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다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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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핫지 홀 기숙사 3층에 머물면서 <칼빈클럽(Calvin Club)> 즉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을 좋아하는 단체에서 가난한 학생에게 주는 식권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승만은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독립운동가요, 외교의 귀재요, 우리 민족의 선지자였다. 그의 가슴에는 늘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 시장경제, 그리고 기독 입국이 꿈이었는데 그 꿈대로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는 평생 생명을 바쳐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시사칼럼=정성구 박사] 독립운동 다시 하자! » 1905년 조선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1910년에 이 씨 조선은 막을 내리고, 드디어 일본제국 주의자의 손에 들어갔다. 일본제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다. 말도, 글도 빼앗고, 문화도 빼앗았다. 그리고 쌀도 실어가고, 어물도 가져가고, 심지어 놋그릇도 빼앗아 포탄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조선의 멍청한 관리들은 모든 것을 다 주고 일본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완용이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라고 욕하지만, 실은 힘없는 왕실, 고종이 나라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일제가 왕실을 그대로 보존해준다는 감언이설에 속기도 하고 속아주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은 지구상에 없어지고, 대일본제국에 흡수통일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칼을 찬 일본 순사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고, 조선 사람은 일본 공안정치에 가로막혀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순한 양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때는 교회가 있었고 신실한 목회자들이 있어서 민중을 깨우는 일을 했다. 당시의 교회 수는 주제소(파출소)보다 많았다. 거기에는 평양신학교 졸업생, 감리교 신학교 졸업생들이 있었다.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에 있었지만, 그때는 재림신앙이 확실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원수인 일본제국을 한순간에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찬송가였다. 그리고 서서히 민족의식이 깨어나고 역사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교회들마저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 박관준 장로 등 출옥 성도들 외에는 모두가 무너지고 신사 앞에 절하였다.
그전에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상을 계기로 해서 전국적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세상에 아직도 조선 민족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했었다. 하지만 그 후 3·1운동은 실패했다. 일제의 교묘한 조선 민족 탄압정책을 슬쩍 바꾸어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돌려 약간의 숨통을 터 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일제에 대한 저항세력은 다 꺾이고, 모두가 일본과 동화되고, 창 씨 개명을 하면서 일본화되었다. 결국 모두가 친일파가 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한성에 있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상해에도 있었다. 결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합치기로 했지만, 서로 권력다툼으로 날과 밤을 세었다. 그런데 상해 임시 정부는 정체성이 없었다. 어떤 이는 공산당의 자금을 받아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어떤이는 민족주의 운동하는 사람들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재산을 다 바치고,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같은 분들이 권총으로 일본제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다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래도 우리 민족이 살아 있다는 기개(氣槪)를 보여준 것은 대단했다. 그 배후에는 김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승만은 한성감옥 6년 가까이 종신수로 있으면서 영어를 통달하고, 복음 진리 곧 성경 진리를 깨우치고, 감옥에서 학교를 세우고 책을 저술하는 등 준비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05년에 출소해서 미국 유학을 가기까지 평양의 남궁혁 씨 댁에서 몸을 추스르다가, 수십 통의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들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배재학교, 정동감리교의 장로, 하와이 감리교의 설립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오히려 장로교 대학과 교회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았다. 그는 워싱턴의 언약도 교회에서 헴린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고, 조지 워싱턴대학(B.A)과 하버드대학(M.A)을 마친 후,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기 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했었다. 비록 그는 신학사(M.Div) 학위는 없지만, 1900~1910년 사이에 프린스턴신학교는 월필드(B.B. Warfield) 박사가 네덜란드의 수상-아브라함 카이퍼-를 초청해서 칼빈주의 특강을 들음으로 미국에서 정통 칼빈주의 세계관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는 그린(Greene) 교수에게서 <기독교 변증학>을 공부했고, 찰스 어드만에게서 <바울서신연구>를 공부했다. 찰스 어드만은 후일 박형룡 박사와 한경직 박사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핫지 홀 기숙사 3층에 머물면서 <칼빈클럽(Calvin Club)> 즉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을 좋아하는 단체에서 가난한 학생에게 주는 식권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승만은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독립운동가요, 외교의 귀재요, 우리 민족의 선지자였다. 그의 가슴에는 늘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 시장경제, 그리고 기독 입국이 꿈이었는데 그 꿈대로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는 평생 생명을 바쳐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그런데 오늘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사 시절에, 하도 몸을 돌보지 않고 철저히 조사에 열중하니 오늘의 윤석열 대통령이 총장 시절에 “너는 무슨 검사 생활을 독립운동 하듯 하냐?”라고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는 그동안 김일성의 장학금을 받고, 세작들에게서 놀아난 종북주의자들과 운동권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조, 종교, 군사에 쫙 퍼져있다.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 중 70여 명이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회 회장 출신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뜨겁게 외쳤던 민주화 운동이 점차 종북주의로 변질되고, 종북주의가 곧 사회주의로 물들었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모든 공직사회, 수많은 관변단체가 요소요소에 종북세력으로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호시탐탐 다시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꿈틀거리고 있다. 때문에 김일성이 깔아놓은 거짓된 종북조직을 훼파하고, 제 二의 독립운동을 다시 힘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나라답게 되지 않겠는가? 5년은 짧다!
글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총장, 전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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