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종교정책하의 景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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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김규동 박사] 당의 종교정책하의 景敎 – <2회> »

3. 당의 종교정책하의 景敎 (Jing-Jiao Under Tang’s Religious Policy)
당대 이전부터 종교정책은 별다른 변화 없이 기존의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 나, 후일 황제의 신앙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당시의 국교로 정해지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당의 건국과 더불어 유가의 전통사상이 국가의 기본정책하에서 유지되었고, 이어서, 불교와 도교는 각기 발전하며 성숙된 종교정책으로 이어졌다. 수, 당시기, 정치와 종교정책 간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뤄지기를 바램에 이어서 서아시아의 3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마니교·景敎가 전해 들어왔다.
이러한, 포용적인 문화와 종교정책의 영향하에, 각 종교는 충분한 발전을 가질 수 있었기에, 불교는 이 시기에 크게 발전하여 중국식 불교종파를 이룰 수 있었다. 각 종교교의와 철학 역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비약의 발전을 가져와, 유·도·불교 이외에도 당은 서역에서 들어 온 삼이교(三夷敎)와 이슬람교에게도 관용적인 태도를 베풀어줬다. 이는 외국 상인과 대사, 이민자들의 서로 다른 종교 신앙마저 존중해주어 다양성의 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정책이 당의 중기 이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용정책으로 인해 당의 무역과 영토 그리고 문화에 이어 각 종교 간에는 각축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 실크로드의 종교와 중국 토착종교는 당 이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순수한 종교성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빠르게 전파되는 세속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에는 종교와 신앙체계는 다양한 세속적 문화와 타종교와의 연합이어우러지면서 이전보다 훨씬 화려한 종교적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는 자신들의 교세 확장을 위해 상대 진영 특유의 신비로움을 빌려다 사용하기도 했고, 景敎 역시도 불교와 도교의 종교 술어와 예배형식을 따라 하기도 했다.
당대의 종교정책은 다민족 정책에 포함되었다. 종교 사무를 맡은 홍려사(鴻臚寺)는 실제로 외교 관공서였다. 당대에는 스스로가 노자(老子)의 나라라고 여겼기 때문에, 역대로 노자를 섬겨 온 도교를 보호하였다. 동시에 수나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외부에서 들여온 불교를 이용해 통치를 강화했다. 이리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각 나라의 모든 종교는 당 왕조의 환영을 받았다.

4. 景敎의 선교정책 (Jing-Jiao Ministry Policy)
1) 상층부 선교(Upper-Class Ministry)
초기 景敎徒들은 황실의 호감과 그 중요성을 체험했기에 쉽게 정착 할 수 있었고,바로 정치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 선교활동이 보다 쉽게 이뤄졌다. 그들은 상층부를 향한 전도를 이루기 위해 황제에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바쳐 환심을 사고 황실에서 인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략도 중요했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나 한계에 부딪히면 서로 간에 비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이를테면, 다음 황제로부터 총애를 잃게 되면 곧바로 치명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더욱이 아시아의 각나라들은 대체로 그러한 정치적인 논리와 구조 속에 있었기에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景敎의 성직자들은 거의 모두가 외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신도들도 대체로 서역이나 중앙아시아인들이 대다수였고, 어떻게 하면 중국인들이 이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처음부터 고려함이 없었고, 경전의 구절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 오히려 사대부 계층에게만 적합했을 뿐이었다.
2) 의료선교(a Medical Ministry)
둘째로, 景敎徒들이 중국문화에 그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배경은, 그들의 의료선교사역이 서역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크게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술은 당대 페르시아의 뛰어난 의술을 바탕으로 그들의 선교전략에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의술에 매우 능숙하며, 특히 안과와 소화기 내과에 특출했다고 史記에 기록되었다.
당고종의 전담의사 진명학(秦鳴鶴)은 683년에 고종의 안질을 고쳐주었는데, 백회혈(百會穴)에 침을 놓아 피를 빼줌으로써 고종의 눈이 다시 볼 수 있었다. 이런 의술은 페르시아 동방기독교 의술체계이며, 景敎의 의학에 기록된 “두개골을 열고 눈을 낫게 하는” 의술에 기인하는 것이다.
740년 강국(康國)의 景敎徒들은 향로와 수정으로 만든 안약을 만들어낼 정도로 景敎徒들은 안질 치료에 아주 능숙했음을 증명했다.
당현종 때, 景敎 선교사 숭일(崇一)이 현종의 형 이헌(李憲)의 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영왕헌(寧王憲)이 …… 과연 죽었다”라고 양황제헌전(讓皇帝憲傳)에 나온다. 참고로 그 전문을 보면 이헌이 11월에 죽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11일 이다.
“二十八年冬 憲疾…… 二十九年冬 京城寒甚凝霜封樹 時學者以爲 春秋雨木氷
卽此 是亦名樹介 言其象 介冑也 憲見而歎曰 此俗謂樹稼者也
諺曰樹稼達官怕 必有大臣當之 吾其死矣 十一月薨時年六十三”
또한, 景敎 의사들은 당조 고관들이 입었던 관복을 입고 의술을 집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그들이 불교 승려들의 옷차림이 아닌 관정이 정한 비포어대(緋袍魚袋)를 착용했다는 걸로 알수 있다.
667년에 景敎徒들은 당고종에게 테리아카(Theriaca)를 바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만능 해독약이다.
테리아카는 B.C. 3세기 초 로마에서 자주 사용했던 각종 독성감염으로 심각해진 상처를 즉각 치료할 수 있는 해독약이었다.
후에 폰투스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King of Pontus)도 그것을 만능 해독약으로 정하여 사용되게 했다. 바로 이런 약이 景敎徒들에게서 전해진 것이다.
景敎徒들의 기타 의학 관련 내용의 일부가 史記에도 기록되어있다. 예를 들면, 철경록(輟耕錄) 제9권에 장공주(長公主)의 부마(駙馬)가 낙마사고로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렸는데, 모든 의사들이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景敎徒 섭지아(聶只兒)의 치료로 금방 완치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에 관한 같은 내용이 산거신화(山居新話)에서도 언급되었는데, 원대 갑무년 3월 29일에 그들이 관청에서 모임 중에 있을 때, 광혜사(廣惠司)를 전담하는 섭지아가 듣기를: 작년 상도(上都)에 황제의 여동생의 남편(駙馬) 剛哈刺咱慶王이 뜻밖에 말에서 떨어져 일으켜보니, 이미 무의식 상태로 두눈에 검은 눈동자가 없고 혀는 가슴까지 내려왔는데 의사들이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司卿 섭지아가 치료법을 알고 있다 했다 하며, 가위로 그 혀를 잘라 보관하도록 하고, 남은 혀를 다시 구강으로 말아넣어 그 위태한 생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원대 景敎徒 중에 또 한 명의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애설(愛薛)이다. 그는 의술에 뛰어나고 천문학까지도 잘했다. 이를 안 당시에 원세조는 그가 조정을 방문할 시 친히 어의대(御醫隊)와 의장대에 애설을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릴 만큼 그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보여준다.
두환(杜環)의 경행기(經行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大秦善醫眼與痢, 或末病先見, 或開腦出蟲(대진의 명의는 눈병과 이질 등을 잘 치료하고, 병이 발생하기 전에 먼저 이를 알고 예방하며, 뇌를 수술하여 벌레 등을 제거했다.)”
위의 기록을 통해 근대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의술이 전파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景敎 선교사들이 안과, 내과, 외과와 예방학까지 겸비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비록 景敎 의술은 어떠한 의서도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지만, 역사상 서역 의술의 발전이 중의학에 상당한 영향을 줬음이 명백하다.

실크로드상의 동·서교류에는 무역과 정복전쟁 뿐만 아니라, 질병도 퍼뜨려졌다. 당시, 동방기독교의 의료선교 활동이 얼마나 중요했고 환영 받았는지 대충 짐작 할 수 있다.
3) 경전번역(Christian Scripture Translation)
당태종은 알로펜이 중국에 입성한 후, 그의 경전번역을 돕기 위해 藏書樓를 세워주었으며, 덕종 때는 경정에 의해 景敎碑의 비문을 쓰게 하였는데, 그는 덕종 貞元 초년에 장안의 대진사에 머물며 번역 일에 몰두하였다.
신학자 경정은 시리아어 주석《敬禮常明皇樂經》,《宣元至本經》,《志玄安樂經》,《天寶藏經》,《多惠聖王經:시편》,《阿思瞿利容經:복음서》,《渾元經:창세기》,《通真經》,《寶明經》,《傳化經:사도행전》,《述略經》,《三際經》,《寧思經》,《宣義經》,《師利海經:사도신경》,《寶路法王經:바울서신》,《三威贊經》,《牟世法王經:모세오경》,《伊利耶法王經》,《啓眞經:요한계시록》,《刪河律經:스가랴서》, 등의 기도문 등 예배와 관련된 서적 32권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비록 이들 경전과 시가집에 자주 불교와 도교의 명사와 비슷한 문구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일부 景敎인들은 경전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국무와 군사행동 참여(State and Military Action Participation)
景敎 비문에 “有若僧首羅含。大德及烈。並金方貴緒。物外高僧。共振玄綱。俱維絕紐”이란 내용을 보면 景敎 선교사 羅含, 及烈이란 인물이 알로펜에 이어서 중국에 들어옴을 알 수 있다(冊府元龜).
또한, “개원 20년 9월에 페르시아 왕이 潘那密와 대덕 주교 及烈(가브리엘)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及烈은 무후 시기의 景敎 수장으로 開元은 현종의 연호로 그때가 무후 이후 몇십 년 뒤의 일로, 대략 주교 及烈이 귀국한 후에 현종 때 다시 중국에 온 것을 의미한다.
숙종 때 景敎 수사 이사가 곽자의의 군사 임무에 참여하였다.
“伊斯。和而好惠。聞道勤行。遠自王舍之城。聿來中夏。術高三代。藝博十全。
始効節于丹庭。乃筞名于王帳。中書令汾陽郡王。郭公子儀。初總戎于朔方也。
肅宗俾之從邁。雖見親于臥內。不自異于行閒。為公爪牙。作軍耳目”
이를 통해 景敎徒 중에서도 일부는 군 복무 일에도 참여했고, 일부는 이 일을 통해 조정의 신임을 얻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여, 중국 경내에서 오래도록 선교를 이어나갈 참이었다. 이에 景敎는 조정과의 관계에 노력했음이 선교의 주요 전력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5) 자선(Charity)
이사는 가난한 자와 헐벗은 자, 그리고 병든 자를 돕는 등 여러 자선활동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의 헌신으로 景敎의 입지가 한층 더 공고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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