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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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 지음, 박중서 옮김/ 출판사: 뜨인돌 »
용서하는 것과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건 다른 것…
나는 그가 내 침묵을 탓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기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다. 본인 스스로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야만적인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살인자로 거듭난 사람이. 게다가 그는 당장 내일이라도 자기와 똑같은 다른 살인자의 손에 죽어 없어질지도 모르는 내게 고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의 고백에는 분명 진정한 참회의 흔적이 있었다. 아니, 구태여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투, 하다못해 그가 유대인인 내게 고백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는 충분했다. – [책 내용 중에서]
책은 1ㆍ2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1부는 “해바라기”라는 부제가 있는 글로 저자가 나치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과 전쟁이 끝난 후 저자가 만났던 사람의 가족을 찾아간 이야기입니다. 2부는 “심포지엄”이란 부제처럼 1부에 있는 사건에 대한 53명의 견해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는 어느 게 옳다고 특정할 수 없습니다. 1부의 사건 전모를 전해 듣고 답한 53명의 면모도 다양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지도자에서부터 중국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피해를 겪은 사람까지 두루두루 모두 다 있습니다.
1969년 한 유대인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에세이 형식을 빌려 출간한 게 책의 시작입니다. 이때 책 제목이《해바라기》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 저자의 질문에 전 세계 지식인, 종교인, 학자들의 답변이 담긴 책이 나왔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1997년에 출간 책을 토대로, 2019년에 개정 출판한 책입니다. 그 사이에 저자의 질문에 답한 사람이 늘어났기에, 심포지엄에 참여한 사람이 53명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관해 더 많은 시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SS대원이 유대인 수용소에 있던 생면부지의 저자를 불러 죄의 참회를 했을 때, 저자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를은 SS대원이 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유대인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그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사람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죽기 위해 유대인에게 참회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두 번째 카를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저자에게 유품만 남긴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저자가 카를의 가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카를의 어머니를 만난 저자는 ‘그들이 생각하던 착한 아들 카를’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89명이 되는 일가친척을 나치의 학살자들에게 잃고, 아내와 둘이서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저자에 대해 ‘이스라엘의 유명한 나치 사냥꾼’이란 별명과 ‘남미로 도주한 수많은 나치 잔당 전범들을 체포한 전설적인 인물’이란 소개가 나옵니다. 저자가 인류에게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행동했던 결과물이 이 책이지만, 그가 일궈낸 업적으로 인해 만들어진 별명도 그가 감내해야 할 역사의 현장입니다.
2부에서 53명은 자신이 살아내야 했던 일을 통해 저자가 겪었던 일을 바라봤고 그걸 말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않았던 게 더 잘한 일이다’란 갖가지 반응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으로 응축됩니다. 용서와 용서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한 상반된 시각 역시 역사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돼, 인간에게 역사의 진보를 위해 만들어야 하는 강력한 방어막의 설계도를 제시합니다.
대안학교에서 북향민을 가르친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에서 고위층에 있던 사람이 대한민국에 와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친 이들 중에는 북한의 고위층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요? 책을 덮으면서 이 둘이 자꾸 겹칩니다. 북한에 있을 때 대한민국을 향해 온갖 잡설(雜說)을 남발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느닷없이 고통을 줬던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쥔 채 나타났을 때, 그들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용서하는 것과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건 다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 사건이 준 메시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 메시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훗날 다른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저자가 남긴 메시지를 통해 교훈을 얻고 인류가 각성해서 저런 일이 앞으로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참상이 말해주듯 저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남겨진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런 메시지를 알게 된 후로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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