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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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를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잠을 깨우는 강력한 호소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지금 ‘정의가 크게 도전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말이 울려 퍼지고 있지만 오히려 공허한 말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한국 교회 또한 이스라엘 못지않은 허위의식과 타락한 종교로 전락된 지 오래되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형성적 기독교’가 되기는커녕 ‘도피적 기독교’가 되었고 인간의 공적을 보상해 주는 기복주의로 전락해버렸다. 교회는 세상을 운명에 맡겨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물러서 버렸다…
【독서저널】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 박철수 지음, 대장간, 2022 »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지금 ‘정의가 크게 도전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말이 울려 퍼지고 있지만 오히려 공허한 말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언자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과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였다. 왕과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짓고 상아로 된 침대에 누우며 철벽같은 요새를 짓고 종교적 열심이 최고조에 달할 때 비파소리를 들으며 흥겨운 가락으로 즐기며 이스라엘이 다윗 왕국 이래 최고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군사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평안할 때,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포악과 압제를 할 때 예언자 아모스가 갑자기 등장하여 왕을 비롯한 권력자와 부자들의 거짓을 꿰뚫어 보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처럼 멸망을 선포한다.”(17-18쪽)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회개하지 않고 목이 굳은 백성들을 향하여 멸망을 선언했고 선포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예언대로 이방인의 땅으로 사로잡혀 갔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한국 교회 또한 이스라엘 못지않은 허위의식과 타락한 종교로 전락된 지 오래되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형성적 기독교’가 되기는커녕 ‘도피적 기독교’가 되었고 인간의 공적을 보상해 주는 기복주의로 전락해버렸다. 교회는 세상을 운명에 맡겨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물러서 버렸다… 이 땅과 현실은 어디로 가고 예수 천당’ 교리만이 한국 교회의 중심교리가 되었다. 이 땅에서는 추상적인 예수, 죽어서는 천당, 이 얼마나 믿기 쉬운가? 싸구려 복음이 이 땅에 휩쓸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20-21쪽)
저자는 불붙은 심장으로 외치듯이 아모스의 메시지를 통해 한국교회를 불러세우고 그 행태를 강한 어조로 꾸짖고 있다. 이 책의 1부는 아모스서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으로 출애굽, 언약, 성경의 예언자와 그리스 신을 주제로 한 내용이며, 2부는 아모스서 본문 강해로 이루어져 있다. 필자는 눈에 띄는 몇 가지 포인트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저자는 “성경의 예언자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랍비 아브라함 헤셀의 저서 『예언자』에서 내리고 있는 정의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 예언자는 악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다. 2) 예언자는 사소한 일들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3) 예언자는 빛나며 불타는 사람이다. 4) 예언자는 제일 높은 선을 말하는 사람이다. 5) 예언자는 한 옥타브 높게 말하는 사람이다. 6) 예언자는 우상을 타파하는 사람이다. 7) 예언자는 엄정함과 동정의 사람이다.
둘째, 저자는 아모스를 ‘평신도(?) 신학자’라고 부른다.
“예언자 아모스는 종교적 가문이거나 누구에게 종교적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훌륭한 대학 출신도 아니다. 그는 먹고 살만할 정도의 시골 목자 출신이다.”(69쪽)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 시인처럼 외치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아모스는 자기의 말을 듣는 왕과 권력자들과 부자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포효하는 사자처럼 외치고,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심판과 저주의 말을 힘주어 외쳤다.
어떤 의미에서 아모스는 ‘반체제 인사’다. “배교와 포악이 가득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 말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고 무슨 참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무장한 경호원을 붙혀준 것도 아닌데 겁도 없이 왕과 권력자들과 부자들을 향해 마구 부르짖는다! 예언자 아모스는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 예언자의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침묵할 수 없다.”(69쪽)
아모스서는 산문체가 아닌 시(詩)로 쓰여졌다. 아모스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다. 그는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충격적이다. 산문체는 아무런 흥분과 열정, 열정과 생동감, 기대와 예측이 없는 평평하고 밋밋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세계를 창조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 들어올 것을 촉구하고 초청한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시편과 예언서들은 시로 되어있고 낭송할 때 시의 아름다움을 음악처럼 느낄 수 있다.”(71쪽) 시편과 예언서들을 비롯한 아모스서는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시로 쓰여져 있다.
셋째, 아모스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고발하고 폭로한다.
아모스서 2:4-5에서 유다 왕국이 “거짓 것에 미혹 되었다”는 말은 거짓 우상들에게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우상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르며 세상에서 겉모습을 택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다른 거짓 신들을 따르며 외형적인 종교의식만을 따르는 미신을 믿는 자들이었다.”(95쪽)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나에게 하나님 보다 더 귀한 것,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우상이다! 실제로 나의 학벌이, 나의 지위가 나의 성공이 내가 추구할 최고의 것이요 자랑거리리라고 생각한다면 우상을 숭배한 사람이다.(95쪽) 교회 안에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많다고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넷째,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암 2:6-16)에서 물질만능의 불의한 사회를 고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돈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의 모습이다. “가난한 자가 신한 켤레 값으로 죄인으로 판가름 나는 나라라면 얼마나 병든 나라인가? 인권이 돈으로 결정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가! 노예제도란 인간을 돈과 같은 소유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노예제도가 용납되는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인간이 신 한 켤레 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108쪽) ‘깨끗한 부자’는 있을 수도 없다고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기복주의를 표방한 말이다.(109쪽)
다섯째, 저자는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보수주의적 마인드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127쪽)
이 시대의 예언자인 목사들은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정의가 없는 이 세상을 향하여 예언자들이 전한 급진적 메시지들을 ‘지금, 여기’에서 전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 한국 교회 목사들이 잘못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향해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예언자답지 않는 일이다. 예언자는 자기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사가 자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산천초목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오늘의 목사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기 위해 ‘베뢰아 교인들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를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행17:11) 또한 ‘한국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향해 통곡하며 회개하고 몸소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저자는 외친다.(128쪽)
저자에 의하면 “목사들이 아모스와 같이 담대하게 정의를 말하며 시대의 타락상을 보고 안타깝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외칠 때 청중은 변화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듯이 오만한 자세를 가질 때, 청중들은 그의 메시지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고통스럽고 애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목사들의 메시지는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130쪽)
여섯째, 저자는 아모스가 전하는 ‘정의’의 메시지에 집중한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고아 · 과부 · 가난한 자 · 외국인 나그네 등 취약 계층에 대한 사랑의 도움이라면, 오늘날 정치 경제에서 말하는 정의는 추상적인 정의, 공정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172쪽)
저자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정의(미슈파트)가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와 다양하고 첨예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추상적이거나 철학자의 사색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시편에 따르면 “정의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요. 우주의 기초다.”(시 89:14) 정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신성한 요구이다. 법은 그분의 척도요 정의는 그분의 저울이다.
크리스 마셜은 말하기를 “정의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나타나는 주제들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성적인 죄에 대한 단어가 약 90번 나오는 반면 정의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1,000번 이상 나온다. 안타깝게도 신약성경을 읽는 목사와 교인들은 정의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그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174쪽).
저자는 ‘희년’의 의미를 심도있게 소개한다. “예수님이 선포했던 희년이란 무엇인가? 희년은 자체 내에 사회적 혁명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혁명은 다른 혁명들과는 완전히 다르니, 희년은 거꾸로 이루어지는 혁명이다. 여기서는 꼭대기로부터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다. 하나님의 은혜가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그들은 긍휼히 여기는 눈으로 보게 되고, 자연 자원과 인간 자원을 재분배함으로써 희년에 참여한다… 희년은 사회에서 개인이 토목과 이상을 통제하기 마련한 제도적 장치 기운데서도 탁월한 사례다. 자선을 부자들 개인의 덕과 의지에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희년은 정의를 경제활동의 새로운 규칙으로 삼으며, 그렇게 해서 사회생활의 피라미드를 평평하게 만든다.”(183-184쪽)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정의’를 실천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겨 하나님과 동급으로 숭배하는 돈 · 재산 · 동산 · 토지를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희년이 성취된 것이다… 성령 충만한 마음은 자신의 지갑을 열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쓸 공동체적 자산을 만들 만큼 자유해지는 상태다. 성령 충만한 마음은 아끼는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 이웃을 사랑할 정도로까지 활짝 열린 마음이다.”(185쪽)
일곱째, 저자는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상세히 설명한다.
1) 교회는 성령 충만의 공동체다. “무엇보다 성령 충만은 윤리적 변화를 필연적으로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에 편입된 새사람이 된다.”(295쪽)
2) 교회는 차별 없는 사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새 가족일 뿐만 아니라 코이노니아 공동체다. 교회는 서로서로 함께 하는 공동체다.”(296쪽) 게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서로‘ 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했다. 저자에 따르면 “교회 공동체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용서하고 세워주며 사랑하는 공동체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인종과 모든 민족이 만나 하나 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사실에서 다른 인류와 구별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차별의 장벽이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다.”(297쪽)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사회적 공동체 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최우선 관심거리가 되어야 하며, 물질과 시간과 헌신이 필요하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하나님 나라의 전위 부대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표 · 전진기지 · 대조사회 · 모델이다.”(298쪽)
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에서 말한 정치 · 환경 · 인권·통일 등 모든 사회에 모범을 보이고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 정치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299쪽)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변화된 삶을 살며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집단으로서 세계를 동요시키고 전복하며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선포하며 촉진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세상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300쪽)
교회 공동체는 모든 인류보다 앞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앞장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서 산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희망 속에서 오늘을 사는 것이다.”(301쪽)
은총과 심판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낡은 인간’과 ‘낡은 체제’에 충격을 준다. 이 충격 앞에서 새 세계로 돌아서느냐 아니면 옛 질서에 집착하고 안주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무기력한 것은 교회가 올바른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302쪽)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에 나 자신을 넘겨주어 그의 통치에 충성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짐 월리스는 『회심』에서 “진정한 회개는 기존질서에 위험스럽게 보일 수 있다. 성경적 회개는 우리가 인간존재의 모든 권위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새로운 질서에 편입된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 질서가 시작된다.(302-303쪽)
4) 교회는 스스로 갱신하는 사회다. 교회는 주변 세계 질서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적응하려는 항구적인 유혹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적 삶에 대한 자기비판과 검토와 더불어 지배 계급 체제의 속박 속에서 해방되려면 주변 사회 경제와 사회 정치에 대한 문제를 부단하게 제기해야 하며 저항해야 한다.
“참된 교회는 부단히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를 통한 자기갱신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갱신은 주님이 교회에 부여한 과제인 동시에 주님이 교회에 주신 가능성이다. 이러한 교회 갱신에도 장애물이 존재한다. 무관심, 교회의 상황을 환상적으로 평가하는 것, 교회의 자기만족, 태만한 전통주의, 피상적인 교회론과 협소하거나 세속화된 교회론, 패배주의적 절망 등이 바로 이러한 장애물들이다. 갱신되지 않은 교회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교회를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 참여를 통한 건설적인 교회 비판, 주님을 위한 열망과 사랑만이 갱신의 의지를 거듭 새롭게 할 수 있다.”(304쪽)
저자에 의하면, 높여지신 주님께서는 교회를 도우시고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교회는 죄의 힘에 굴복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회개하고 갱신해야 한다. 그리하여 항상 표준교회인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305쪽)
교회는 신학적 실체이면서 사회적 실체요 윤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교회가 아무리 이 세상과는 상관없다고 말해도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함으로써 사회적 윤리적 실체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안에서 윤리적 규범과 행동목표를 제시하고 스스로 모범적인 모임으로 대조사회로서 사명을 다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인간성 파괴, 윤리적 규범의 혼란 그리고 극도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대적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더한층 자신의 윤리적 삶의 근거를 확고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강조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307쪽)
따라서 교회는 이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세계 완성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 생명 · 새로운 공동생활 · 정의와 자유를 소외와 불행의 영역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실존 뿐만 아니라 정치 · 경제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다. 이 혁명은 인간이 일으킬 수 없는 혁명이다.(308-309쪽 참고)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한다. 하나의 영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제외시키면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작용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말이며, 우리는 더 이상 그 말씀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우리가 그 말씀을 지배하며 우리에게 적합할 경우에만 말씀을 사용하며, 목사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잘못 전해지거나 우리의 인간적인 원망과 희망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보일 경우에는 그 권고를 무시할 수 있어야한다. 교회는 그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는 가운데 정치 · 사회적 과제에도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포함으로써 교회는 교회의 주이면서 세상의 주이기도 한 분을 믿고 선포한다.(310-311쪽 참고)
저자는 복음이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복음을 통해 선포되는 사랑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즉 이웃을 위한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에 대한 결단 안에서 실현된다.(312쪽) 그러므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조성하려는 노력 없이 복음은 선포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은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해석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의 · 자유 · 평화를 위해 무조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복음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들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 정의와 정치적 자유에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말씀 무장을 통해 정치적 투쟁에 참여한다. 기독교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남아 있어 있어야 한다. 복음은 편을 든다. 복음은 가난한 자 · 억눌린 자 · 포악과 압제당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린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편애와 당파성에로 지시되고 이끌린다.”(313쪽)
저자가 이 책에서 외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예언자 아모스와 같이 가난한 자 · 힘없는 자 · 불행한 자 · 비천한 자 · 모욕당하는 자를 위해 혁명가가 된 기독교인은 먼저 정의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나서기 전에 십자가 앞에 서야 한다.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을 변혁시키는지 그리고 영속적인 유일한 세계 변혁이 무엇인지 밝혀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의가 죄를 용서해 주는 곳에서, 정의가 죄책을 제거해 주는 곳에서 정의는 전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특권을 폐지하고 이익과 부정한 경제적 이익에 대한 항유를 포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교회는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예컨대 경제 사회의 생활수준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것과 같은 결정과 조치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정의와 평화가 모든 사고와 말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선포해야 한다.(314-315쪽)
저자는 한국교회를 꾸짖지만 교회가 ‘희망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세계 완성에 대한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의 성취요 선취이므로 우리의 신앙은 근거 있는 희망으로서 기다리고 서두르면서, 그리스도가 우주적으로 영광을 받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교회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산다.“(315쪽)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희망은 새로운 현실 이해를 나타낸다. 희망은 사고와 행위의 동기가 된다. 신앙과 희망은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된 미래적인 세계 완성에 대한 악속이다. ”교회는 희망 안에서 기다리며 서둘러 가도록 촉구된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긴장 속에서 살펴보고, 망보고 서둘러 마중 나가는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참고 견디어 낸다… 왜냐하면 희망의 상실과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희망은 십자가를 지나치지 않는다.”(316쪽)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감동적이 메시지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것은 예언자적 선포요 신앙의 선언이요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기다림에서 힘을 얻어야한다. 참으로 희망하는 사람은 참으로 싸우는 자가 된다! …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은 죽은 자들로부터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에로 부활함으로써 승리한 교회와 새로운 창조 안에서 삶이 완성되기를 기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이다.”(317쪽)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은 창조의 완성을, 즉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현재 세계 상태의 철저하고 전체적인 변혁과 갱신이 모든 인간의 삶의 신체적 · 심리적인 ·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서 희망된다. 가난 · 어려움 · 질병 · 불행 · 억압 · 절망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거되고, 다양한 형태의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계 21:3-4 이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날에 비칠 위대한 희망의 빛이다.”(318쪽)
평자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앞에 오늘의 한국교회를 호출하는 저자의 메시지에 크게 공감한다. 독자는 이 메시지를 통해 전해지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기 바란다. 오늘의 현실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
글 송광택 목사/ 본지 독서저널 칼럼니스트/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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