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수께끼와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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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복을 ‘지혜의 언어’로 바꾸셔서 성경 안에 넣어...
<1:6>에서 “잠언과 비유”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뜻합니다. 갑자기 “잠언”을 왜 수수께끼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잠언”은 <1:1>에 나온 마샬(히브리어)이고, “비유”는 멜리차(히브리어)입니다. 멜리차는 ‘조롱하는 시ㆍ풍자시ㆍ비유’의 뜻이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이곳과 <하박국서 2:6>에 두 번 나옵니다…
[정이신 칼럼] 10. 수수께끼와 잠언 » ‘내가 바른길을 가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가 아니라, ‘내가 바른길을 가고 있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는 그분을 위해 고난받는 게 포함돼 있다고 했고, 이걸 크리스천의 특권이라고 했습니다(빌립보서 1:29).
바른길을 가고 있으므로 해서 받게 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잠언>을 통해 전략과 더불어 전술적인 눈을 기르십시오. <1:2∼3>에 있는 지혜, 훈계, 명철의 말씀, 정의, 공의(<새번역성경>은 “공평”으로 번역했습니다), 정직이 전략이라면, <1:4∼5>에 있는 슬기롭게 하고 분별력을 갖게 하며, 학식ㆍ지혜를 더 얻게 되는 일은 전술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둘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십시오.
하나님은 복을 ‘지혜의 언어’로 바꾸셔서 성경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너무나 평범하게 쓰여 있기에 이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보물인 지혜의 언어를 캐내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잠언>은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일반적인 게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자칫하면 이 말씀을 무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잠언>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깊이 연구해 보면 <잠언>도 꽤 어려운 철학적 인식론을 담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면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보는 일상의 모습이 포장지로 사용됐습니다. 우리가 포장지만 보고 실망할 필요도 없지만, 포장지를 잘 벗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포장지를 잘못 벗기면 안에 있는 내용물이 훼손됩니다.
<1:6>에서 “잠언과 비유”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뜻합니다. 갑자기 “잠언”을 왜 수수께끼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잠언”은 <1:1>에 나온 마샬(히브리어)이고, “비유”는 멜리차(히브리어)입니다. 멜리차는 ‘조롱하는 시ㆍ풍자시ㆍ비유’의 뜻이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이곳과 <하박국서 2:6>에 두 번 나옵니다.
<하박국서 2:6>에서는 이 단어를 “비웃는 시”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섣불리 성경이 비유로 기록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있는 비유를 해석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으면 안 됩니다. 이는 성경이 풍자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기록돼 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한 비유는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했던 게 아닙니다. 그러니 먼저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그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1:6>에 나와 있듯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양한 형태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은 노천광(露天鑛)처럼 읽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보물을 캐낼 수 있지만, 다른 말씀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걸 알기 위해서는 바위를 뚫고 깊이 판 후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성경이 너무 오래된 책이기에 굳이 이렇게 깊게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렇게 깊이 묻혀 있는 말씀은 인생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돌을 뚫고 들어가 그 말씀의 맥을 캐내는 걸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언>을 읽으며 우리가 알아야 할 건 인생 자체에 인간 스스로 조정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 조정할 수 있으면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영역이 우리 삶에 내재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로 살아갈 뿐이고, 출발한 곳과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하기에 광야나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주어진 시간을 끝내게 됩니다.
이런 조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살지 않고,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 받아야 내가 온 길을 알 수 있고,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나에 얽힌 비밀을 알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습니다.
“잠언과 비유”는 나에 대한 비밀을 풀어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게 풀어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게 하나님의 복이고 어떤 게 사탄의 유혹인지 분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복인 성령님의 열매는 단수이기에 겉모양만 다를 뿐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이 낳는 육체의 행실은 복수이기에 갈등하며 서로 싸웁니다(갈라디아서 5:19ㆍ22).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의 잘못이 용서되고, 저들이 훔쳐 간 내 몫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성령님이 보상해 주시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복을 모르고 내 복을 도둑질해 간 저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둑질했으니 심판받지만, 나는 예수님이 주신 부활의 은혜로 저들을 용서했기에 구원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글 정이신 목사/ 본지 칼럼니스트/ 아나돗 공동체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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