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敎와 유교와의 관계
김규동 박사 ◙ Photo&Img©ucdigiN
[역사저널=김규동 박사] 景敎와 유교와의 관계 <2회> »
the Relation between Jing-Jiao and Confucianism
당대 대부분 시기는 노자를 숭배했기 때문에 도교의 위상이 대체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교 역시 측천무후의 비호에 흥한 적이 있었다. 선비들은 육예(六藝) 외에도 불교의 참선에 관련된 내용이 주 화두로 유행하였지만 그렇다고 유교의 사상이 사회의 근본으로서 흔들린 적은 없었다.
중국 본토에서 나고 자라는 유교의 역사적 위상은 도교와 마찬가지로, 중화민족에 뿌리 깊은 영향을 미쳤고 결코 도교에 뒤처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당의 역대 황제마다 유교를 국교로 받들고 그 사상을 지지하였기에, 나라 전체에 유교적 영향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사실 봉건군주 전제제도가 존재하는 한 유교의 윤리, 특히 군신부자(君臣父子) 등 윤리적 상식은 최고 통치자의 예우와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로 인해 유교의 사회적 위상 역시 다른 종교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외래종교인 景敎는 유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유일신으로 성도들은 전적으로 순종해야 된다. 교회의 주교 수장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중보적 메신저의 자격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중세 교황중심의 가톨릭에서는 그들이 사회의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결국 세속정권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동방기독교는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중국에까지 전파했고, 당시 당의 토착종교인 유교의 윤리와 어긋난 교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景敎는 중국 주류 종교인 유교를 “가까이하였는데” 즉, 선교의 방침으로 유교의 충과 효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취했고, 왕을 존경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景敎 경전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우선, 景敎碑를 살펴보면, 당 황제에 대한 찬양을 아끼지 않았는데, 태종을 향해 “赫赫文皇, 道冠前王(혁혁문황, 도관전왕)”이라고 칭하였고, 고종은 “人有樂康, 物無灾苦(인유강락, 물무재고)”라고 칭하였며, 현종에게는 “皇圖璀璨, 率土高敬(황도최찬, 솔토고경)”, 숙종은 ”止沸定塵, 造我區夏(지비정진, 조아구하)”라고 하였고, 대종에게는 “孝義, 德合天地(효의, 덕합천지)”라고 하였고, 덕종은 “武肅四溟, 文清萬域(무숙사명, 문청만역)”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에서 “為此普天在地並是父母行。據此聖上皆是神生。今世雖有父母見存。眾生有智計, 合怕天尊, 及聖上。並怕父母(위차보천재지, 병시부모행, 거차성상개시신생, 금세수유부모견존, 중생유지계, 합파천존, 급성상, 병파부모)”라고 하였다. 여기서 “聖上皆是神生”이란 유교의 “聖王”, “天子”란 표현을 똑같이 쓰다 보니, 기독교의 교리와 어긋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眾生若怕天尊。亦合怕懼聖上, 先事天尊, 第二事聖上, 第三事父母(중생약파천존, 역합파구성상”, “선사천존, 제이사성상, 제삼사부모)”라고 하였다. 유교에서 하늘과 왕과 부모를 섬기라고 하는데, “天尊”과 “天”의 이론적 차이, 그리고 항목들의 순서를 따지지 않는다면, 景敎의 기독교 교리는 오히려 유교 도덕을 부추기는 격이었다.
또한, 景敎의 일부 경전에는 중국의 忠과 孝의 영향을 받는 증거가 있다.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에서 “汝等弟子, 及諸聽衆, 散於天下, 行吾此經, 能爲君王, 安護境界, 譬如高山, 上有大火, 一切國人, 无不覩者, 君王尊貴, 如彼高山, 吾經利益, 同於大火, 若能行用, 則如光明, 自然照耀(여등제자, 급제청중, 산어천하, 행오차경, 능위군왕, 안호경계, 비여고산, 상유대화, 일절국인, 무부도자, 군왕존귀, 여피고산, 오경이익, 동어대화, 약능행용, 즉여광명, 자능초요)”라고 하였다. 주겸지(朱謙之)가 이를 평가하기를 “이것은 종교와 정치의 힘을 완전히 결합하여 중국의 통치계층에 엄청난 권력을 실어주게 되었다.”고 하였다. 景敎가 능동적으로 중국 통치계층을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중국의 통치계층과 그의 통치사상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이 景敎가 중국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교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주장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의 근거는 바로 景敎碑의 기록인 “我建中聖神文武皇帝。披八政以黜陟幽明。闡九疇以唯新景命。化通玄理。祝無愧心(아건중성신문무황제, 피팔정이출척유명, 천구주이유신경명, 화통현리, 축무괴심)”인데, 이를 통해 “덕종 건중 연간, 景敎가 덕종 황제의 지지를 받아, 교리사상을 크게 수정한 적이 있었다. 그의 취지가 景敎사상이 나라의 통치사상과 맞고, 사회의 전반적인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필자는 이런 해석이 맞지 않는다고 본다. “팔정(八政)”, “구주(九疇)”란 표현이 국가의 통치사상이나 인생에 관련이 있긴 한데 오히려, 황제가 행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고, 황제의 공적을 찬양하는 것뿐이었다.
앞에서 연구하는 주요 논제는 景敎가 자발적으로 유교를 접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이지변(華夷之辨)을 역대 왕조가 다 강조한 바가 있듯이 당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앞에서 先天 말기에 景敎를 훼방하는 사건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의 예시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 본토 보수주의자들이 景敎에 대한 배척과 경시를 엿볼 수 있다. 물론 비방을 당한 것이 景敎 뿐만 아니라 그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서역을 통해 들어온 종교가 모두 “異敎”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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