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호랑이를 만나도 지혜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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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정이신목사] 30. 호랑이를 만나도 지혜가 있으면 »
악인들의 길… 저런 길을 가는 사람의 마지막은…
<잠언 2:13∼15>은 악인들이 가는 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두운 길로 가고, 나쁜 일을 하기 좋아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을 즐거워하고, 비뚤어진 행실을 일관되게 하는 것이 악인들의 길입니다. 저런 길을 가는 사람은 평생 남을 미워하다가, 남을 헐뜯고 모함하다가 생을 마감…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배웠다고 해서 세상에서 갑자기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귀해지는 기쁨은 누릴 수 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을 가꿔 아름다워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 보석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때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랑보다 분노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화가 나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해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재난대비훈련을 하는 것은 긴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분별력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2:1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내가 가진 능력으로만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인 경우가 많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정신을 차리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나 그림자만 보고도 지레 겁을 집어먹고 졸도합니다.
<잠언>에서 말한 악한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2:12).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잠언>에서 말한 악한 사람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요구하는 정욕의 길이나 처세술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돈을 버는 과정에서 자신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정욕 덩어리, 죄 덩어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길은 아무리 따라가도 우리를 귀하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는 단어 중 하나가 ‘에메트(히브리어: 진실ㆍ진리)’인데, 에메트는 히브리어 자음 중에서 가장 처음 자음인 알렢, 한 가운데인 멤, 맨 마지막에 있는 타우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에메트는 처음과 중간 끝이 같다는 속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알파와 오메가처럼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같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 처음-중간-끝이 같습니다. 이와 달리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정욕을 따르기 위해 주님께 반항합니다. 욕심 때문에 구부러진 마음을 바로 펴서 처음과 끝이 같게 하지 않고, 처음과 끝이 다른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삐딱하게 봅니다.
저들은 그렇게 구부러진 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을 내려놔야 하기에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이비ㆍ이단의 교주들은 자신들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을 깨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리는 것에 왜 판을 깬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리고 그 판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모든 사이비ㆍ이단 교주가 저들의 시작은 예수님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은 예수님이 사라지고 저들의 욕심만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예수님이 역사하신 게 아닙니다. 시작은 예수님의 영이었는데, 끝은 육신 쓴 하나님이라고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포장하는 것은 저들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2:13∼15>은 악인들이 가는 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두운 길로 가고, 나쁜 일을 하기 좋아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을 즐거워하고, 비뚤어진 행실을 일관되게 하는 것이 악인들의 길입니다. 저런 길을 가는 사람은 평생 남을 미워하다가, 남을 헐뜯고 모함하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일이 작은 게 아닙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내게 부활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 용서입니다. 그가 알든 알지 못하든, 그가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처럼 예수님을 빙자해서 사람의 영혼을 장사 품목으로 취급하는 ‘바빌론의 영혼 장사꾼’(요한계시록 18:13)이 아니라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게 용서입니다. 나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어차피 그는 그렇게 생각할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알았다고 해도 그는 사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기에 사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은혜로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용기 없는 그의 삶이 아닌 평화로운 나의 삶을 위해서 내가 먼저 마음을 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를 용서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는 부활의 눈이 꼭 필요합니다. 부활의 눈이 없으면 그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가 정식으로 사과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는지 궁금증만 생기고 화만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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