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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저널=김수길 선교사] 그리스 이야기(4) » 아름다운 도시 데살로니키 »
아침의 일출보다 저녁 일몰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운 도시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곳에 살고 있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사도 바울이 이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 거리에서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켰다. 이 소란으로 사도 바울을 도왔던 야손 일가가 구금되고 바울은 에그나티아 도로를 이용해 이웃 산간도시 베뢰아로 피신을 하게 되는 영예롭지 못한 무대이기도 하다…

건너편 제우스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올림퍼스 산 너머로 해가 지면 그 잔 여울은 테살로니키 앞바다인 데르마이코 만에 붉게 투영되어 온 바다와 하늘이 붉게 물들 땐,,, 길가는 여행객이 아니라 할지라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던 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2 세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한 부인이 딸아이를 낳은 날 마케도니아의 군대는 그리스 중부 뎃살리아인과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그날 테살리아를 이긴 것을 기념하여 그 아이 이름을 테살로니키 즉 (데살리아와 싸움에서 이겼다)라고 지었다.
훗날 이 아이는 알렉산더의 헤롤로이였던 카산드라 장군에게 시집을 가고 동방 원정에 동행했던 카산드라는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에 섭정으로 있던 아버지 안티고누스와 함께 안티고누스 왕조를 세운다. 왕조를 설립 할 때 많은 반대파를 제거한 피 냄새가 절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를 대신 할 새로운 수도를 만든다. 그리고 그 도시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내의 이름을 따라 “테살로니키”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 후 로마의 실권자로 등극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세금이 감면된 자유도시, 일급도시로 선포되었다.
상업에 뛰어난 유대인들은 세금이 감면된 이 도시에 몰려들었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이어 제국의 문화 경제적, 수도로 인정받으며 1000 여 년 동안 부귀와 번영을 누렸던 도시이다.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오늘날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이어 상주인구 110만 명이 넘게 살고 있는 국제도시이다. 부와 명예를 소유한 테살로니키는 오랫동안 에게 해의 진주로 자리를 잡아왔다.

아름다운 도시와 슬픈 역사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는 북 그리스의 중심 도시이다. 이 도시의 고유한 이름보다도 더 좋아는 별명이 있다. 테살로니키가 동로마 제국 시대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상업적 도시였기 때문에 제국 공동 수도(Συμβασιλεύουσα)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그냥 테살로니키가 아닌 이 별명을 더 좋아한다. 제국의 공동수도 ‘심바실레부사’ 사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제국 시대부터 제국의 상업적 수도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 못했을 때, 방어가 허술한 테살로니키를 대신 공략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도시는 제국의 수도보다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 3세기경에는 고트 족의 계속된 침입을 굳건히 막아낸다. 로마제국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 갈렐리우스(Γαλέριος)는 이곳에 그의 황궁과 그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이긴 개선문을 만들었다. 사후를 대비하여 무덤을 만들었지만 그의 바램대로 무덤은 되지 못하고 교회로 사용된다. 나중에 터키인에 의하여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된다. 이 때 데살로니가의 수호성인이 된 성 디미뜨리우스(Δημήτριος가 순교를 당한다. 324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마지막으로 리키니우스(Λικίνιος)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군사력을 집결시킨 곳이다.

6세기와 7세기에 여러 차례 이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앞서 말했듯이 비잔틴 제국의 힘이 약해질 때 불가리아인, 노르만족, 베네치아와 라틴인 들이 이 도시를 침략해왔다. 904년 사라센 족의 침입에 의해 약 22.000명의 주민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 뒤 오스만 튀르크에게 끝없는 침략을 당하다 1423년 이 도시를 탐내던 베네치아 공국이 짧은 시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1430년에 오스만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점령되어,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1492년에 스페인의 영토수복전쟁(πόλεμος εδαφικής κατάκτησης)레콘키스타로 쫓겨난 약 20.000명의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보다 먼저 이곳에 온 바바리아 지역의 유대인들과 합세하여 16세기에는 테살로니키는 가장 중요한 유대인거주지가 된다. 1821년에 그리스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테살로니키에서도 독립전쟁에 참여하지만 크레데와 동일하게 무자비한 피의 탄압을 받게 된다.
1912년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그리스가 다시 차지함으로 1913년에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 1923년부터 터키의 소 아시아지역에서 피난 온 그리스 계 주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슬픔을 대신한 아름다운테살로니키로 태어난다.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카 서신들
신앙인들에게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보다도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 여행 중 이곳에 와서 많은 활동을 하였던 것이며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여 보낸 곳이다 .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곳에 살고 있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사도 바울이 이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 거리에서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켰다. 이 소란으로 사도 바울을 도왔던 야손 일가가 구금되고 바울은 에그나티아 도로를 이용해 이웃 산간도시 베뢰아로 피신을 하게 되는 영예롭지 못한 무대이기도 하다.
당시 유적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전쟁과 화재, 지진 등으로 인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복원과 발굴 등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 하였던 사도 바울의 고난의 흔적이 서려있는 옛날 로마시대의 시장터를 오래 전에 새롭게 생활박물관으로 단장하고 이곳 성지를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많은 발걸음으로 분주 했을 저자거리에 들어서면 한 영혼을 위하여 외치는 사도 바울의 외침과 그들 모함하여 소란케 하였던 무리들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저자 거리는 사도 바울시대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당시생활 양식을 전시해 놓아서 20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바울사도의 당시의 데살로니카를 만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발굴되었던 많은 유물들은 데살로니카 고고학 박물관에 대부분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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