 왔나 싶었다. 낭패감이 밀려오던 순간, 누군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쥐여주었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한 노교수가 말없이 미소를 띤 채 커피를 건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상하고 인자해 절로 고개를 숙였다. 태어나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또 있을까? 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던 서글픈 심정이 말끔히 가셨다. 그리고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금 일어날 용기를 얻은 위대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삶에서 인생역전의 모멘텀이 만들어진,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어찌 보면 이 나라에 와서 쓰디쓴 인생을 맛보는 상처투성이의 디아스포라를 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필자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가 있겠고, 그보다 더한 모멸감과 아픔을 끌어안은 이도 있겠고, 다행히 행복한 처지에 놓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일생에서 가장 값진 모멘텀의 순간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주민 사역자는 자신의 태도에 따라 한 영혼이 환희와 절망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는 자의식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한다. 실적과 업적과 실력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의 마음을 본받는 자(빌 2:5)가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극히 낯선 자, 가난에 처한 자를 돌아봐 준 그리스도인 두 사람이 있었기에, 벨기에를 거쳐 독일까지 유럽에서 23년을 디아스포라 사역자로 살아올 수 있었음을 필자는 고백한다. 나 역시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겠다고 날마다 기도한다. ◙
글: 이창배 목사/ 본지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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