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敎와 이슬람교와의 관계
[역사저널=김규동 박사] 景敎와 이슬람교와의 관계 <4회> »
the Relation between Jing-Jiao and Islam
당대 대부분 시기는 노자를 숭배했기 때문에 도교의 위상이 대체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교 역시 측천무후의 비호에 흥한 적이 있었다. 선비들은 육예(六藝) 외에도 불교의 참선에 관련된 내용이 주 화두로 유행하였지만 그렇다고 유교의 사상이 사회의 근본으로서 흔들린 적은 없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A.D. 610년에 창립한 것이다. 중국으로 언제 전래되었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학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한 가지가 확실한 건 그 전래 시기가 景敎보다 늦다는 것이다. 대략 8세기 초에서 중기 사이에 유입된 것 같다.
전입된 길은 景敎와 같이 육로인 실크로드를 경유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둘의 중국 유입방식에 있어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아직까지 이슬람교와 景敎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적었고, 특히 7~11세기의 두 종교에 연구가 거의 없었는데 그 원인은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 때문이다. 7~11세기 이슬람교와 景敎가 공존하는 지역은 주로 중국 서북일대로, 특히 신강지역이었는데, 신자들이 주로 실크로드 유목민족들이 위주였다. 출토된 문서자료로 봤을 때, 위구르어, 소그드어 등 민족 언어였는데, 이들 언어를 모르는 연구학자들에게 이 둘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다른 하나는 7~11세기에 景敎는 일반 사람들의 주요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景敎 신자의 수는 불교, 마니교, 이슬람교에 비하면 극히 적은 것이었다. 때문에 양자 관계에 관한 연구 자료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본 연구도 역시 7~11세기 신강지역에 景敎와 이슬람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똑같은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신강지역에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지를 통해 그 시기에 이슬람교의 景敎에 대한 태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1928년 영국의 이라크 이민학자 알폰세 밍가나(Alphonse Mingana)가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제12호에서 영문판 논문인 <주교 디모데가 칼리파 마흐디 앞에의 변증서>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기원 781년 전후에 압바스왕조(Abbasids)의 무슬림과 景敎徒 간의 관계는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우호적인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그때가 781년 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중국에서 설립된 시기이기도 한다. 아마도 같은 시기의 당에 처음으로 중국에 진입한 무슬림들이 그 종주국인 아랍제국의 영향을 받긴 하였지만, 처음부터 景敎徒들과 충돌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당대 말기부터 송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변화가 생겼는데 우선, 唐 중기 이후로부터 많은 아랍 상인과 병사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후일 그들은 본국 페르시아의 정치, 종교 형국의 변화로 인해 그들 중 대다수가 중원지역이나 신장지역에 남게 되었고, 무슬림들이 처음으로 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는, 당대 말기부터 원나라가 세워지는 시점에 이슬람이 정착하는 당시 중국 전역에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곤혹을 치르는 중이었다. 무슬림과 景敎徒들이 밀집한 신강지역에서도 고창 위구르왕국, 카라한왕국, 우전왕국 등 三國이 첨예한 대립 중에 있었다. 그 중에서 고창 위구르왕국은 종교에 관한 관용정책을 시행하였고,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불교나 마니교(摩尼敎)를 많이 신봉하였는데, 일부는 景敎를 믿기도 하였다. 이는 고창 위구르 시기의 출토된 벽화와 유적지, 유물을 통해 증거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카라한왕국은 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종교 확장정책을 시행하였다.
우전 왕국은 대대로 불교를 지지하는 지방정권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신강에서 살고 있던 이슬람 신도와 景敎徒의 관계가 어떠했는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광범위한 확장은 카라한왕조(Karakhanid dynasty)의 대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고 한다. 카라한 칸이 이슬람교를 믿은 후에 기원 960년에 이슬람교가 카라한왕조의 국교가 되었으며, 이것은 현재까지 이슬람교가 신강에서 건재할 수 있는 견고한 디딤돌이 되었다.
카라한史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카라한 칸에게 상당히 큰 평가를 하였는데. 이 왕은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데 공을 세우기로 유명하다, 그는 수많은 불교도와 景敎徒로 하여금 무슬림이 되게 장려하였다.” 이것은 신강지역의 景敎徒들이 카라한왕조의 이슬람 종교정책과 군사공격으로 인해 큰 핍박을 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핍박 때문에 카라한 왕조에 있는 景敎徒들은 관용 종교정책을 실시한 이웃나라인 고창 위구르왕국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비록 “카라한 왕국과 고창 위구르왕국은 종교정책에 큰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결코 무장충돌은 없었으며, 이슬람 역사기록에도 이에 관한 직접적인 관련내용 기록은 없었다.”
고창 위구르 왕국 경내에서 많은 景敎 유적지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景敎徒들이 위구르 왕국에서 보호를 받기도 했다는 증거들이다. 이로 인해, 원나라 때 많은 위구르의 景敎徒들이 신강에서부터 몽골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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