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잠언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1:7>은 <1장>의 핵심일 뿐 아니라 <잠언> 전체의 핵심…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말씀이 <1:7>입니다. <1:7>은 <1장>의 핵심일 뿐 아니라 <잠언> 전체의 핵심인데, 이 말씀은 <31:30>과 샌드위치처럼 닫힌 대구(inclusio)를 이룹니다…
[정이신 칼럼] 11. 잠언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 우리가 성경에서 말한 방식으로 사람을 선하게 대하면, 세상은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냐?’라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성경에서 말한 지혜의 방식인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게 수수께끼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잠언과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어와 내 가치를 바꿨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잡석(雜石)이었는데, <잠언>을 받아들이자 보석(寶石)이 됐습니다. 잡석에서 보석으로 바뀐 나를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궁금해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내 가치를 이렇게 바꿨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수수께끼를 낸다고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는 주님이 주시는 복의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령님의 은혜가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은 오해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잠언>이 주는 지혜와 복을 얻어 자신의 삶에 얽혀 있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말씀이 <1:7>입니다. <1:7>은 <1장>의 핵심일 뿐 아니라 <잠언> 전체의 핵심인데, 이 말씀은 <31:30>과 샌드위치처럼 닫힌 대구(inclusio)를 이룹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압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지만, 그 안에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거룩함으로 채워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그걸 소중하게 여깁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기 삶에 있는 하나님의 영역을 무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자유롭게 살게 됐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유와 전혀 상관이 없이 억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영역이 있기에 반드시 창조주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건 인간이 수행해야 할 창조목적 중 하나입니다. 이걸 거부하면 모든 걸 혼자서 책임지며 살아야 합니다.
아담ㆍ하와의 타락 사건 이후 모든 인간은 죄라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앞을 보지 못하거나, 심장에 이상이 있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는 건 이 장애를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를 예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치료제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와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으로, 성경은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14). 복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장애를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복음을 통해 눈을 떠보니 예전에 손으로 만져서 알던 것의 실체가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손으로 더듬어 촉감으로 그걸 이해했지만, 이제는 눈으로 그걸 봅니다. 눈을 뜨지 않았을 때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눈을 떠보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눈을 떠서 전체를 보고, 손으로 만져서 알던 때와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됐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대변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눈을 갖게 됐습니다(사도행전 9장).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처럼 부활의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눈을 갖게 되면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가치의 한계를 알고, 바람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고린도후서 4:18).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영역이 있고, 부활의 은혜로 돌아가는 영역이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영역은 눈에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역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구원받게 됐다는 역설처럼 인과응보의 시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온통 인과응보의 영역으로만 파악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신비를 알지 못하기에 인과응보로 해석되지 않는 현실이 나타나면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영역보다 우선하는 게 부활의 영역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무슨 의로 하나님께 구원을 약속받았습니까? 인과응보로 따지면 우리 중에 구원을 약속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과응보의 영역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너머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건 부활의 영역입니다. 부활의 영역을 모르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오해하게 됩니다.
글 정이신 목사/ 본지 칼럼니스트/ 아나돗 공동체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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