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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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조용선 목사]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의 인식 »
창세기 1:1~3절 말씀, 천체물리학자들 말하는 관점 따라 해석 해보자
(창 1:1, 개정)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2, 개정)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3, 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Gn 1:1, E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Gn 1:2, ESV)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Gn 1:3, ESV)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创世记 1章1~3节) 1.起初神创造天地。2.地是空虚混沌。渊面黑暗。神的灵运行在水面上。3.神说,要有光,就有了光。
1장 빅뱅(Big Bang)이론과 기독교
1절 빅뱅(Big Bang)이론이 기독교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을 해석할 때에 가장 크게 대립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론과 하나님이 없이 우연히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생물을 연구하던 찰스 다윈에 의하여 시작하여 과학의 전 범위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현재의 학문은 진화론을 원리로 과학의 학문들을 전개한다. 천체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자역학과 소립자 물리학에 따르면 현재의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데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에 우주의 확장을 시작하는 어떤 시작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거대한 폭발과 같을 것이라고 하여 빅뱅(Big Bang)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빅뱅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 빅뱅 이론은 하나님이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지를 나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빅뱅이론을 통해 우리가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또한 천체물리학에서 우주는 단지 우연에 의하여 이렇게 구성될 수 없고 분명히 어떤 설계자(designer)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천체물리학의 관점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한 창조론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관점을 따라 해석을 해보자. 이와 같은 해석이 의미가 있는 것은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과학의 원리와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관점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이 문제없이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믿게 하는 효과를 줄 것이다.
2절 빛은 하나의 분기점
이 말씀을 과학적 안목으로 해석하기에 앞서 이 글을 준비하게 된 일을 하나 말씀드리겠다. 지난 주간에 내게 의미 있었던 일 중의 하나는 물리학자 이 교수님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다. 그 중에 오늘의 설교와 연관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빛은 양자들의 모음이며 질량을 가진 에너지라는 것이다. 빛이 에너지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방정식인 E=MC²을 따라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것이다. 성경 본문 말씀에서 3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니까 빛이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이 빛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앞의 1절과 2절에서 살펴보고 그 다음 빛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말하겠다.
2장 천체물리학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 1~3절 해석
1절 빠라(ברא)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에서 창조하셨다는 단어로 ‘빠라(ברא)’라는 단어가 쓰였다. 이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때에 쓰이는 동사이다. 히브리어에는 ‘야차(yatsar)’라는 단어도 쓰이는데 칼뱅이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구조(frame)나 유형(form)을 만들 때 쓰이는 단어라고 했다.1)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주를 만드는 어떤 기본적 재료(材料)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기본적 재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다.
2절 카오스(chaos)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씀이 2절의 처음에 나오는데 땅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땅은 오히려 코스모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코스모스는 우주를 뜻하지만 사실 이 단어의 뜻은 질서가 잡힌 정형화된 세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셨을 때에 2절의 세상은 혼돈과 공허가 있는 것이다. 혼돈이란 단어는 ‘토후(תהו)’가 쓰이는데 이것은 ‘유형이 없는(without form)’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공허는 ‘보후(בהו)’가 쓰이는데 이것은 ‘텅 빈(void)’란 뜻이다. 그리고 텅 비었다는 것은 아직 거기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씀은 과학에서 볼 때에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소립자의 세계를 상징한다. 영어 단어로는 흑암을 ‘다크니스(darkness)’ 그리고 깊음을 ‘어비스(abyss)’를 쓰기도 한다. ‘어비스’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다의 깊은 곳을 생각하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깊은 바다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거의 완전한 흑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심연이라고 번역되는 ‘어비스(abyss)’이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는 말씀은 이제 코스모스의 세계로 나아가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칼뱅은 ‘어비스(abyss)’와 ‘물(waters)’을 같은 개념으로 해석한다.2) 어비스와 물은 과학에서 소립자 혹은 소립자 보다 더 작은 단위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현재까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소립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우주를 구성할 기본물질이다. 그런데 이것이 소립자인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작은 단위의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하튼 2절의 현상은 3절에 빛이 있기 전의 단계이다. 현재 소립자 물리학에서 빛은 소립자들의 집합체이니까 2절은 빛이 형성되기 전의 단계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3절 코스모스의 시작
빛이 있고 난 다음에는 질서가 잡힌 코스모스의 우주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atom)가 나오고 원자들이 결합하면 분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소, 헬륨 같은 원소들이 만들어지고 이 원소들이 결합하여 물체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3절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것은 질서가 있는 코스모스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다. 그리고 빛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이미 창조가 시작되었지만 그 세계는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코스모스의 반대적 개념, 즉 혼돈을 뜻하는 ‘카오스(chaos)’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카오스의 상태는 물질에 있어서도 빛의 이전 단계인 소립자 혹은 소립자 보다 더 작은 단위의 세계가 바로 창세기 2절의 상태인 것이다.
4절 수면 위를 운행하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말씀을 조금 더 깊게 해석해보자.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는 원자폭탄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원자의 구조를 분열시켜 거기서 나오는 빛과 열을 파괴의 무기로 이용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에서는 분열하기 가장 쉬운 원소인 우라늄을 분열시켜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우라늄을 전기로 만드는 원자력 발전 이후에 나오는 플루토늄으로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파괴력을 보이는 것은 원자의 분열이 아니라 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힘이다. 수소의 핵이 높은 열과 빠른 속도에서 서로 충돌하여 헬륨으로 변하면서 나머지의 에너지가 열과 빛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폭탄으로 이용한 것이 수소폭탄이다.
5절 물의 의미
그러나 원자의 분열이나 수소의 핵의 융합을 잘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거기에서 인류가 사용할 에너지를 거의 무한대로 공급받을 수 있다. 이런 내용이 2절의 끝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통제가 불가능한 바다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칼뱅도 그의 주석에서 물은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You set a boundary that they may not pass, so that they might not again cover the earth.)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은 창세기 6장부터 기록한 대홍수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은 기적, 그리고 계시록에서 유리바다로 상징되듯이 절대적인 파괴의 상징이기에 반드시 통제와 조절이 필요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신다는 것은 카오스로 상징되는 소립자의 세계를 통제하고 조절하고 계신다는 것을 설명한다.
6절 빛
이제 빛에 관하여 말하자. 빛은 질량을 갖고 있다.3) 소립자들이 합한 것이 빛이 된다. 빛은 에너지이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물질이 된다. 따라서 빛으로부터 원자와 분자와 원소의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다. 질서가 잡힌 코스모스의 우주는 바로 이 빛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빛은 1초에 30만km를 이동한다.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을 연관시키는 측정도구가 바로 빛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와 우주의 모든 시공을 연결하여 주는 것이 바로 빛이다. 칼뱅은 이 빛에 대해 ‘최고의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서 마땅히 제일 처음 창조되어야 한다고 했다.4)
3장 바빌론 종교의 삽입
이상의 글은 천체물리학의 관점으로 창세기성경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해석이 현대인들에게 매우 잘 이해된다고 본다. 이제 또 하나의 해석을 보자. 이것은 성경이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기록된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은 바빌론의 종교에서 말하는 마르둑(Marduk) 신과 혼돈의 상징이며 바다의 괴물인 티아마트(Tiamat)와의 전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바빌론 종교는 마르둑 신이 혼돈이며 바다의 괴물인 티아마트를 죽인 후에 그 시체로부터 우주를 형성했다고 한다.5)
이 신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빌론 사람들도 바다를 통제할 수 없는 괴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고 기록한 이유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빌론 종교의 영향이 당시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이 성경을 편집할 때에 바로 이 바빌론 종교의 내용을 창세기 1장 2절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들의 여러 종교에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들어온 종교 문헌 내지는 문학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이 성경을 진리로 알아 목숨을 걸고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점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모세가 썼던 원래의 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책은 다 사라졌고 책은 다시 편집되었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은 유다왕국의 요시야 왕 시절에 잃어버렸던 율법 책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왕하22:8~11) 학자들은 이것을 ‘신명기’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 시절에는 사람들이 신명기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모세가 전해준 모세오경마저도 수백 년이 지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잊었다는 것이다. 또 에스라 시절에는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할 줄 몰랐다. 언어도 죽어버렸는데 모세가 전해준 성경과 예언자들의 글이 남아서 읽혔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사라졌던 성경 말씀이 바빌론 포로시절에 다시 모아져서 편집되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때에 편집되었다고 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런 편집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이지 없던 내용을 바빌론 포로 시절에 이것저것 다른 나라의 신화와 전설을 편집해서 유대인의 성경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가?
4장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
1절 같은 점
한 가지 더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체물리학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놀랍게도 고대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과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할 때도 하늘과 땅은 우리가 보는 저 하늘과 이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늘은 ‘지적인 하늘(caelum intellectuale)’을 뜻하고 땅은 아직 ‘형태가 없는 물질(materia informis)’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 즉 ‘cratio ex nihilo’의 창조를 말한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히브리어 ‘빠라(ברא)’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땅이 보이지 않고 아직 형성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했다.(terra erat invisibilis et incomposita) 즉 ‘아직 형태가 없는 질료’라고 본 것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씀은 어둠이 심연 위에 있다는 말로 ‘tenebrae erant super abyssum’이라고 했다. 이것은 무(無)로부터 세상이 창조된 뒤에 이제 세상을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만들기 전의 상태,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이제 3절에서 빛이 있으라(fiat lux) 하는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직 형태가 없던 질료가 형태를 갖추는 상태가 됨을 뜻한다고 보았다.6) 이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원자와 분자와 원소의 세계가 형성되고 질서가 잡힌 우주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현대의 천체물리학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향에 있다.
2절 다른 점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즉 창세기 1절과 3절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사에 관한 생각에서 한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빛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리고 천사는 시간이 시작된 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에서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근거에서 보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코스모스의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소립자와 같은 자료들이 창조되어 있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에서 논리적으로 창세기 1장 2절과 3절의 현상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3절 유사한 점
그러나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창세기 1장 2절의 소립자 세계에 시간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에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양자 혹은 소립자의 세계는 모두가 동일한 상태였다. 내가 물리학의 이 교수님과 대화를 할 때에 한 가지 특이하게 본 것은 다름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는 사실 ‘없음(nothing)’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었다. 또 양자의 성질이 ‘있음’과 ‘없음’처럼 어느 하나의 상태가 아니기에 비결정 상태라고 한다. 그러므로 물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creatio ex nihilo’ 로 보는 것이다. 과학은 현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도출하기에 소립자의 세계와 성질을 확인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빠라(ברא)’ 혹은 ‘creatio ex nihilo’와 완전히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양자의 세계에 시간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간이란 것은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면서 시작하는 것이고 또한 공간과 함께 한다. 그런데 양자의 세계가 없음(nothing)과 같은 상태라면 거기에는 아직 시간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혹은 시간조차도 혼돈일 상황이다. 그러다가 양자의 세계에 어떤 다른 것 하나가 발생하면서(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상전이(相轉移)라고 한다) 동일함에 변화가 일어나 빛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확장하면서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일 양자의 세계에 시간이 없는 것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5장 프로이트의 자살과 무(無)
참고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서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원죄 이후에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보인다.7) 이것을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자살을 하여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8)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의 복이었다. 그러나 원죄 이후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자살을 택하여 무로 돌아가려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살자고 하는 마음과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있다. 주님의 은혜는 사람을 살게 하고 원죄아래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살을 통해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에 자살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9)
6장 맺음말
말씀을 맺겠다. 빅뱅이란 말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거북한 말로 들리지만 사실 천체물리학자들이 창조의 과정을 추정해내는 것은 기독교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들은 논리의 추리과정을 통해 이 우주는 우연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설계자(designer)가 있다고 본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전 단계에 와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창세기 1장 1~3절의 해석에 있어서도 천체물리학의 관점은 바빌론 종교를 가져다가 성경의 원자료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해석보다 오히려 더 성경에 근접해 있다. 현대인들의 대다수가 과학을 신뢰하는데 성경말씀과 천체물리학의 관점과 해석이 유사하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좋은 우방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천체물리학의 관점과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 유사하다는 것은 더욱 고무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현대인들의 귀와 마음에 다가가기를 기도한다.
7장 부록: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전
1절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분기점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이 우주의 실제적 시작을 말한다. 왜냐하면 물리학적으로 따져 볼 때에 빛은 에너지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인 E=MC² 의 등식을 따라 에너지는 물질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너지인 빛은 원자(atom)와 분자(molecule)와 원소(element)로 단계별로 변하며 온 우주를 구성한 것이다. 원소가 결합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에 생명체(creature)가 되었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따라 지음 바 되고 하나님이 입김이 들어감으로 영적인 생명체(being)가 되었다.
빛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우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빛의 이동이 1초에 30만km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간의 거리를 시간으로 측정하여 관계를 맺게 한다. 즉 빛은 우주의 규모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2절 양자(量子)컴퓨터와 양자(量子)폭탄
1항 하나님의 영과 수면
이와 같이 빛은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우주를 시작하는 기원이 된다. 이것을 코스모스(cosmos)의 우주라고 부른다. 그러나 코스모스의 우주와 반대되는 우주가 있다. 그것은 카오스(chaos)의 우주이다. 카오스의 우주란 혼돈의 우주를 뜻한다. 이 우주는 빛이 생성되기 이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창세기 1장 2절에 해당한다. 그 말씀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 하신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빛을 분해하면 양자 혹은 소립자라고 불리는 세계에 이른다. 소립자들은 현재의 과학으로 완전히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질량이 없어 측정하는 도구가 접근만 해도 소립자는 영향을 받아 소립자 자체의 운동과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립자 혹은 양자의 세계는 혼돈이고 공허이며 흑암이고 깊은 심연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2절의 끝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의 영이 물을 통제하거나 조절하거나 관리하는 느낌을 준다. 히브리어로는 ‘라하프(רהף)’라고 하고 영어로는 ‘호버링(hovering)이 주로 쓰인다. 영어 단어의 뜻으로는 새가 새끼를 감싸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소립자의 상태로 있는 카오스의 상태를 감싸며 곧 빛을 만들며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전환할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2항 유전자, 원자, 그리고 양자
그러나 이것이 반대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이 모든 과정을 인간을 위하여 위대하고 아름답게 진행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의 기반인 유전자 DNA를 마음대로 조작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 이외에 전혀 다른 생명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을 윤리로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것은 큰 생명체에 대한 것이지만 인간의 유전자 기술은 이미 가장 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세계에 까지 미쳤다. 그래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코로나는 인간이 바이러스를 조작하여 만든 것이라는 말이 은근히 사람들 사이에 돌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좀 더 작은 영역에서 보면 원자의 세계에 이른다. 원자를 조작한다는 것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생명체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파괴하고 우주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파괴력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라늄의 분열이나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인간은 더 나아가 수소 등 원소를 융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수소폭탄이라고 불리는 핵융합폭탄을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뒤로 돌려 지구와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절에서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위험한 것일까? 최근에 소립자를 이용한 양자 컴퓨터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 최고의 디지털 컴퓨터가 1만 년 동안 계산할 것을 불과 3~4분 안에 다 계산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양자(量子)의 능력이 현재로서는 컴퓨터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이 가공할 능력이 어느 방면에서 나타날지 아직 모르는 일이다. 가령 양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성질이 있는데 현재까지 실험을 통해 성공한 것은 약 1m 정도의 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래에 이 거리가 수 광 년 떨어진 곳이라고 할지라도 양자의 성질을 이용하여 상상도 못할 파괴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이것을 아마 ‘양자폭탄’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폭탄이 만들어진다면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상대방 나라에 쏘아 올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같은 것이 필요 없게 된다. 인간은 지금 창세기 1장 2절의 세계에 막 진입했다.
3절 영생과 인공지능(AI)
이제 남은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세계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뜻의 동사 ‘빠라(ברא)’를 사용했다. 인간은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유사행위를 이미 시작했다. 그 행위의 하나는 영생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공학과 의학 등 모든 과학이 힘을 총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공지능인 AI를 만들기 위해 역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짓기 이전의 인간에게 주신 영생을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갖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인간처럼 지능과 인식 능력을 갖춘 자유의지의 존재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영생을 이룬다면 비록 전능한 신은 아니어도 전능한 신에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창조주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동사 ‘빠라(ברא)’의 행위를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하는 행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1장 6절에서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당시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인간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 즉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인간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는 의식을 버린 적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신의 능력에 맞먹는 과학의 힘을 갖고 창세기 1장 1절, 즉 하나님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세계까지 넘보고 있다.
주석
1) John Calvin, Christian Classic Ethereal Library, 『Calvin’s Commentaries Complete』 ‘Commentary on Genesis’, p. 30. ‘yatsar’ which signifies to frame or forms but ‘bara’ which signifies to create. Therefore his meaning is, that the world was made our of nothing.
2) John Calvin, Christian Classic Ethereal Library, 『Calvin’s Commentaries Complete』 ‘Commentary on Genesis’, p. 32. ‘For the same reason he calls it the abyss and waters, since in that mass of matter nothing was solid or stable, nothing distinct.’
3) 빛은 파동으로서 질량이 없다고도 하고 입자로 볼 때는 질량이 있다고도 한다. 또 정지 했을 때는 질량이 없지만 운동할 때는 질량이 있다고도 한다. 빛을 입자로 보면 우주의 약 4% 정도를 설명하게 되고 나머지는 가상으로 추정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96% 정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는 것이 혹시 창세기 1장 2절의 양태와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4) John Calvin, Christian Classic Ethereal Library, 『Calvin’s Commentaries Complete』 ‘Commentary on Genesis’, p. 34. ‘Let there be light. It we proper that the light, by means of which the world was to be adorned with such excellent beauty, should be first created.’
5) 선한용, 『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p. 34, 47.
6) 선한용, 『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p. 51~53.
7) 선한용, 『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 42.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모든 피조물은 무로부터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피조물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도록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무’로의 경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실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하게 된다.
8) Sigmund Freud, C. S. 홀, R. 오스본, 『프로이트 심리학 해설』 설영환 편역, (서울: 도서출판 섬영사, 1985), p. 153. 프로이트는 본능이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는 ‘삶’에 쓰이는 본능의 그룹이요 또 하나는 ‘죽음’에 쓰이는 그룹이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은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우주적 힘이 작용하여 생명체를 만들어 낼 당시부터 이 생명체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이라고 믿었다.
9) 왜냐하면 나의 탐욕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살다가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자살할 경우 그것이 겨우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정의는 올바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인생이란 내가 주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이유에서이든 중간에 내 맘대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자살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큰 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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