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景敎와 타 종교와의 관계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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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김규동 박사] 당대 景敎와 타 종교와의 관계 <1회> »
the Relationship between Jing-Jiao and other Religions during the Tang Dynasty
7~11세기 실크로드 상의 다문화의 발전은 당왕조의 번성과 관용적 종교정책 덕분이었다. 당조가 가장 번성했을 때 관할 직할하의 변경지역은 “동쪽으로는 안동(安東), 서쪽으로는 안서(安西)까지이며, 남쪽으로는 안남(安南)과, 북쪽으로는 單于府까지, 즉 남북쪽으로는 漢나라와 비슷하고, 동쪽으로는 막혔지만, 서쪽으로는 영토 면적이 그 전보다 훨씬 확장되었다.

국가의 위세가 막강해지자, 곧이어 변방 국가들의 조공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는데, 특히 서역의 여러 민족들은 당의 통치자를 향해 “천하의 칸(天可汗)”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당은 타민족에 대한 예우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였기에 개방적인 정책 덕분이었는지 다른 서역의 종교인들이 너도나도 낙타의 방울소리를 울리며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당의 번영과 함께 각종 종교도 더불어 번성하는 정황이 곳곳에 나타났는데 비록 이 종교들은 나중에 여러 차례 좌절을 당하기도 했지만, 7~11세기 당의 역사현장에서는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들 景敎가 중국 땅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 타 종교와의 공존을 이루었는지, 오늘날 기독교와 타 종교간의 관계에 있어 흥미로운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7~11세기의 중국 다문화 발전을 연구하는 것은 좀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에, 본장은 景敎를 중심으로 중국 토착종교인 도교와, 또한 정권과 완전히 일체화가 된 유교, 그리고 토착화에 성공한 불교, 그리고 서역에서 새롭게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이슬람교 등 4자 사이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동방기독교(景敎)의 중국에서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좀 더 명백한 인식과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景敎와 도교와의 관계(the Relation between Jing-Jiao and Taoism)
도교는 민간신앙으로써 전형적인 중국의 대표 종교라 할 만큼 역대 중국인들에게 줄곧 영향을 미쳐왔다. 당은 도교의 시조인 이이(李耳, B.C. 571~471)를 교주로 모셨기에 특히 도교를 중시하였다. 당시 전국에는 도교사원이 1,900 여채로 도사는 15,000 여명이나 있었다. 이는 당대 도교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는 景敎가 좀 더 쉽게 중국인들 사이에 파고들기 위해서는 도교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그럼 이 둘의 관계는 어땠는가?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景敎와 도교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고 평화로웠지만 가끔 불화도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일찍이, 蔡鴻生는 중국에 전래된 三夷敎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기를 “마니교는 異端化, 조로아스터교는 民俗化, 景敎는 醫術化”로 각각 그들의 특징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바로 景敎 성직자들의 의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陳垣는 이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바탕으로 말하기를 “景敎는 그 때 당시 어떠한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오래전부터 의술로 영향력을 미치고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당서(唐書, 諸王傳)에서 숭일(崇一)이라 불리는 선교사가 당현종의 형을 치료한 기록과 함께 景敎徒의 의료선교는 많은 증거가 있다. 과거 기록에도 의하면, 네스토리우스파가 의학으로 유명하였다.”
물론 의료선교를 통한 景敎의 토착화를 위한 적응의 대안이기도 하고, 의술을 잘하는 것도 역시 기본적으로 선교를 위한 구원사역의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에 의술화가 景敎徒들의 사역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인 것이 분명했다.
구원이란 영어로는 “Salvation”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인 “Salus”로 건강이란 뜻이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주된 방식은 바로 아픈 자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치유사역의 영향을 받은 景敎 성직자들은 “의술을 잘한다”는 것이 몸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료선교의 기술”은 모든 景敎 성직자들의 필수적인 사역도구와 능력의 범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의학계에서도 의술의 비중이 도교 문화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景敎는 의술을 통하여 도교와도 긴밀한 교류가 가능했다. 이는 당대 도교 의학 저작인 천금익방(千金翼方)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이질을 치료하는 패산탕(悖散湯)이란 처방이 있는데 그 뒤에서 같은 시대의 사람인 장담(張澹)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장담은 “페르시아와 대진은 이 패산탕이란 처방법을 매우 중요히 여긴다”. 손사막(孫思邈)이 이 말을 명확히 기록하는 것은 이 처방의 출처를 강조하면서 이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진의 景敎와 도교가 의술에 있어서 서로 교류와 연구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고 평화의 길을 열어 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후일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서로 간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가장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무종의 “회창멸불(會昌滅佛)”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회창멸불”의 실질적인 도화선은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본다. 물론 무종의 본심은 景敎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여파로 景敎의 복음전도 사역마저 금지당했으며, 중원 지대에서의 복음전파에도 중대한 위기를 맞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홍콩의 역사학자 羅香林는 “여조(呂祖)와 景敎의 관계”를 분석함을 통해 景敎를 믿는 한족 사람들이 “금지령이 반포할 때마다 여조파는 景敎 성직자들을 도교 내부에 숨겨주며 비밀리에 활동을 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景敎의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도교 여조파(呂祖派)에 미쳤다. 만약에 羅香林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景敎과 도교의 관계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景敎 전도가 금지되긴 했지만, 도교는 여전히 景敎 신도를 비공식적으로 보호해줬다.
그다음으로는 景敎의 경전을 보게 되면, 景敎가 한문 경전을 번역하는 데 도교 용어와 사상을 자주 빌려 썼다. 景敎 비문 시작 부분에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서술이 바로 도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비문이 “粤若. 常然眞寂. 先先而无元. 窅然靈虛. 後後而妙有. 總玄樞而造化. 妙衆聖以元尊”, 그리고 “无元眞主”, ”眞常之道,妙而難名”,“詳其敎旨,玄妙无爲” 등이 있다. 이들 표현이 도교 용어와 매우 흡사하였다.
비문 중 일부 표현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의 이야기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宗周德喪,青駕西升. 巨唐道光,景風東扇”인데, 그 뜻은 老子가 周나라 말기 붕괴 직전의 형국으로 인해 푸른 소를 타고 서쪽으로 갔는데, 唐이 번성할 때 景敎가 동쪽으로 오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도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景敎의 또 다른 경전인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의 형식이 비교적 불교 경문이랑 매우 흡사하지만 사상 표현에 있어 도교와 매우 비슷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시가(彌施訶)가 잠온승가(岑穩僧伽)에게 설교했을 때 “凡脩勝道 先除動欲 无動无欲 則不求不爲 无求无爲 則能淸能淨”이라고 하였다. 여기의 “무위(无爲)”사상은 도교의 “무위(无爲)”랑 매우 비슷하였다.
景敎는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을 때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도교의 종교적 용어를 사용함으로, 중국인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 데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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