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 통일의 교훈과 동서독 교회의 역할
[시사칼럼=Dr. Elijah Kim] 동서독 통일의 교훈과 동서독 교회의 역할 »
동서독의 통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박근혜 전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입니다”가 크게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통일만 되면 대한민국은 G7 뿐 아니라 G3 또는 G4가 된다고 부추기는 낙관론자도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을 이룰 때, 우리에게 통일은 금방이라도 다가올 정도로 언론은 임박한 통일 기사로 도배를 한 적도 있습니다. 현재 남북한 사이에는 서로 간의 교류와 협력은 커녕 적대적 관계는 완화되지 않고 도리어 전쟁과 핵무장의 위험도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들어가는 글
할슈타인 원칙 폐기부터 디아코니아 재단의 헌신적인 인류애와 서독 교회의 전폭적인 동독교회 지원 그리고 빌 브란트로부터 시작된 동방정책, 현대판 출애굽에 해당하는 정치범과 그의 가족들 25만명을 구출한 ‘프라이카우프(Freikauf)’작전 그리고 동독 교회들의 성숙과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기도회를 비롯한 수많은 기도회들이 결국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 독일이라는 거대한 행보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동서독은 서로 분리되어 체재 경쟁속에 데탕트를 유지했음에도 동서독 교회는 하나됨을 유지하며 차근 차근 동서독 통일을 위한 교두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종전 70주년이 되는 2023년 벽두에 동서독 통일에 크나 큰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세기에 있을까 말까 한 실수가 발생한 기자회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휴가에서 갓 돌아 온 서독 사회주의 정부 대변인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 )의 여행 자유화 발언에 의해서 입니다. 지루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기자회견 내내 어떤 기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나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탈리아 기자가 질문한 여행 자유화에 대한 질문을 답변하는 가운데 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사건, 즉 여행 자유화가 “지금 바로” 시작된다고 한 언급이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기자 회견 내용 중 ‘완전한 여행 자유화’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동서독 당사자들 그리고 지구촌의 긴급 뉴스로 타전 되면서 급기야 밀려오는 군중 앞에서 베를린 검문소의 문이 열리고 이어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됩니다.
동독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열망은 자유에 대한 희구 그리고 독재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동독 전역의 대규모 시위에 대하여 동독 공산 정권은 어떠한 해결 방안을 내어 놓아야만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 뿐 아니라 서독에서 동독으로 가는 국경이 봉쇄되자 서독인들은 이웃국가인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체코의 국경을 넘어가게 되고 그곳에 있는 대사관을 통하여 동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이웃 나라를 통한 입국으로 인해 동독 정권의 국경 봉쇄가 무색하게 된 것입니다. 동독 주변의 이웃나라들이 서슴없이 국경을 열어 준 것은 오랜 시간 서독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통해 동독을 도울 뿐 아니라 동독을 돕는 이웃 국가들도 인도주의적 지원을 아끼지 아니한 것에 기인합니다. 특히 1989년 동독 전역에는 동독 사회주의 체재를 반대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했습니다.
동독보다 앞서 소련은 1989년 여행법을 완화했는데 동독 정부도 같은 맥락에서 여행법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게 됩니다. 휴가에 갓 돌아 온 정부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여행완화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여행완화법이 아닌 “완전한 여행자유화”가 지금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몇 세기에 걸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뉴스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다시금 전달된 서독과 동독 주민들은 그날 밤 자정을 기해 베를린 장벽으로 모여 들어 장벽을 부수면서 베를린 장벽은 마침내 무너지고 맙니다. 망치 및 기타 도구, 그리고 중장비를 동원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정부 대변인의 실수가 우연히 던져진 질문에 의해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정작 실제적 베를린 장벽을 허물게 된 것은 이 모든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뉴스를 전한 오보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수와 우연 그리고 오보가 어우러져 베를린 장벽을 헐게 만든 것입니다.
동서독 통일과 그리고 우리의 염원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어진 통일 논의 그리고 실제적 독일 통일을 이루기까지 인류는 생방송으로 진행된 베를린 장벽 붕괴의 모습을 20세기에 가장 감격스러운 감동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연일 핵실험을 계속하며 쏘아 대는 핵미사일은 한반도 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에게 전쟁의 공포감을 주고 평화를 원하는 인류의 여망을 저버릴 뿐 아니라 한반도에 일어날 통일에 대한 소망의 여지조차 꺾어 버리고 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남북한 뿐 아니라 먼저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리되고, 냉전 체재인 데탕트에 들어가면서 서독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거나 도움을 주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제한을 가하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진행합니다. 서독 빌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20여년 이상 좌우 정권이 바뀌어도 그 기조를 변치 않고 유지하였고,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 기도회는 평화적인 시위로 발전하면서 자유를 열망하는 동독인의 의지를 표출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앞서서 동서독의 화해의 장을 마련함으로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집니다. 그 누구도 이토록 빠르게 그리고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통일이 앞당겨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33년 전 일어났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통일을 열망하는 우리에게 통일은 우연히 또는 동독 기자회견장의 서기의 실수로 촉발된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인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닌 인류애 속에 동서독 국민 간에 유지되어진 “독일인은 하나다!”라는 형재애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제 한반도 통일을 가늠하며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동서독 교회 간의 교류를 통해 교회가 통일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아 베를린 장벽!
태평양 전쟁에 대하여 항복을 선언한 일본으로부터 얼떨결에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에 의하여 개최된 얄타회담에 38선이 그어짐으로 분단을 맞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2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독일도 승전국에 의해 강제 분단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의 동부 지역은 소련이 점령하고 서부 지역은 미국과 영국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1948년 프랑스는 비조니아 조인하여 미국 그리고 영국 그리고 소련과 함께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습니다.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의 인구는 나머지 세 개 지역 인구의 4분의 1 정도였습니다. 서방 점령 지역이 분할 된 것처럼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도 분할됩니다. 서방 점령 지역은 1949년 5월 23일 잠정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Grundgesetz)’을 공포하고, 1949년 9월에 독일연방공화국(BRD, 서독) 수립하게 됩니다. 소련 점령 지역도 1949년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 수립을 선포함으로 이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미국의 마셜 플랜에 따라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지만 외교적으로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천명하고 동독 불승인 정책을 결행합니다.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
서방 점령 지역에 세워진 민주 정부인 제1기 정권 아데나워 집권시기(1949-1963)는 실로 미국과 소련 양측 간에 벌어지는 냉전 대결 시기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서독은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고 자유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내겁니다. 이는 해방 후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걸어 온 길과 매우 흡사합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새로운 경제 건설과 부흥을 꾀하게 됩니다. 서방 지역은 소련의 계속되는 팽창을 저지하고 민주 진영의 단결을 위해 ‘할슈타인 원칙 (Hallstein Doctrine)’을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동서독의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 옵니다.
할슈타인 원칙은 일종의 동독 봉쇄 정책입니다. 선거에 의해 수립된 민주 정부인 서독의 독일 연방은 유일한 합법 국가이기에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대독전승국인 소련만은 이 원칙에서 예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사람은 당시 외무장관 할슈타인(Walter Peter Hallstein)이었고 그의 이름을 따라 할슈타인 원칙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서독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CDU)도 할슈타인 원칙을 반공 외교정책의 축으로서,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에 적용하였지만 1967년에는 루마니아와의 국교 재개합니다. 이어서 1968년에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관계 재개하고, 그리고 브란트 정권 수립에 의한 동서독 수뇌회담의 실현(1970) 등으로, 이 원칙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서독을 둘러싼 냉전시대
비록 동독과 서독이 각각 다른 체재로 국가를 수립했으나 베를린에 국경선을 긋는 장벽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서독 분리 12년 만에 베를린에는 도시를 가르는 커다란 장벽이 세워집니다. 할슈타인 원칙과 궤를 같이하는 서유럽 국가들은 1949년 4월 북대서양 조약 기구 탄생 (NATO)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소련 주도로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 (Warsaw Pact)도 탄생하여 소련과 함께 알바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공식 군사 동맹을 결성함으로 동서로 분리된 양진영은 치열한 냉전 즉 데탕트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동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진영의 대립 가운데 후르시쵸프 (Khrushchev)는 “베를린은 서방의 고환이다”라고 말하며 서방이 비명을 듣고 싶을 때마다 쥐어 짤 것이라고 했습니다. “Berlin is the testicles of the West. Every time I want to make the West scream, I squeeze on Berlin.’ 문제는 동서독 분단은 서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954년에 동독인 184,198명이 서독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탈출 행렬은 1960년까지 그치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듬해인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집니다. 이때까지 하루에 약 800명씩 국경을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로서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28년 동안 동서독 분단의 극명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를 가로막았던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무너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토록 드라마틱하고 온 인류를 흥분 시켰던 뉴스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책임을 지우고 다시는 강대한 독일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승전국들은 독일을 동서독으로 분할합니다. 1949년 독일의 서쪽에는 독일연방공화국(Bundersrepublik in Deutscheland, BRD)이,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이 각각 수립되었습니다. 동서독을 경계로 양쪽에는 미국과 서유럽 등 서방측 민주주의 체재가 있고, 동독 측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체제국가들이 들어서면서 냉전 즉 데탕트 시대를 엽니다. 공산주의 체제에 신음하는 많은 동독주민들이 20만명이나 목숨을 걸고 탈출하자 동독 사회주의 정부는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합니다. 이러한 베를린 장벽이 28년 만에 무너지면서 동독 사회주의 정권도 붕괴되고 동서독 통일이라는 대하드라마의 막을 열게 됩니다. 베를린 장벽이 처지기 이전에는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것은 매우 쉬웠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양국간 국경은 강화되어 자유로운 왕래가 통제된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8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독과 동독이 하나되는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여전히 민주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재의 정권이 유지되고 있어서 양국간 실질적 통일이 필요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이어진 동서독간의 합의에 의해 1990년 6월 30일에는 동서독 화폐가치 4대 1일임에도 불구하고 화폐 통일을 이룹니다. 양국 간에 통일을 위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동서독 통일은 굳게 닫혀 있는 구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과 민주주의 체재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공산주의는 동유럽과 구소련 지역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여러 공화국으로 독립이 이루어지고 소련의 전신으로 남게 된 러시아 마저도 민주주의 체재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공산주의 종언으로 중국과 북한 그리고 동남아의 공산국가들의 체재가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도 급물살을 탔습니다. 동서독 통일과정을 보도하던 매체들은 당장이라도 남북한의 통일이 목전에 다가 올 것처럼 보도하기에 바빴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접하는 국민들도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3년이 지났건만 통일은 요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남북의 대치상태는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이며, 지구상 많은 나라들 가운데 이토록 38도선 군사분계선을 마주하고 중무장하여 대치하고 있는 나라도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합니다. 여전히 북한은 재래식 무기로는 남한과 상대가 되지 않기에 비대칭 무기 즉 생화학무기, 전략 및 전술 핵무기, 전략핵 잠수함 그리고 우리가 대처하기에 매우 어려운 장사정포로 남한을 일거에 적화통일할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대한 사상 공격과 간첩 활동을 통하여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일들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동서독이 통일 된 이후 가장 놀랍게 발견한 것은 통일 당시 동독이 조종한 동독비밀경찰 슈타지(Stati)에 의해 서독에 활동하던 비밀첩자만 해도 2만에서 3만에 달함이 밝혀졌습니다. 남한 사회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유럽과 구소련의 많은 국가들의 독립과 민주화 과정에 반하여 중국과 북한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은 개혁은 허락하되 체재는 공산주의를 더욱 더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적성국가로 여겼거나 또는 공산주의 국가로 분류하던 많은 나라들과 수교하였습니다. 신북방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중국 및 동남아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입니다. 이러한 장미 빛 평화 프로세스 가운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대미문의 20세기 말 홀로코스트라 할 수 있는 고난의 행군이 북한의 동토를 강타합니다. 압록강을 건너 목숨을 걸고 먹을 것을 구하러 넘어 온 끝도 없는 탈북자들의 행렬은 한국전쟁 이후 평화시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북한에는 인류가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기근과 기아 그리고 죽음의 행진이 진행되었고, 기아와 기근으로 아사자들이 발생하는 곳마다 괴담이 흉흉하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꽃제비가 되고, 인육을 먹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 될 정도로 기근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저는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되던 그 시기에 압록강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를 보고, 그리고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고난의 행군의 실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남한을 보며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모릅니다. 오직 이념의 시각으로만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 사회에 대하여 형제의 고통을 보며 외면하지 않고 기독교 인류애를 통해 극복했던 서독교회의 모습을 반추하며 한 없는 부러움과 동시에 남한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북한에 고난에 행군이 시작됨으로 김일성 김정일 유일체재가 곧 무너질 것처럼 예상되었으나 도리어 북한의 고립과 체재 봉쇄는 더 강화되었고 김일성 김정일 체재는 고난의 행군의 거친 파도에도 세습 체재를 공고히 했습니다. 2023년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통일 독일의 과정과 여러가지 요인들을 살펴 봄으로 한반도에서 가능한 통일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아야 합니다.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전쟁과 내전과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창궐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던 지구촌에 2차 세계 대전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인위적으로 나뉘어졌던 베를린 장막이 걷히게 된 것은 오랜만에 듣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연이어 부메랑처럼 동유럽의 국가들이 오랜 공산 체재를 종언하고 독립하였으며, 구 소련 연방이 해체됨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공산권 구 소련 공화국들이 유럽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독립국으로 새롭게 역사를 쓰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서구 민주체재에 편입할 때 세계의 눈은 한반도를 주목하게 됩니다. 이런 여세라면 분단국가 남북한의 통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입니다.
우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이라는 선언을 통해 역사적으로 국가 연합, 국가 네트워크, 그리고 공동체 통일이라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추렴 가능한 다양한 통일방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고, 서독교회가 했던 수많은 일들이 어떻게 통일에 기여했는지를 통해 또한 한국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재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동방정책(Ostpolitik)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서독의 빌 브란트 수상이 추진한 동방정책입니다. 동서독 분리의 상징과도 같은 베를린 장벽이 있던 베를린 시 시장이었던 빌 브란트는 누구보다도 양국간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만이 해결책임을 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수상으로 재직했는데 그가 했던 모든 정책과 발걸음은 세계의 이목을 주목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냉전체재를 고착화한 할슈타인 원칙부터 폐기 처분합니다. 1949년 냉전체재를 출범시키고 동서독간의 체제 우위 경쟁을 부추겼던 독일 초대 수상 아데나워가 제창한 할슈타인 원칙은 더 이상 동서독 장벽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동방정책을 추진한 빌 브란트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해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히틀러와 독일인을 대신하여, 유대인 게토의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습니다. 빌 브란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냉전과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화해와 용서를 기반으로 한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한 것입니다. 1972년 동독과 서독은 마침내 기본조약을 맺게 되며, 빌 브란트의 좌파 정권 이후 들어 선 보수당은 빌 브란트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동방정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킵니다. 동방정책은 서독 국민의 동독 방문, 자유로운 서신 교류와 경제 및 문화 교류, 그리고 동독 국민들에게 서독 방송을 볼 수 있도록 함으로 소통과 상호이해의 기반을 조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속 가능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동서독 통일을 종국에는 일구어 낸 것입니다.
빌 브란트에 의해 주창된 동방정책은 1972년대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합니다. 이를 통해 동서독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가장 극적인 일은 1982년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수상이 동독을 방문합니다. 이어서 1987년에는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됩니다. 슈미트 정부 이후 들어선 콜 정부도 동방정책의 기조를 계속 유지합니다. 그는 통일의 여건 조성 우선하였으며 ‘내독 교류 협력’ (동독과 서독 사이)을 확대해 나갑니다. 콜 수상은 보수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따른 내독 정책을 기본적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콜 수상은 1983-1984년 동독에 20억 마르크 차관 주선하여 돕게 됩니다.
독일 통일의 요체, 라이프찌히 목요 기도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일을 일구어 낸 것에 대하여 서방 언론은 너나할 것 없이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기도회를 지적합니다. 가정법으로 만약 이 기도회가 없었다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입니다. 남북의 군사분계선 DMZ 철책이 무너지고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떤 교회의 기도회로 촉발되었다고 역사가 쓰여 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힘이나 또는 외부적 압력에 의해 통일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남북을 가로지르는 빗장을 열게 되리라 믿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정확히 한 달 전인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동독 전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열렸습니다.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동독의 공산당인 독일사회연합당(Social Unity Party of Germany, SED)의 압제에 항거하는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사실 리콜라이 교회는 오래 전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평화 기도회를 열어 왔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기도회에 큰 전기가 된 것은 이듬해인 1983년 가을 라이프찌히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였습니다. 50여명의 청년들이 동독의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면서 니콜라이 교회의 목사와 교회는 쫓기는 청년들을 위해 교회 문을 열어 주게 됩니다. 이들 청년들은 예기치 않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매주 월요일에 개최되는 기도회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이처럼 언로가 막히고, 개인의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모일 수 있는 통로로 니콜라이 교회 월요 기도회는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기도회는 군비증강 반대와 같은 반전 운동 뿐 아니라 여성, 인권 그리고 환경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이지만 교회가 문을 열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모습은 동독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동독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열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동독 전역에 있는 교회들 그리고 니콜라이 교회의 기도회는 처음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여하다가 점점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5월 8일 독일사회연합당은 집회 참여를 제한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니콜라이 교회 월요 기도회에 오는 사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1989년 9월 4일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서 교회 밖에서 모였으며 이 집회 장면은 서독 방송에 방영되게 되었고 이는 서독 사람 뿐 아니라 동독 사람들도 시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부는 강압적으로 자유를 박탈하고 집회를 해산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은 동독 40주년 기념일인 1989년 10월 7일에 일어났습니다. 6천명에서 8천명의 사람들이 니콜라이 교회와 라이프치히 중심에 몰려 들었고 7만 명의 군중이 도시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니콜라이 교회 앞의 군중들 사이에서 수백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호네커(Honecker) 자신이 교회를 폐쇄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경찰은 시위대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독일사회연합당(SED ) 중앙위원회의 한 위원의 고백에 따르면 ‘촛불과 기도’를 제외한 모든 것 즉 발포와 대량 체포를 준비했지만 탱크는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고 철수하게 됩니다. 인류의 거대한 대학살 또는 체코 프라하의 봄과 같은 잔인한 데모 진압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니콜라이 교회 월요 기도회가 끝까지 비폭력적인 평화 기도회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니콜라이 교회 목사인 크리스챤 퓨러(Christian Fuehrer)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교회의 월요 기도회는 동독 전역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들은 동독 전체의 집합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라이프치히 사건이 없었어도 동독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믿습니까?”라는 독일 방송 도이치 벨레(Deutsche Welle, DW) 의 줄리아 메버스 구요(Julia Elvers-Guyot) 기자의 질문에 크리스챤 포이러 목사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1989년 11월 9일 라이프치히가 없었다면 1990년 10월 3일의 통일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간과하지 않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동독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회주의를 개혁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교회의 공의회와 같은 성격의 원탁회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탁회의의 사회는 대부분 동독 교회 목사들이 주도하였고, 오랫동안 동서독 교회 간의 교류와 유대 가운데 형성된 동독 교회의 가장 민주적인 시스템은 원탁회의를 통해 교회가 민주주의의 모델이 됨으로 아무리 소수라 해도 동독 국민들은 자신만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동독교회가 종교적 기능도 감당했지만 어찌 보면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 보루 역할도 충실히 감당한 것이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동서독 국민의식의 차이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동서독 교회의 차이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독은1민족 2국가라는 통일 이념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동독은 자본주의적 민족과 사회주의적 민족이라는 2민족론으로 바꾸어 통일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전기한 바처럼 서독은 1국가 2체제론을 내세워 독일 민족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동독 정부는 독일인 한 민족이 아니라 두개의 민족 즉 자본주의적 민족과 사회주의적 민족이라고 구별하였음에도 동독 국민들의 통일을 향한 강한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서독 경제에 비하여 동독의 경제는 정치 실패에 따는 실책으로 경제는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는 민심 이반을 불러 일으켜서 동독 국민들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갈구하게 합니다. 또한 동독 국민들도 서독 수상 콜에 대한 높은 지지를 보냈습니다. 도리어 동독 국민이 흡수 통일을 크게 지지하였습니다. 이는 지속적 동서독의 교류가 낳은 결과입니다. 동서독 관계를 잘 알고 있던 김일성 김정일 정권은 북한의 문을 더욱 더 굳게 잠그고 김일성 주체사상 일인 지배 체재를 강화한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독일 통일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
독일 통일에 있어서 서독교회가 했던 일들은 전세계 언론에 의해 칭찬 일색으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사실 히틀러 정권에 충실한 충견 역할을 했던 독일교회가 특히 서독 교회 뿐 아니라 동독 교회가 사회주의 체재에 동조하지 않고 민주화의 산실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동서독 교회가 걸어왔던 일련의 회개와 통렬한 자기반성 그리고 성경과 양심에 입각한 동독 국민 전체에서 줄 수 있는 양심세력이자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교회의 역할이 자꾸 오버랩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회를 통폐합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떠올리게 됩니다. 일제시대에 있었던 교회들을 황국 신민화하고 허울좋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연합을 꾀한다는 내선일체를 내걸고 1938년 7월에 일본 제국주의는 친일 기독교 단체들의 상위조직으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결성케 합니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과 첨병 역할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같은 시기인 히틀러 치하의 독일도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교회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일 큰 독일교회의 문제는 히틀러를 지지함으로 교회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엄청난 홀로코스트와 게르만 팽창주의에 편승했다는 점입니다. 양심 세력이 되어야 할 교회가 히틀러 나치의 충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게르만 아리안주의와 같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독일의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하여 교회를 정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히틀러 치하 뿐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독일 황제의 전쟁 정책을 옹호할 뿐 아니라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지지를 공공연히 천명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2차 세계 대전을 발발케 한 히틀러 정권에서도 반공, 반자유주의, 민족주의와 인종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지지하며 협력했습니다. 비록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와 같이 양심 세력과 민주화를 지지하는 기도회를 열게 되었고 폭넓은 동독 국민의 지지(무신론자 및 비 신자까지 포함하는)를 얻게 된 것은 그들의 과오를 내외적으로 천명하고 행동으로 회개와 자성의 모습을 오랜 기간 보이면서 실제적 변화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체절명의 평화에 대한 희구와 교회가 전쟁을 반대하고 인권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특히 미국 주도의 데탕트에 반대하고 동서화해에 동서독 교회가 앞장섰습니다.
동서독 교회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행위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비록 동독과 서독으로 나라는 분리되었어도 교회만큼은 동서독 분단 이후 1969년까지 동서독 하나의 교회의 협의회인 ‘독일 개신교 교회협의회(EKD)’를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이후 서독과 동독의 교류와 하나됨을 경계한 동독 사회주의 정권이 독일 개신교 교회협의회(EKD)로 부터 강제적으로 동독교회를 동독 개신교 연맹(BEK)을 결성케 합니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장로교 및 감리교등을 통합함으로 일제에 충성케 한 것처럼 동독 공산당은 동독 교회의 많은 활동에 대하여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동독 정부가 취한 종교 정책은 동독 교회 고사 작전입니다.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그리고 세속적 경향도 강한 동독 국민들의 성향도 가미되어 동독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급증하게 됩니다. 운신의 폭이 줄어든 동독 교회의 절망적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구조의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서독 교회였습니다.
서독교회의 입장에서 동독 사회주의 정부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동독 교회를 공산당 교회라고 비판하기보다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같은 교회 공동체 즉 ‘특수한 공동체(Die besondere Gemeinschaft)’로서 주어진 상황 속에 실현 가능한 연합과 일치의 행보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동서독교회가 같은 성경, 같은 예전, 같은 문화방식으로 양 국가간 교회들의 일치와 협력을 실제적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2023년 현재에도 북한은 끊임없는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동서독 교회가 취한 태도는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1958년 서독교회는 동서독을 아우르던 당시 독일 개신교 교회협의회(EKD) 총회에서 동서독의 핵무장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이러한 기조는 1970년대 거치면서 반전 운동 뿐 아니라 반핵의 입장을 견지하게 합니다. 그 일례가 바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소련의 핵무기를 배치하여 무장함으로 동서유럽의 긴장을 고조시키자 미국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79년 퍼싱II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동서독 교회는 핵무기 무장을 단호하게 반대하게 됩니다.
서독교회의 헌금
유럽에는 십일조를 포함한 교회에 내는 헌금을 세금 형태로 내는 종교세라는 것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2천년 가까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겪으면서 많은 국가들이 종교세를 폐지하거나 또는 수정하였지만 종교세를 걷고 있는 국가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서독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독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 즉 천주교회나 루터 교회 그리고 자유교회를 지정하여 종교세를 내고 있습니다. 서독교회가 동독교회와 동독 전체를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서독교회 기독교인들이 종교세를 통하여 드린 헌금을 통해서 입니다. 동독 공산주의 정권은 종교세 징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 서독교회와 달리 동독교회는 자립하기도 힘들고 재정적 수요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기독교인은 공산당원이 될 수 없고, 이미 공산당원인 사람은 교회의 입교인이 될 수 없음으로 인한 교인 감소도 재정 감소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서독교회가 동독교회를 돕게 된 시초는 우선 세개의 서독교회가 하나의 동독교회를 돕도록 한 것입니다. 그 지원은 먼저 동독교회 목회자 생활비와 교회 운영비입니다. 동독교회 고사작전을 펼쳤던 동독 사회주의 정권의 의도에 반하여 도리어 동독교회는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생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동독 사회주의 정권에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 된 것입니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
가장 큰 서독교회의 지원은 동독 국민의 인권 보호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은 “납치범에 몸값을 지불하거나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몸값을 지불한다”는 뜻을 지닌 ‘프라이카우프(Freikauf)’가 있습니다. 이들의 석방과 자유를 위해 붙인 비밀 작전의 이름이 바로 ‘프라이카우프’입니다. 서독교회는 프라이카우를 통해 수많은 정치범과 가족들을 안전하게 서독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1962년부터 1988년 베를린 장벽 이전까지 무려 3만 3천여명의 정치범과 그들의 가족 25여만명의 비용을 지불함으로 서독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석방 비용만 따지면 무려 1조 8천억원인 34억 마르크가 소요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유케 될 때까지도 그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석방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석방 작전은 무려 27년 동안 진행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이 되고서도 일반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나 ‘프라이카우프’는 이제 대중에게 알려졌고 그 방법과 수행역할에 대하여 남한 정부가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의 공범자가 되어 버린 독일교회는 종전이 되자마자 독일교회가 범했던 죄악을 고백하는 슈튜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합니다. 연합국의 승리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독일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독과 동독의 교회는 서로 분리된 것입니다. 우선 동독 8개 주 교회가 원래 있었던 독일 개신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동독 교회 연맹을 구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과 동독의 개신교 연합체는 동서독 교회의 기본 신앙 조항에서 동서독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 일치된 공동체이며 그 신앙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임을 천명하고 동서독 교회협의체까지 상호협의에 도달했습니다. 이러한 기본원칙 하에 서독 교회는 끊임없이 동독 교회와 동독 전체에 정신적 교류 뿐 아니라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상호교류와 협력은 무려 40여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동서독은 같은 찬송가와 성경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설교 방식 및 민주적인 토론과 회의와 같은 교회 체재까지도 양국 교회 간의 동질성을 유지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동독이 극심한 사상통제를 가했음에도 동독 교회는 교회를 통한 민주화 운동 및 정치범 석방과 같은 인권 보호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남한 교회와 유령 단체이며 선전용인 북한의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은 남한 한국교회협의회(KNCC)가 서로 교류하고 있으나 결코 동서독 개신교협의체가 진행한 것과 비견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57년부터 1990년 통일 독일 바로 이전까지 서독교회가 동독교회를 돕고 지원한 현금과 물품은 각각 천문학적인 액수였습니다. 먼저 현금 지원은 23억 마르크로 한화로는 1조 3천억원이며 이는 동독교회와 시설 유지비로 사용되었습니다. 물품으로 지원한 액수는 28억 마르크로 한화로는 1조 6천 8백억원입니다. 현금과 물품을 다 합치면 51억 마르크에 달하는데 이를 원화로 환산하면 2조 9천 800억에 이릅니다. 이러한 지원은 동독 교회자 목회자의 사례비 및 교회 운영비 및 유지 비용 및 그에 상응한 물품들입니다. 이는 서독교회 예산의 40%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지원으로 인해 사실상 동독 교회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어 보아야 할 것 중 하나로 자유로운 민주체재에 있는 서독교회에 비하여 동독 교회는 사회주의라는 체재 안에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동독 사회주의 체재에 협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동독교회는 사회주의적 에큐메니컬 교회 형태를 취하였고 신학적으로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n Erklarung)을 취하였고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신학과 같은 기조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1971년 아이젠나흐에서 열린 총회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로 그 방향성을 제시함으로 실제적으로 동독 사회주의 공산당 정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기관이 됨으로 동독 주민 대다수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후에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스 교회 월요 기도회처럼 통일 독일의 물꼬를 틀 수 있었습니다. 동독교회가 절대 다수는 아니었지만 동독 공산당 정보기관 에서조차 동독 교회가 동독 사회주의 체재에 유일하게 일치하지 않는 기관이기에 동독 교회의 성장은 있어서도 안되며 동독 공산주의 체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동독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역할입니다.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동독으로 건너가 목회를 한 목사인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처럼 동독 교회에는 고상한 인품과 사회주의 이념 체재에 동의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통일 독일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디아코니아 재단
독일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은 디아코니아 재단입니다. 서독 교회에는 주류 교단인 루터교회 뿐 아니라 독립교회들이라 할 수 있는 자유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들 교회들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동독교회와 동독 국민을 돕기 위한 하나의 단체인 디아코니아 재단을 설립합니다. 이 재단의 목적은 동독과 동독교회를 돕는 것이기에 신학도, 이념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동독과 동독교회를 돕는 일은 처음에는 구제와 원조로 시작하다가 이제는 동독 국민과 동독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고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는 형태로 동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나가는 말
동서독 통일은 그 내막을 따져 보면 우연에 의한 것도 아니며, 기자회견 실수로만 촉발된 것도 아니며 더욱 더 오보를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서독 교회의 성숙한 섬김과 교류는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동독 교회는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유일한 피난처이며 또한 돌출부였습니다. 빌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은 이념 대립의 종식을 가져왔으면 정권이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도 독일인의 하나됨을 향한 동방정책은 중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기도하던 기도회는 그야말로 화약고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습니다.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기도회는 통일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성숙한 이해로 동독 국민과 교회를 도왔던 디아코니아는 지금도 그 평화와 화해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5만명의 정치범과 그들의 가족들을 구출한 프라이라우프 작전은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그 비밀 작전이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영혼들을 구출하는 모습을 보여 준 서독 정부와 서독교회의 성숙함은 한없이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였던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비록 비슷한 분단과 이념대립의 과정을 겪고 있지만 이미 통일을 이룬 그 언저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동서독 교회를 바라보며 남한의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다음 글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북한 복음화와 복음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김종필 목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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