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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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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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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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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대 왕실(619~907)에 나타난 景敎 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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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敎가 당나라에 들어온 지 146년 만에 최고 번영기 구가

景敎 주교 景淨에 의해 한자 총 219개로 구성되었으며, 하단부와 측면에 고대 시리아어가 새겨진 점이 특이하다. 주로 景敎의 교리와 인간의 타락, 메시아 구원의 역사, 삼위일체, 생활법전 등에 대한 내용, 그리고 景敎徒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 당대 동방기독교의 전성기를 기록한 결정적인 유물인 경교비가 세워졌다.

[김규동 박사 동전사 연구] 당 역대 왕실(619~907)에 나타난 景敎 연구-2 (A Study of jing-jiao in the History of Tang Dynasty) »

11. 당숙종(唐肅宗 756~762)

♣ 이사공덕비: 景敎碑

천보(天寶) 15년(756)에 태자 이형이 靈武에서 즉위하였고, 景敎徒 이사(Yazdhozid)는 명장 곽자의를 도와 “안사의 난”(755∼763) 등을 평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숙종으로부터 자색 가사(袈裟) 두루마기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당 중기에 발생한 안녹산(安祿山)의 난과 이민족의 흥기, 그리고 내부 지배체재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재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 불안이 가중되어 당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숙종의 집권 초기, 그는 靈武에 景敎사원을 건립토록 했다. 여기에는 숙종의 정치적인 수완이 담겨져 있다.

당시 병사를 징집하기 위해 靈武 등지를 주목했는데, 그곳은 주로 변방 출신의 소수민족들이 있었고 적지 않는 무리가 景敎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처럼 숙종의 각별한 배려는 그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이끌어냈다. 이리하여 景敎徒들이 적극적으로 동원에 참여하여 머지않아 국가는 평정을 되찾았다.
이로 인해 그의 후계자인 대종과 덕종에 이르기까지 景敎사원이 또다시 중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주로 隴左, 河西 일대에 景敎가 부흥하였다.

✙ 숙종(肅宗)부터 대종(代宗) 덕종(德宗, 景敎碑를 세움) 때에도 景敎는 사원을 건축하고 성탄절에는 하사품을 받는 등 황제의 지지 속에 성장하였다.
서북지역에도 사원이 건립되었고, 성도들은 서역인들뿐만 아니라 일부 한인들도 있었기에 한자로 번역된 경전도 있었다. 또한, 靈武、成都、廣州뿐만 아니라, 해안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며 대진사를 세웠다.

천당명당(天堂明堂)◙ Photo&Img©ucdigiN
당시 장안의 모습◙ Photo&Img©ucdigiN

12. 당대종(唐代宗 762~779)

♣ 景敎의 호황기

대종이 황제에 오르고, 그 이듬해에 토번(吐蕃: 티베트)에게 비단을 공납하던 것을 중지하자, 토번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을 공격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경교도 이사(Yazdhozid)는 황제를 구출하고 토번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서 景敎는 더 큰 권력의 후대를 받게 되었다.

代宗文武皇帝, 恢張聖運, 從事無爲, 每於降誕之辰, 錫天香以告成功, 頒御饌 以光景衆, 且乾以美利故能廣生, 聖以體元故能亭毒, 我建中聖神文武皇 帝, 披八政以黜陟幽明, 闡九疇以惟新景命, 化通玄理, 祝無愧心.

비문에 의하면 대종은 매년 감사의 표시로 성탄절에 景敎徒들에게 향품(香品)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가 景敎徒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13. 당덕종(唐德宗 780~805)

♣ 景敎 최고 번영기

781년(建中 2년) 음력 1월 7일, 주일 아침, 제국의 심장부이자 꿈의 도시인 장안의 서북쪽 의녕방(義寧坊)의 대진사 뜰에는 기다란 수염에 머리 정수리 부분이 반질반질한 불교 승려 같기도 한 서역의 景敎 주교 景淨이 목판을 두드리자 수많은 인파 속에서 景敎碑 제막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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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한쪽 벽에는 당의 고조부터 태종, 고종, 중종, 예종까지의 다섯 황제의 초상화가 전모되어 있었다. 景敎가 당나라에 들어온 지 146년 만이다.

“太宗文皇帝, 光華啓運, 明聖臨人.大秦國有上德曰阿羅本,
占靑雲而載眞經, 望風律以馳艱險. 貞觀九祀, 至于長安. 帝使宰臣房公玄齡,想仗西郊, 賓迎入內. 飜經書殿, 問道禁闈. 深知正眞, 特令傳授.”

덕종 때 세워진 景敎碑는 동방기독교가 중국에 유입되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이 비석의 내용은 景敎 주교 景淨에 의해 한자 총 219개로 구성되었으며, 하단부와 측면에 고대 시리아어가 새겨진 점이 특이하다. 주로 景敎의 교리와 인간의 타락, 메시아 구원의 역사, 삼위일체, 생활법전 등에 대한 내용, 그리고 景敎徒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 당대 동방기독교의 전성기를 기록한 결정적인 유물이다. 景敎碑 상단에 새겨진 십자가와 하단의 연꽃, 구름 문양은 고대 기독교에서 사용해왔던 유행으로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경교도와 당의 수도인 장안의 상류사회와의 깊은 유착관계로 초기 그들의 중국선교는 성공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예배 순서에 따라 7언으로 이뤄진 ‘대영광송’과 비슷한 찬송이 울려 퍼졌다.

“하늘에는 무궁한 영광을, 대지에는 평화를 염원하며, 인간이 천성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분이 바로, 이 모두를 감찰하시는 인애하신 아버지 알로하(여호와)이시네.”

기도회와 세례식에 이어 삭발한 흰색 사제복에 반구 모양의 모자를 쓰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목장(牧杖)을 든 성직자가 나와,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을 펼쳐 설교를 시작했다.

“먼저 천존(天尊)을 섬기고, 두 번째로 성상(聖上)을 섬기며, 세 번째로 부모를 섬겨라. 이것을 행할 때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

도덕적 교훈을 담은 구절 뒤에 예수의 생애를 요약한 내용이 이어졌다.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마리아는 임신 후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메시아에게 12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고난을 완수했다. ……악한 사람들이 빌라도 앞에서 메시아를 위증했다. ……빌라도는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이 세상의 백성을 위해 몸을 보시하였다. ……새벽에 그를 매달았는데 저녁이 되어서 사방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졌으며 또한 세상의 묘지문들이 열렸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

현존하는 경전은 여기까지 전하고 있다. 비록 예수 부활사건 내용은 빠져 있지만, 예수에 대한 공생애의 주요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서청미시소경에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비를 가렸던 천을 걷어내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글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세례명이 ‘아담(Adam)’인 사제이자 신학자인 景淨이 참석자들을 향해 비석을 소개했다. 그가 이 비문을 저술한 주인공이다.

인간의 타락, 메시아의 탄생 및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의 앞부분에 이어 景敎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당에 정착했는지를 기록한 후반부가 소개됐다. 경교비 제막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그 후로도 景敎徒들은 7일마다 예배와 기도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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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敎 사제들은 일상생활 중에도 매일 7번씩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노비를 소유하지도 재물을 쌓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켰다. 게다가 그들의 신앙이 국가와 백성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 이때 한반도는 통일신라시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 2년에 해당되는데, 당시 당과 통일신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 볼 때 景敎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추측된다.

14. 당순종(唐順宗 805)
15. 당헌종(唐憲宗 806~820)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잠시 중앙집권에 성공한 듯했으나, 중앙집권의 강화정책으로 인해 민중에게 가혹한 세금부담을 안겨줘 숱한 유민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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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당목종(唐穆宗 820~823)
17. 당경종(唐敬宗 824~826)
18. 당문종(唐文宗 826~840)
19. 당무종(唐武宗 840~846)

♣ 景敎 핍박기

태종에서 무종까지의 210년 사이의 景敎는 대체로 황실의 우대정책 속에 선교사들의 지속적인 사역을 이끌었는데 景敎碑에 확인된 이름만도 80여 명이나 되었다. 景敎徒들은 경전 번역과 및 의술을 통한 사역 등으로 당의 전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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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94년에 들어온 마니교(Mani)가 843년(회창 3년) 반란을 일으키게 됨에 따라 회창 5년(845) 도교를 믿는 무종이 道師 조귀진(趙歸眞)의 방책(方策)으로 멸불과 마니교 척결에 조서를 내렸다. 이에 외래종교 전체에 포교 금지령과 더불어 박해를 가하게 되었고 부득이 景敎徒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국에 있는 불교사찰 수만 채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845년 景敎의 대진사도 모두 헐리고, 景敎徒의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고, 3천여 명의 景敎 성직자들이 환속을 당하게 되며, 4~7만 명의 신도들이 도교로 개종하거나 도망하였다.

중원에는 순식간에 그들의 자취가 사라진 듯 했으나, 당 정권의 힘이 미치지 않는 변방 지역에서는 여전히 동방기독교의 활동은 왕성하였다. 서북과 서남 실크로드 지역에는 여전히 景敎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늘 끊이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중앙아시아에서의 동방기독교의 영향력은 아주 컸기 때문에, 케레이트(Kerait), 웅구트(Ongut), 그리고 신장의 회홀인(回鶻人) 등이 景敎로 개종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1년 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멸교의 명령을 거둬들이고 다시 종전의 개방적 종교정책을 시행하므로 어느 정도 교세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나친 황실의 의존과 비호 속에 발전해 왔지만 무종의 포교 금지정책으로 신속한 쇠락을 가져왔다. 이를 통해 황실과 권력에 의존해왔던 景敎의 한계를 볼 수 있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 조정에서는 景敎 선교사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실크로드의 길목에는 이미 토번(吐蕃)이 가로막고 있어 결국 이들은 본국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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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당선종(唐宣宗 847~859)

♣ 景敎 쇠퇴기

무종이 죽고 선종이 즉위하자 그 전의 박해는 누그러지고, 불교에서는 사원을 새롭게 중건하는 등 다시 회복해갔지만, 唐의 불교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오히려 도교사원들이 파괴되고 景敎에 대 한 핍박이 더 심해져서, 850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 中國碑)가 땅속에 파묻히는 등 박해가 극에 달했다. 때마침 중원 지역에서의 번진(藩鎭)들의 兵亂이 일어나 景敎는 더 이상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더욱 쇠약해갔다.

21. 당의종(唐懿宗 860~873)
22. 당희종(唐僖宗 874~883)

♣ 景敎 도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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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년에 일어난 “황소의 난”(黃巢之亂, 875~884)으로 인해 광부(廣府)에서 12만 명의 이슬람, 유대, 페르시아인과 景敎 신자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3천 명이 景敎徒였다. 이때의 핍박을 기점으로 당의 모든 지역에서 景敎의 불씨는 꺼져들고 주변국인 거란, 몽골,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으로 도피했다. 일부 景敎徒들은 라마교, 불교, 도교에 입교했다. 그동안 당대 20만 명 이상의 景敎徒들이 전국에 걸쳐 활동했지만 내우외환의 여러 문제로 인해 소멸되거나 타문화와 종교에 흡수되어 겨우 일부 유적만 남게 되었다.

23. 당소종(唐昭宗 888~906)
24. 당애종(唐哀宗 904~907)

♣ 景敎 소멸기
오대십국(五代十國)의 戰火로 景敎는 완전 자취를 감추었다.
✙ 비록 景敎는 중원을 중심으로 당의 전역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변방지역인 나이만족과 케레이트족, 웅구트족과 신강의 회홀인들이 여전히 景敎신앙을 유지하고 있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부흥했다.
이 객관적인 사실은 프랑스의 펠리오(P. Pelliot)의 의해 연구되었다. 

저자 김규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 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중화복음신학교 교수, 고대 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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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동방기독교
Dr. 김규동: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유물/연구소장(광신대), 광신대학교 초빙교수(한국), 총화복음신학원 객원교수(대만), 하베스트대학교 교수(치앙마이), 동방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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