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형제단의 선교 전략과 오늘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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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저널=이종실 목사] 체코 형제단의 선교 전략과 오늘의 선교 »
프로테스탄트 첫 교회 “형제단(Jednota bratrská, 1457년)”1 의 선교 전략과 오늘의 선교
The First Protestant Czech Church from 1457, “The Unity of the Brethren (Jednota bratrská)” – Applying its Missional Strategy to Missions Today/ 체코 형제단의 선교 전략과 오늘의 선교 » 이 글은 KMQ 2022 여름호, 60-73쪽에 게재된 필자 이종실 목사( PCK,체코)의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 되었습니다. <편집자주>
I. 들어가는 말
체코 종교 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0년 무렵–1415년)는 자신의 라틴어 저서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에서 “거룩한 교회(Sancta ecclesia)” 와 “현재 교회(presens ecclesia)”로 구분하여, 교회가 영혼 구원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영혼 구원의 과정 가운데 있는 여정임을 설명한다.2 한국교회에 익숙한 선교는 세상을 선교의 대상으로 교회와 구분하지만, 후스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도 선교의 범주에 들어간다.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에 의한 선교의 주체로 인식하던 교회의 자의식의 재숙고 역시, 후스의 교회 개념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보쉬의 선교 개념은 이러한 교회론의 인식 변화를 잘 설명한다. 데이비드에 따르면, “선교는 Missio Dei이며, 이 Missio Dei는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 자체에 포함시키려고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선교는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교회의 기존 선교 프로그램을 “미시오 데이가 교회를 정화시키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3
데이비드 보쉬의 “교회의 정화”는 궁극적으로 종교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그의 선교는 그 해방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사실 이것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해방적 속성이다. 프로테스탄트의 “Soli Deo Gloria”라는 모토는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교회 제도와 전통을 제한하고 개혁하는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 개혁 정신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즉 한국 개신교회 안에서 지속적인 교회 분열로 그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분열된 교회들은 서로 “복음”의 개념을 교회들이 함께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 아닌, “복음적”이란 용어로 자신과 다른 신앙을 배척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보편적 교회”의 개념뿐 아니라, “Missio Dei” 개념도 왜곡시켜, 결국 선교 개념에 대한 토론과 이해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은 한국 개신교회의 해외 선교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은,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에서, 당시 로마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처음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설립된 “형제단”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로마와의 첫 교회 분열의 원인과 그 경험을 선교적 관점에서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들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상을 반추하여, 선교를 재정향하는 문제를 함께 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형제단은 1457년에 시작되어 1670년 형제단의 마지막 주교 얀 아모스 코멘스키(Jan Amos Komensk, 또는 Comenius 코메니우스, 1592-1670)의 죽음으로 그 종말을 맞이한다. 현재 체코 형제단교회(모라비안 교회) 주교인 에발드 루츠키(Evald Ruck)5는 형제단 설립 555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형제단 555년 편사”에서 형제단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6 이 글 에서는 형제단의 설립과 10년 후 기존의 로마교회의 사도적 전통을 부인하 고, 자신들이 사도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사제 서품 제도를 확립하는 1470 년경까지 제1세대를 다룰 것이다. 이 시기에 형성된 형제단의 선교 정신이 이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별히 형제단 설립자 르제호르 즈 크라이치(Bratr .eho. 또는 .eho. Kraj.i, 1420-1474)의 현존하는 그의 서 신과 저술들을 통해서 형제단의 선교 정신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체코 종 교 개혁의 흐름 안에서 태동된 형제단을 언급하기 위해, 간략한 체코 종교 개혁과 형제단의 사상적 기초가 된 개혁자 페트르 헬치츠키(Petr Chel.ick, 1379년경.1460년경)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결론에서, 초기 형제단의 선교 정신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에 주는 시사점과 바 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Ⅱ. 체코 종교 개혁 지형
체코 종교 개혁의 여명의 시기는 얀 후스보다 약 반세기 앞서서 시작되었다. 체코 민족 역사학자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ek Palack, 1798.1876)는 밀리치(Mili. z Krom..i.e, 1320~1325년경.1374년)를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개인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교회 갱신의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그는 “새예루살렘(NovJerusalem)”이라는 매춘녀들의 공동체를 세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체코어 설교와 성만찬으로 그들이 진심으로 회심하는 목양을 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성경), 그리스도의 율법, 초대교회 모델을 황금률로 강조하는 체코 종교 개혁의 특징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후, 그를 추종하던 체코 민족들의 봉기가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후스파 전쟁(Husitsk e valky)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1419년에 시작되어 143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후스파들보다 군사력이 월등한 십자군이 네 차례 원정을 하였지만, 번번이 패배하였다. 그러자 공의회는 전쟁을 포기하고 외교적 수단으로 후스파와 보헤미아 지역(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바젤 협정(basilejsk a kompaktata, 1436)을 체결하게 된다.
후스파의 개혁 프로그램은 1420년 발표된 “프라하 4개 조항( .ty.i pra.ske artikuly)” 으로 대표된다. 그 내용은 첫째, 이종 성찬; 둘째, 신분 구별 없이 대 죄 처벌(면책 특권 폐지); 셋째, 하나님 말씀의 자유로운 설교(체코어 설교); 넷째, 교회의 세속 재산 몰수(교회 청빈과 세속 권력 제한)이다. 8 바젤 협정이 법의 기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에 보헤미아는 가톨릭과 후스파 신앙고백이 공존하는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교황이 승인하지 않은 후스파와 공의회 간의 협정이어서 대단히 불안정하여 협정의 내용 가운데 실질적으로 이종 성찬 조항만이 유의미했다. 후스파의 요구는 선한 사제로부터 이종 성찬을 받으며, 신앙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1446년에 자신들이 “의회( .esksn.m)”에서 대주교로 직접 선출한 얀 로키차나(Jan Rokycana, 1396년경-1471년)를 교황이 승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 비오 2세는 그 요청을 묵살하고 협정의 일방적인 철회까지 하게 된다. 후스파 자신들의 신앙 경향을 가진 대주교가 없다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제 서품이 불가능하여, 결국 개혁적 경향 교회들의 소멸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 것은 후스파 내부의 영향도 있었다. 후스파는 프라하 대학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종 성찬 프로그램을 강조하는 그룹과 종말론적인 공동체 건설을 강조하는 타보르 그룹으로 크게 나뉜다. 이들 모두는 엄격한 성서주의자들이었으며, 이종 성찬을 공통적으로 공유하면서도 그 실천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프라하 이종 성찬파는 로마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교회 개혁보다 로마교회 안에서 이종 성찬을 지키는 교회로 특징화되기도 한다. 이들은 우트라퀴스트(Utrakviste, Utraquist) 또는 성배주의자(kali.nici)로 불렸다. 반면 타보르파는 급진적이었다. 1420년에 프라하 남쪽에 요새화된 정착촌을 세워 성경에 나오는 “다볼산” 이름 을 따라 체코 이름 “타보르(Tabor)”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타보르파 라고 부른다. 이들은 타보르 공동체의 설교 담당과 각 형제의 필요에 따라 공동체의 재정을 분배하는 책임자로 펠흐르지모프의 미쿨라시(Mikula. z Pelh.imova, 또는 비스쿠페츠 “Biskupec”라 부름, 1385년경-1459년경)를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주로 농노의 신분이었던 그들은 천년 왕국설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노예의 무거운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며 부패한 교회 세력과 무력으로 맞서는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 성서적 세계관과 성서적 도전과 위로로 가득 찬 환경의 신학적 근거 위에 신앙적 확신을 세웠다. 9 이러한 그들의 신앙의 확신은 현재 개혁 교회 찬송가에 포함된 당시 그들의 군가 “하나님의 용사들은 누구인가”에 잘 나타난다. 10
Ⅲ. 헬치츠키(Petr Chel.icky)의 성서주의와 평화 사상
후스파 개혁 운동이 전쟁으로 확산될 때부터 폭력이 일어났다. 결국에는 광범위하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타보르파 야전군의 전쟁과 파괴에 대해 후스파 내에서 비판적 시각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헬치츠키이다. 1420년경 프라하에서 후스파 운동이 폭력적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격한 헬치츠키는 후스파 운동과 거리를 두고, 남보헤미아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 작업을 통해 자신의 개혁 사상을 체계화 하였다. 학자 또는 사제 출신의 다른 체코 개혁자와 달리 평신도인 그는 개혁의 관점에서 신학적 이론보다 성경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11 폭력과 전쟁의 문제에서, 그는 동시대 다른 개혁자들과는 타협 없이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12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예정된 자(praedestinatus)”와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praescitus)”가 함께 있는 13 거룩한 교회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예정된 자의 표징은 헬치츠키의 성경적 실천을 더욱 강화했다.
헬치츠키는 거룩한 교회로 부름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정치 권력에 의존하여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폭력을 축복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주창했다. 얀 후스의 교회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그는 폭력 문제에 관해서는 얀 후스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로키차나에 대한 응답 (Replika proti Rokycanovi)”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후스를 무차별적으로 비판한다. “많은 사람이 살인을 천사들이 달리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으나, 미스트르 후스 외에 누구도 이 말을 믿지 않았다.” 14 사실 얀 후스는 평화의 사도로 알려졌다. 콘스탄츠 소환을 앞두고 공의회에서 전할 메시지를 준비할 때도 친구와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평화를 주제로 삼았다. 15 얀 후스의 동료들인 프라하 카렐대학교 개혁파 학자들도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방어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나 헬치츠키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 후에 재세례파, 아미시파, 퀘이커 그리고 침례파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와 간디에게까지 소개된, 이러한 헬치츠키의 평화 사상은 그의 성서주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성서주의와 평화 사상이 그대로 형제단의 유산으로 흘러 들어갔다.
Ⅳ. 르제호르즈(Bratr .eho.)의 형제단 설립과 배경
온건한 프라하 이종 성찬 그룹과 급진적인 타보르 그룹의 차이를 잘 조정해서 십자군 원정에 성공적으로 공동 대처하는 데는 타보르파의 출중한 장군 얀 지슈카(Jan .i.ka z Trocnova, 1360년경-1424년)의 역할이 컸다. 16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두 그룹 간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다가, 바젤 공의회의 협상 제안에 대해, 프라하파 특히 로마교회 안에서 이종 성찬 교회의 특징을 가졌던 우트라퀴스트들이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바젤 공의회의 외교적 노력은 뜻하지 않게 후스파 내의 급진파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 프라하 그룹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1434년 리파니(Lipany)에서 강경파 타보르파를 패배시킨다. 결국 후스파는 형제 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이 전쟁은 이미 오랜 전쟁으로 지친 후스파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교황은 1446년 자신들의 의회가 선출한 얀 로키차나의 대주교를 승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젤 협약 철회까지 하자 후스파들은 사제 부족 현상을 겪게 되고, 심지어 개혁파 내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사제 서품을 받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교회 결정들에 대처하는 이종 성찬파 지도자, 얀 로키차나의 지도력이 타격을 받게 되어 개혁파들이 얀 로키차나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스파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은 자유롭게 선한 사제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이 일어나 많은 소그룹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스보르 (sbor)”18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그룹들 대부분은 조직적이지 못하고, 교리적으로 전례적으로 이종 성찬 교회와도 달랐다. 19 이 당시 교회는 영혼 구원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예정된 자(praedestin.tus)”와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 (praescitus)”가 함께 있다는 후스의 교회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개혁파 성도들은 악한 사제들을 피해, 좋은 사제를 만나는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르제호르즈는 결별한 대주교 로키차나에게 보낸 서신에 로마교회와 결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교황이 머리인 로마교회 회중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믿을 수 없습니 다. 독이 교회에 부어져서 교회는 부, 쾌락, 세상의 존엄을 찬양하고, 대죄가 교회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도 관리하는 사람들과 함께 수치와 죽음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에,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 사제들로부터 그리고 관리하는 사람들로부터 단절한 이유입니다.20
로키차나는 르제호르즈의 삼촌이었다. 르제호르즈는 프라하 이종 성찬파인 삼촌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프라하 슬로바니 수도원(kl a.ter Na Slovanech 또는 엠마우지 Emauzy) 수도사가 되었다. 삼촌이자 스승이었던 로키차나의 후스파들에 대한 지도력 상실로 실망한 르제호르즈는 그에게 자신의 길로 초청을 하였지만, 그가 거절하자 서로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르제호르즈는 헬치츠키를 만난 후 그에게 매료된다. 그는 헬치츠키를 “그리스도 팔복 박사(doktor osmera blahoslavenstvi)로 불렀다. 21 그는 수도원을 떠나 남보헤미아에 이미 흩어져 형성된 공동체(스보르)들을 향해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 공동체들과 서로 연결 고리가 되었고 그들은 함께 모여 살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1457년 말 또는 1458년 봄경에 그들이 원하는 신실한 사제 미할(Michal)이 있던 잠베르크( .amberk) 교구의 쿤발트(Kunvald)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의 형제와 자매들(Brat .i a sestry zakona Kristova)”이라고 불리는 체코의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22 이후 많은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던 후스파들이 합류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464년 리흐노프(rychnov)산에서 총회를 열고 신앙 실천에 “동의(svolen i)”를 한다. 그리고 1467년에 당시에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사제직 서품 제도를 실행한다.
Ⅴ. 초기 형제단(1457-1470)의 “교회 정화”로서의 선교
르제호르즈는 1457년 쿤발트에서 형제단을 조직하고, 1464년 리흐노프산에서의 동의(同議)와 1467년 사제직 서품 제도 설립을 실행에 옮겼다. 그 후 자신은 사제직에 오르지 않고 “교회에 대하여”와 형제들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인 “그리스도의 좁은 길에 대하여” 등 많은 저술 활동을 통해 신학적 틀들을 제공하고 1470년에 마지막 숨을 거둔다. 쿤발트에 정착촌을 형성한 “그리스도의 법의 형제와 자매들”23은 1464년 리흐노프산에 모두 모여 동의를 하는 공동체 협약식을 가진 이후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존의 로마교회나 로마교회와 타협해 버린 후스파 우트라퀴스트(이종 성찬)교회 등의 “교회들에서 생명의 구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바른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던 절박함을 그 속에 담았다. 그들의 “동의” 내용은 삶과 규칙에 관한 것이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대전제는 “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롭게 굳게 세우고,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만찬, 교회 규정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세워가기로 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에 뿌리를 둔 덕스럽고 겸손한 삶, 서로 교육하고 훈계하고 그 훈계를 받아들이며, 만약 이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그 정도에 따라 세 단계의 징계가 뒤따르게 된다. 가장 큰 세 번째 단계의 징계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심각한 죄를 지었을 경우로, 이때는 성만찬 배제와 함께 회개할 때까지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24
그리고 사제와 르제호르즈와 같이 평신도 설교자들 즉 가르치는 자들은 사유 재산 없이 겸손하게 모범적인 삶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영적 성장과 회중들의 영적 봉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려운 이웃을 재정적으로 돌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사제들은 전문 길잡이의 도움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증언자로서 흩어져 있는 공동체 주위로 형제들 그룹들을 두루 다니며 방문을 해야 했다. 여행 중에도 그들은 일해야 했다. 사제들은 탐욕과 책 수집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 만약 그들의 사역에 경비가 충분하지 않으면, 모금을 위해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선발되어 모금을 전담하였다. 25
사제 양육을 위해 사제들이 거처하는 공동체 중심 역할을 하는 형제의 집에서 소년 시절부터 훈련을 받았으나, 사제가 되기에 충분한 재능을 보여주지 못한 개인들에 한해, 봉사자를 임명하여 자유로이 다양한 봉사하는 일을 맡겼다. 이들 역시 사제들처럼 재산을 포기하고 헌신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했다. 사제와 회중들을 감독하는 장로가 있었다. 그들은 조언과 도움이 필요한 회중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이들은 후에 “조력자” 또는 “판사”의 이름 으로 불렸다. 성경의 다양한 해석으로 일어나는 형제와 자매들 사이의 불평들을 평등하게 조정 결정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된 신앙과 모범적인 삶의 가장과 주부였으며 공동체의 평신도 지도력을 형성하였다. 26
“리흐노프 동의”에서 형제단의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율법,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초대교회 모델을 황금률로 삼아 교계 제도 안에 갇힌 복음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로마교회의 성경 말씀은 자신의 교계 제도의 상황 안에서 해석되었다. 형제단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헬치츠키는 교계 제도의 타락은 교회가 “콘스탄티누스”라는 세속 권력과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교황과 황제라는 두 큰 고래에 의해 믿음의 그물이 찢어져 그물 안에 있던 물고기들이 어둡고 위험한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27 서구 기독교 세계의 이러한 교회 현상을 현대 선교 신학자 대럴 구더는 환원주의 문제로 분석하였다. 환원주의로 교회의 기독론인 그리스도의 주권을 교회의 교계 제도(계급 구조)로 전락시켰고, 교회론에서 교회를 구원 기관으로 전락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교회론에 나타난 환원주의가 가장 심각하다고 지적하였다. 28
그래서 구더에 따르면, “교회의 지속적인 회심” 또는 “교회의 지속적인 재 복음화”가 일어나야 한다. “각 지역의 교회인 회중 모임이 더욱 새롭고 포괄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응답하고, 순종함으로써 이 전체 교회의 회심이 일어난다.”29고 그는 주장한다. 이때 그는 “교회(Church)” 와 “회중 모임(Congregation)”의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면서, 그의 교회는 한국교회와 같은 회중 중심의 개-교회적 구조가 아니라 교구 중심의 교회 구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론에서 언급한 데이비드 보쉬의 교회를 정화하는 방식의 선교와 맥락을 같이한다.
구더의 관점에서 보면, 560여 년 전 체코에서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교회였던 형제단의 교회설립의 과정 자체가 환원주의에 빠진 복음을 해방하기 위해 교회를 정화시켜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통치를 개인주의적인 신앙에서 세상으로 확대시키는 일련의 선교였다. 교회의 선교에서 인간적 동기들을 회개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당시 구원론과 교회론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리흐노프 동의”는 형제단이 로마교회가 구원을 개인 구원의 문제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 메시지와 구원의 복음 선포를 분리하고, 교회의 선교를 개인 구원으로 축소하고, 일반적인 소명을 성직주의로 축소하고, 성례전을 개인 구원의 예식으로 축소한 것을 극복하려고 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그의 나라에 대해 확신을 품고, 그것을 실제로 건설하는 선교적 실천을 하면서, 그 나라를 기다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현대 선교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선교와 신학의 치열한 토론으로 교회론 이슈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교 운동은 교회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다시 할 필요가 생겼다. 교회의 본질이 선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단의 교회 경험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반추와 성찰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Ⅵ. 나가는 말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형제단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이들 서구 선교 신학은 자신들의 전통과 상황에서 나온 지역적 신학이란 점이다. 현재 한국교회에 전해진 전통적 선교나 미시오 데이와 선교적 교회론은 기독교 세계라는 지역의 특수한 맥락과 관련하여 교회의 자기 비판적 이해 아래서 형성된 신학들이다. 물론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서구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영향으로 세워진 한국 개신교 상황이기에 서구 기독교 세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한국 개신교를 서구 기독교와 등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선교 신학이 한국 개신교회 상황에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 세계의 문화와 전통 안에서, 자기 비판적으로 형성된 신학을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서구적인 문화와 규범의 표현들을 약화시키면서 우리 상황의 입맛대로 재구성할 만한 학문적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고, 설령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럴 마음이 없다. 단지 지역 신학 안에 포함된 보편성의 요소를 찾아보길 원할 뿐이다.
기독교국에서 비기독교국으로 향하던 선교의 방향이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향하는 “육 대륙 선교” 시대에서는 모든 지역 교회들이 선교의 최전선에 서 있는 시대로 선교 환경이 달라졌다. 그래서 교회와 교회의 연대와 협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선교 시대에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물적 인적 자원만이 선교 자원이 아니라 교회의 경험이 중요한 선교 자원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서구의 선교 신학을 서구 교회 경험의 관점에서 우리의 선교적 자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 신학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의 선교 자원으로 바꾸는 작업, 즉 우리의 상황에서 재번역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번역을 통해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자신의 선교지 사람들 또는 선교지 교회들과 파송자 -피선교지, 보내는 자 -받는 자의 관계에서 형성된 선교와 교회 개념에서, 교회와 교회의 연대와 협력에 의한 선교와 교회 개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선교적 자의식을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제단의 교회 분열은 궁극적으로 환원주의로부터 복음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 개신교회는 서구 기독교 세계가 경험한 환원주의가 교회 분열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형태이다. 성도의 개인의 신앙과 그 소명의 발견과 삶으로 이끌기 위해 개인의 신앙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된 다. 교회 구조-신학-목회-교육-선교-성만찬과 예전 등 모든 것이 유기적이고 종합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식물 성장에 필요한 여러 영양소가 아무리 풍부해도 그중 한 가지가 부족하면 식물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처럼 어느 한 지역 교회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의 교회 구조와 신학과 목회와 선교의 전반적인 대 전환의 숙고가 필요하다.
레슬리 뉴비긴에 따르면 “교회 연합과 세계 복음화 이 둘은 복음의 표징”30 이다. 이제 오히려 교회 연합과 일치를 통해 환원주의에 갇힌 복음을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형제단 공동체의 실천이 올바른 교회를 추구한 것을 기억하면, 그들의 노력은 개교회주의적 차원에서의 신앙 강화가 아닌, 한국 개신교회 전체 차원의 구조 속에서 교회와 선교를 고민하는 것이다. 보편적 교회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없는 국내 교회 연합 운동이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다시 분열된 것을 보라! 마찬가지로 해외 선교 현장도 중복 투자, 경쟁적 선교, 비대칭적 파송 등의 문제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거론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 인가! 국내외 선교 현장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교회론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신앙을 이끄는 방향으로서의 복음이 아니라, “복음적”이란 용어로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타인의 신앙을 배척하는 기재로 남용한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보편적 교회론의 관점에서 자신의 국내외적 선교 현장을 한국 개신교회가 깊이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각주
1) 형제단”은 로마교회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의 사제 서품 제도를 갖춘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명실상부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며, 오늘날 체코형제단교회 주교 에발트 루츠키는 세계 첫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자신의 책 “형제단 555년 편사”에서 주장한다. 형제단은 1620년 30년 전쟁 빌라호라(백산) 전투 이후 재가톨릭화가 시작되면서 보헤미아 땅에서 비밀 신앙생활을 하든지 또는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하든지 해야만 했다. 망명한 형제단의 마지막 주교 코메니우스가 1670년에 죽자, 형제단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727년 형제들의 후예들이 진젠도르프 영지에서 헤른후트의 “재건 형제단”을 세운다. 그래서 이들을 “헤른후트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모라비아 지역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들이 헤른후트로 모두 약 3만여 명이 이주하였다. 이들이 선교 운동에 헌신하면서, 후에 세계 “모라비안 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들은 약 7만 명이 있었다. 이들은 1781년 “관용의 칙령”으로 제한적이지만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아 지상으로 나온다. 이들을 “관용의 교회”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헤른후트로 향하던 이주가 멈추었다. 이들 관용의 교회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1차 세계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가능하였다. 이들이 오늘날 필자가 함께 동역하는 “체코형제복음교회”이다. 모라비안 교회의 “체코 관구 형제단 교회” 일부가 체코형제복음교회의 한 노회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세계 모라비안 교회 조직인 “Unitas Fratrum”에 속해있다.
2) Jan Hus, Tractatus De Ecclesia (Praha: Komenskeho evangelicka fakulta bohoslovecka, 1958) 11-19.
3)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Maryknoll: Orbis, 1992) 519.
4) 위의 책, 519.
5) Evald Rucky, 555 let Jednoty bratrske v datech (Liberec: Jednota bratrska, 2015)
6) Rudolf .i.an, D.jiny Jednoty bratrske (Praha: Kalich, 1957) 8-9.
7) Amedeo Molnar, Jednota bratrska (Praha: Kalich, 1956) 14.
8) Amadeo Molnar, “Taborsky boj duchovni.” Theologicka p.iloha K.es.anske revue, .. I (1958): 1-2.
9) 체코형제개혁교회 찬송가 737장으로,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그리고 그의 법의 용사들은 누구인가? 그의 안에서 단지 하나님으로 도움을 기대하며 그와 함께 언제나 승리하리…”
10) 이종실, “체코 종교개혁자 페트르 헬치츠키의 사상과 선교,” 『선교와 신학』 53 (2021), 334-335.
11) 위의 책, 336에서 재인용; Chel.icky Petr, “Replika proti Rokycanovi,” in Spisy z Pa.i.skeho sborniku, edited by Jaroslav Boubin (Praha: Historickyustav Akademie v.d .eske republiky, 2008), 82.
12) Jan Hus, 위의 책, 11.
13) 이종실, 위의 책, 336에서 재인용; Chel .icky Petr, 위의 책, 82.
14) 이종실, 위의 책, 336에서 재인용; Toma. Butta /이종실 역,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서울: 동연, 2015), 94-98.
15) 이종실, 위의 책, 336.
16) Petr .ornej, Jan .i.ka (Praha: Paseka, 2019), 599.
17) 이종실, 위의 책, 332-333.
18) “sbor”는 “스보르”라고 발음하며, 처음에는 모임 또는 회중(congregation)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후 에 모임이 모이는 집(건물)의 의미로 바뀌었다. 형제들은 그들의 다른 후스파 또는 로마교회와 매우 확 실히 구별되길 원하여, 형제단 공동체의 교구 또는 공식 교회 이름으로 발전하게 된다.
19) Karolina Petrasova, “Ji.i z Pod.brad a jednota bratrska,” Paginae historiae vol.11(2003): 6
20) Jaroslav Bidlo, Akty Jednoty bratrske I (Brno: Historicke komise p.i matici moravske, 1915) 17-20; “pro. my nemuo.emse dov..iti spaseni .ivota v..neho spolu s zborem .imske cirkve, jeji. hlava jest pape.… Neb jest jed vlit v tu cirkev, bohatstvi, rozko., chvala d.stojenstvi sv.ta a tak h.ichove smrtelni v ni misto maji….. Ta jest p.i.ina, pro kterou. sme se od kn..i tohoto sv.ta i od lidu, ktery. spravuji, odtrhli, neb sme poznali zjevn., .e kn..i is lidem v nemilosti p.ebyvaji a v smrti.”
21) Franti.ek M. Barto., Petr Chel.icky (Praha: Kalich, 1958) 5.
22) Rudolf .i.an, D.jiny Jednoty bratrske (Praha: Kalich, 1957) 35-37.
23)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불렀던 호칭이었다. 이 이름이 “형제단”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 회원들을 “형제 들” 또는 “자매들”로 불렸다.
24) Rudolf .i.an, 위의 책, 42-43; Antonin Gindely, Dekrety Jednoty bratrske (Praha: Kober, 1865) 56.
25) Rudolf .i.an, 위의 책 , 44; Antonin Gindely, 위의 책 , 56.
26) Rudolf .i.an, 위의 책 , 44; Antonin Gindely, 위의 책 , 59.
27) 이종실, 위의 책 , 336. 에서 재인용 ; Petr Chel.icky,“Siet viery,” in Siet viery, edited by Jaroslav Boubin (Praha, Historicky ustav, 2012), 89-99, 75.
28) Darrell L. Guder, Called to Witness (Grand Rapids: Eerdmans, 2015) 96.
29) Darrell L. Guder. The Continuing Conversion of the Church (Grand Rapids: Eerdmans, 2000) kindl loc. 1786-1787.
30) Lesslie Newbigin, The Reunion of The Church (London: SCM, 194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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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종실 선교사/ 장신대 신대원(M.Div)과 영국 셀리오크 칼리지 (Diploma in Mission Studies)에서 학업을 하였다. 체코 선교사로 예장 통 합의 파송을 받아 1993년부터 현재까지 체코형제복음교회와 중앙유럽선 교연구소를 중심으로 현지 교회들의 선교를 섬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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