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공 지능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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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 책과 인공 지능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 2023/03/27 »
자신들이 원하는 답 만 찾으려해, 얄팍함이 문제가 되는 이 때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나와 다른 시각의 글을 읽지도 않고 클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 의견에 맞는 글이 나의 입맛에 맞고 편향된 것일 경우에는 사실은 선동이고, 호도이고 잘못된 것일수도 있습니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임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클릭하게 되고 그것은 검색에서 최상위를 차지해 또다른 편견을 낳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도, 지식도, 이론도, 논리도 아닙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
들어가는 말
군사용으로나 쓰였던 인터넷이 PC의 보급으로 우리의 생활 속 깊이 들어 올 때의 화두는 이제 활자로 된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찍어내는 신문들이며, 잡지며, 서적들이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활자로 찍어내던 신문의 판매 부수는 현저히 줄어 들었으며 포탈 사이트와 인터넷 신문이 대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이제 우리는 인공 지능 시대로 들어 가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생각-행동-감정의 반복이 지속되어 여기에 이러한 양식의 반복이 거듭되는 시간이 흐르면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두고 인류는 초일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발상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신의 영역에서 서서 도발하는 반역적이며 비신앙적인 시도들입니다. 인공지능이 주는 놀라운 변화의 이면에는 진화론을 기초로 한 인간 발전 이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물학적, 기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발전한다면 어느 순간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종이 될 수 있고 이러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 개념의 문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초인류 시대입니다. 인간의 진화와 기술의 궁극적 발전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내는 시대를 말합니다. 인간은 더 높은 지능을 갖게 되고, 더 오래 살며, 더 효율적인 존재로 진화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초인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며 더불어 유전공학, 뇌과학, 나노기술이 혁신을 도모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공지능 어디까지
ChatGPT 4.0 가 나왔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작년 11월에 ChatGPT 3.5가 나왔습니다.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ChatGPT 4.0이 나왔습니다. ChatGPT 3.5는 2021년까지 자료만 입력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버전의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은 갈수록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미국 변호사 시험, 의사 면허 시험, 각종 전문 시험에 탑 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공 지능은 빠르게 진일보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제를 주어도 인간의 심금을 울리고 사람의 영혼의 깊은 것도 표현하는 시를 읽노라면, 인공 지능이 지은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느 시인의 시로 치부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인공 지능이 쓴 소설이 이미 출판되어 서점에 선 보이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이 만드는 설계도는 생활의 편리함과 환경 친화적 요소까지 고려한 섬세함이 돋보이며 때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기 합니다.
베토벤의 미완성 교향곡 10번 1악장을 완성해서 곧 실제로 공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카라얀 재단의 마티아스 뢰더 박사와 인공지능 전문가들 그리고 음악학자들의 연합 작품입니다. 베토벤이 완성한 9번까지의 교향곡들의 특징과 강조점 그리고 경향들을 인공지능이 deep learning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게 한 다음 미완성 교향곡 10번의 1악장을 먼저 완성케 한 것입니다. 앞으로 10번 전체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여기에는 베토벤 연구로 매우 높은 명망을 얻고 있는 베토벤 하우스의 연구소장인 크리스틴 시커트 박사도 이번 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환자 면담은 환자 진단으로부터 처방까지 오진율도 최소이며 정확도는 95%이상을 자랑하기에 불과 6개월 또는 1년 안에 새 버전이 나오면 이제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능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인공 지능이 만들어 낸 그림과 창작품들이 벌써 저작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주어도 완벽에 가까운 설교문을 제공하기에 목회자들의 고민이 많이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논문 주제를 주어도 문자를 보내자 마자 바로 답변이 오니, 대학 도서관 서가를 누비며 찾거나 색인 카드를 찾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ChatGPT 3.0. 그리고 ChatGPT 3.5 와 ChatGPT 4.0을 보면 그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타임즈의 2023년 3월 15일자 보도에 따르면 ChatGPT 4.0 버전은 이전 버전이 “3,000단어였던 것에 비해 최대 25,000단어의 더 긴 텍스트 입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다중 모드 모델”에 의존하며 더 안전하고 사실에 입각하도록 훈련되었다”고 OpenAI의 발표를 인용했습니다. (참조: https://time.com/6263475/gpt4-ai-projects/) ChatGPT 3.5 버전은 1750억 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를 갖고 학습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GPT 4.0 버전은 파라미터 숫자가 무려 100조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정보의 양을 통해 인류의 실생활에 더 깊게 많은 영역 가운데 ChatGPT 4.0을 비롯한 인공지능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보기 목록 만들기, 병원 실비용 비교해 주기, 질병 진단하기, 법률 상담 등 이전 버전보다 5배나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5년에 걸쳐 입력해야 할 정보의 양이 5개월 만에 입력이 되었고 성능은 다섯배나 발전한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인류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게 될지는 가늠케 해줍니다.
ChatGPT 4.0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바뀌었고, 정보의 업데이트는 물론 분석 능력도 인간의 이성과 사고 기반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인공 지능으로 만드는 웹사이트가 가능하다고 해서 컴맹인 제가 한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불과 10분 만에 그럴싸한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무료였습니다. 단지 제목만 주었을 뿐인데 가공 인물의 의견을 제목 아래 넣어서 보는 사람이 실제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 잘 편집되어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책
20여년 전 논문을 찾기 위해 제목별, 주제별, 출판사나 기관별, 그리고 이름으로 된 대학 도서관 논문 색인대에 무릎을 조아리고 찾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새롭게 시작된 구글의 검색은 필리핀에서 10여년 선교 사역 가운데 인터넷 연결은 달나라 애기인 것으로 알고 살아왔던 저에게는 신세계였습니다. 60년 대 출간된 월간 문학, 월간 소년, 삼중당에서 출간한 월간지 <소년 소녀 만세>과 또 다른 잡지 <새벗>은 제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던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인쇄되었던 종이의 질이 시멘트 종이보다 조금 나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삽화나 간단한 제목만 보고서도 얼마나 설레던지요! 그 글들이 저의 꿈을 나르게 해 주었고, 언제나 상상의 나래를 나르는 지경만큼 사색의 지평을 넓히고 생각하는 만큼 가능한 이성의 한계도 보았고 능력도 보게 만들었습니다. 개인이 구입하기 쉽지 않지만 학교와 공공 도서관이기에 늘 비치되어 있던 민음사, 창작과 비평사, 현대문학사, 생활사에서 나오는 각종 잡지와 서적들은 지금도 저의 영혼의 서가 안에 비치된 가보처럼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받은 감흥이 자연과 우주와 생명체를 통해서도 크게 남아 있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책을 통해 받은 감흥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비록 가난해도 저의 사색의 폭은 제한 받지 않았으며, 성적순이 아닌 읽은 만큼 알려주고, 생각하는 만큼 깊어지고, 느끼는 만큼 감성도 풍요로와지고, 다양한 주제와 내용을 접하는 만큼 학문과 주제와 철학적 명제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제공하는 책은 적어도 저에게는 만능키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때 가는 수학여행을 저는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3-4일동안 수학여행을 떠나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시 저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홀로 크나큰 도서관에 남아 마음껏 책을 읽으며 행복해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새로운 자각에 인간은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체득한 것 같습니다. 책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정말 무엇에 몰입한 아이처럼 처음에는 심리학 책을 읽다가, 초심리학 책으로, 그리고 심령술로, 마인드 컨트롤(당시에 새롭게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최면술은 물론 인지과학, 행동과학, 발달 심리학, 심리치료학, 교육 심리학, 신경과학(당시에는 뇌과학에 관한 책을 많이 접할 수 없었음 )등으로 저의 책의 영역은 깊어지고 넓어졌습니다.
40-50년 전의 일이지만 책을 읽고 행복해 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읽었던 책을 되새김질 할 때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지성적 포만감에 미래의 꿈을 꿨던 소년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에 들어가니 아마추어에서 비로서 프로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60년대 그리고 70년대의 대부분의 책들이 외국서적을 번역한 것이었다면 제가 대학을 들어가서 접한 것은 영어로 된 책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이 영어 책의 바다에 그냥 다이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리학, 지구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통계학, 사회학, 종교 사회학, 철학사, 도서관학, 의학일반, 심리학, 상담학, 간호학, 보건학, 과학철학 등등 저의 학교에 먼지에 수북이 쌓인 그 책들을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매일 밤을 꼬박 세며 읽었습니다. 모처럼 길거리를 걷다 가도 수퍼마켓에 진열된 물품들이 책으로 보여 무심코 들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책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
초등학교 때 2천권, 중학교 때 3천 권, 그리고 고등학교 때 3천 권은 저에게 예행연습처럼 보여졌습니다.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급스런 양질의 종이에 전문 삽화가가 그린 듯한 대부분 미국의 책들은 60년대와 70년대에 보았던 대한민국의 허접한(?) 책의 품질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문제는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의미가 다른 뜻으로 표현되기도 하기에, 원서를 읽게 되면 번역 과정 없이 있는 그대로 영어로 읽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모르는 단어를 위해 웹스터나 콜린스 사전을 찾으면 나오지 않던 단어도 많았고 신간일 수록 신조어가 많았습니다. 인간의 언어의 문법 체계와 단어 및 이디엄의 한계에 부딪힌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솔로몬이 천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주님 저에게도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신 것은 네가지 독서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학문화되고 제도화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지금도 책을 보면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저는 깊이가 있는 책을 먼저 고르고 같은 종류의 책이라 해도 기도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서 그 책을 꼭 네 번씩 읽습니다. 당시에 사용했던 저의 독서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완독 (完讀)
서양에서는 이러한 독서를 대화 읽기(Dialogic reading)라고 부릅니다.책을 읽다 보면 때론 문장마다 어려운 어휘나 문맥 그리고 매우 전문적인 용어들이 나옵니다. 첫 장부터 때로는 중간에 이러한 부분들을 만나면 전체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지체되거나 또는 완독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해도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간혹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더 집중하며 빠르게 다 읽어 나갔습니다.
선독(善讀)
서양에서는 스키밍(skimming)이라고 해서 ‘흩어읽기’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선독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지만 상통하기는 합니다. 제가 읽었던 선독은 첫번째 읽었던 완독 즉 전체의 의미를 파악한 이후에 두번째 읽을 때에는 전체에서 빠트린 것은 없는지, 그리고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첫번째와 두번째 읽은 책이 서로 보완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정독(精讀)
서양에서는 정독을 ‘thorough reading’이라고도 하며 또한 분석적 독서(Analytic reading)라고도 합니다. 저에게는 적어도 첫번째와 두번째 읽었던 완독과 선독 독서법은 이 세번째 단계에 이르기 위함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책을 읽으면 정독하라고 애기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정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첫 장부터 정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헤겔의 법철학,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정독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헤겔의 법철학은 이 책이 쓰이던 독일의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근대국가로 출범조차 할 수 없는 봉건적 체재에 있던 독일이 지금의 폴란드와 덴마크 그리고 발틱 3국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프러시아가 태동하던 시기에서 구심점이 없던 독일 국민에게 준 철학적 그리고 정치적 통찰에서 나온 책입니다.
정독은 완독과 선독과 같은 두 번에 걸친 독서를 마친 다음에 주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저는 정독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책의 각 문장이 살아서 움직이고, 저자의 심리적 상태와 목적 그리고 그가 구상하는 아이디어까지 파악하는 즐거움을 선사 받습니다. 왜 그리고 어떤 목적에서 이 책을 썼는지를 파악할 때의 기쁨은 이러한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정독에 이를 때에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연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이 급증했습니다. 그래서 한 분야를 읽으며 쉬지 않고 또 다른 분야를 그리고 또 다른 분야를 읽다 보니 봄이 오는 것도, 여름이 온 것도, 가을이 지나간 것도, 겨울의 한 가운데 있음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의 난로가 북풍 마파람에 꺼져 동상이 걸릴 듯한 손으로 호호 하며 읽다가 겨울이 왔구나 하고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계절을 잊고 책에 빠진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책을 읽으니 즐겁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영어로 읽으니 번역하는 오류도 잡아 주고,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이 기초체력이 되어 학문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숙독(熟讀)
숙독은 익숙하게 잘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깊이 읽는다고 해서 ‘deep reading’이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의 ‘deep learning’은 ‘deep reading’에서 왔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정독은 본 게임이라면 숙독은 완결편입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빠트린 것은 없는지,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미처 잘 못 이해한 것은 없는지를 돌아 보면서 읽어 갑니다. 완독을 할 때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읽어서 군기가 바짝 든 초기 상태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모르고 읽기에 우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선독을 할 때에는 휴전선 보초를 선 초병처럼 어디에서 적군이 나타날지 눈을 부라리고 바라보면서 읽습니다. 즉 세밀한 부분, 작은 부분이라도 빠트려서는 안되는 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눈으로 보고 빠진 부분을 읽어 나갈 때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 세번째로 정독을 할 때에는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성취감과 만족감 그리고 때로는 포만감을 느끼며 읽습니다. 정독은 완성품을 완성품 답게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숙독을 할 때는 종갓집 씨간장의 깊은 맛을 음미하듯 그 책의 모든 언어가 살아 움직이고 생동하는 기쁨을 맛보며 읽습니다. 정독을 할 때에는 남의 책을 읽지만 숙독을 할 때는 그 책이 이미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스쳐 지나갈 수 없듯이 적어도 저에게 서점은 유일한 안식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헌 책방에서 때로는 서점에서 반드시 읽어야할 책을 발견하게 되면 출판사 외판원을 하거나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얻은 수입으로 원하는 책을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청계천 헌 책방들을 탐방할 때 마다 제 양손에서 책들이 가득했고 제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의 저희 집은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목회 6년이 넘는 시간동안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그 가난한 초보 목회자가 이삿짐은 별로 없는데 책은 많아서 운반하는 트럭 두대에 실어도 부족했습니다. 웬만한 집이 아니면 제가 갖고 있는 엄청난 책을 들여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책을 떠난 필리핀 선교사역 그리고 다시 책을 찾은 영국
그토록 책을 좋아하던 제가 필리핀 선교사로 가게 된 것입니다.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책이 없이는 저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던 제가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이 없이도 가능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종일토록 전도하고,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목양하는 일이 이토록 고귀한 일임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 제가 필리핀 선교 사역 10년을 마치고 영국 버밍엄 대학교에 박사학위를 하러 갔습니다. 펜을 놓은 지도 16년 그리고 목회와 선교 사역을 한지 16년이 되어서 학문 세계는 별세계처럼 느껴질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전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전혀 제가 접한 적이 없는 영역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Judaism, Post-Modernism, Secularization, 부흥과 대각성 운동등은 거의 잘 모르는 분야였습니다. 유럽 최초로 이슬람을 연구하고 새로운 학문으로 도입한 버밍엄 대학교에서 코란을 통째로 암송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랍어로 코란을 암송하는 사람들하고 이슬람을 같이 공부하는 것 자체가 저와 체급이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랍어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및 헬라어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유치원 수준인 제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하고 그 어렵다고 하는 고전 히브리어를 이미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니 제가 읽었던 책을 기초로 한 유럽 문명사는 개괄적인 것이었고, 유럽 각 국가와 지역에 따라 거대한 나무에 있는 수많은 잔가지들은 그 분야별로 전문가 집단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문명을 기독교 문명이라고 말했는데 기독교가 빠지게 된 유럽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몇 줄도 안되는 신문 기사나 단편적인 이해로 유럽 기독교 쇠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여년 전 제가 영국에 가보니 저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상태로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이 세상에서 먼지보다 작게 느껴진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전도하고, 지도자 훈련하고 목회하던 필리핀이 그리웠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16년의 학문적 공백을 빌미로 이 과정을 중단하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제가 하는 박사과정(PhD)만 하고 이슬람, 세속화, 유대교, 후기 근대주의, 부흥과 대각성운동 등은 아예 거들떠도 안보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학문들은 과목만 해도 10학기 또는 40학기 이상 필요하였습니다. 거대한 대학 전체의 커리큘럼을 분석하고 제가 참여할 수 있는 과목들을 추렴하니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쏟아야 했습니다. 숙소에 와서도 필요한 required reading을 하고 또한 학술 발제 준비를 하면 새벽 네 시를 넘기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는 것이 없으니 백지에서 시작했지만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알아가는 과정이 저를 더 채찍질하였습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에 평균 2시간에 2시간 반을 수면을 취했습니다. 한 번은 실수로 3시간을 잔 적이 있습니다. 정말 9시간 또는 10시간 자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대학교 때 접했던 미국 책들과 다르게 학문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럽의 책들, 특히 영국의 도서관은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유관분야가 남다름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국이라고 해도 뿌리는 아니고 가지에 해당하고, 학문의 깊이가 일천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보낸 18개월의 프로그램 기간 동안은 미국사, 교회사, 미국 문명사를 연구하였습니다. 이때 역시 유럽에서 공부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경에는 아이비 리그 그 중에서도 하버드와 같은 대학의 학문적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학문의 뿌리는 유럽이기에 유럽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을 이슬람 문명권으로 볼 때 전혀 다른 개체로서의 연구가 필수불가결합니다. 기독교 문명의 기초(Foundation)에 해당하는 Judaism 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놀라운 영감과 성경의 이해를 돕습니다.
ChatGPT 그리고 분별력
저는 최근에 ChatGPT가 주는 여러가지 역할과 변화들을 탐색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유도하는 만큼 ChatGPT 4.0는 똑똑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합니다. 우문현답이 나오기도 하고, 평범한 질문에도 전체적 안목을 지닌 모범답안을 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ChatGP4.0를 써 보고서 저의 입장은 Singularity(특이점)이 올 수 있다는 개연성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인공 지능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 지식, 정보, 지능을 다 능가하고 훨씬 초과하는 상황이 와도 인공 지능을 대하는 저의 입장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단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많은 사고를 요청하지 않는 지엽적 사건 사고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하게 답변할 것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다 쏟아 부어서 답을 하도록 하는 엔지니어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행동주의 과학자들은 모두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설계 가운데 인공 지능이 성실히 만들어진 체계안에 인간의 디자인데로 움직입니다. 지식과 정보와 문학과 사고와 철학 가운데 인공 지능이 여전히 초월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를 수십년 연구했기에 알고 있음에도 ChatGPT 4.0에 질문하면 때로는 놀랍게 그리고 때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상적 답변을 내 놓습니다. 추상적 답변을 내 놓은 ChatGPT 4.0에게 수십개의 다양한 형태로 질문을 던져 보아도 여전히 비슷한 답변만을 내 놓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공지능의 한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디자인하고 operational 하게 하는 엔지니어의 한계라고 보았습니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이것도 극복되겠지요!
우리는 지식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만큼 가짜 정보가 사실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카더라”를 가지고 정설처럼 어떤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인터넷에 퍼 나르기와 댓글 그리고 그 퍼 나르기가 정설이 되어 덧붙여지고 또 더해져서 대학교 강단에서 교수들이 인용합니다. 그리고 서점가에는 “카더라”가 실제 있는 사건으로 기술되어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카더라”의 당사자와 직접 인터뷰를 하거나 또는 조사를 해 본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급증하는 정보의 양이 아닙니다. 진실을 찾으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것은 매우 부분적입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언론계는 양쪽으로 나뉘어 전혀 다르게 보도하고 심층 취재나 사설은 정반대의 의견을 정론 보도처럼 내 보냅니다. 국가 지도자들의 현장 취재를 담당한 기자들 가운데서도 정 반대의 보도를 내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Judaism이나 이슬람, 부흥운동에 관하여 구글이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검색 기능을 사용하여 찾다 보면 말도 안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이 되어 있고, 진실이 되어 있고 심지어는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전문적 논문 기관 뿐 아니라 구글 검색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 번은 한 주제로 3천 번 이상을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분야를 현장 조사를 했고 실제 field research 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검색한 대부분의 내용은 요약, 개괄, 부분 소개, 도치, 왜곡, 정반대로 인용, 심각한 자기 편향 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구글이나 Bing이나 ChatGPT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학문적 추구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고 부분적인 전개와 모호한 진술에 신물이 나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 3대 출판사에 저의 책을 출간하고자 편집자들과 대화할 때 한결같이 그들이 한 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인들은 깊은 책을 원치 않습니다. 어려운 책은 더더욱 원치 않습니다. 아주 단편적이고 쉽고 간단하며 평이한 책을 원합니다. 깊이가 있는 책은 팔리지 않으니 쉬운 책을 써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저는 학자로서 대중성에 편승하지 않고, 쉽지 않아도 학자의 양심을 팔면서까지 그들의 주문대로 따라 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적게 팔려도 찾는 자에 오아시스를 제공하는 책이기를 원했습니다. 최근 출판하는 책들은 보편적으로 매우 얇습니다. 읽다 보면 저의 경우 20-30분이면 한권을 읽습니다. 책을 구입해서 읽다 보면 깊이와 성찰과 고뇌가 엿보이질 않는 책이 너무 많습니다. 책도 이러한데 인터넷을 통해 읽는 웹사이트, 논문, 블로그 등의 글은 때론 정말 막 읽으려고 시작하는데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지듯 서론 조금 전개하다가 중단되듯 멈추어 버린 글들을 접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얄팍함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 만을 찾으려 합니다. 그 답이 나오면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춥니다. 마치 병원 주소를 물어 보거나, 두통에 필요한 약명을 묻거나, 오늘 주가나 잘나가는 종목을 묻거나, 스포츠 게임 결과를 묻는 단답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 성찰하며 고뇌하는 글들을 찾다 보면 뒤로 쭈욱 밀려 있고 상업적 목적을 가진 매우 평범한 블로그나 글들이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신문기사, 심층 보도 기사도 더 이상 심층 기사가 아닐 때 많습니다. 중국에서 30여년 연구를 한 연구 소장이 이렇게 증언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중국 관련 기사를 보내면 제발 중국 관련 글을 올리지 말라는 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깊게 쓰면 독자들이 읽지 않으니 쉽게 쓰라고 주문한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나와 다른 시각의 글을 읽지도 않고 클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 의견에 맞는 글이 나의 입맛에 맞고 편향된 것일 경우에는 사실은 선동이고, 호도이고 잘못된 것일수도 있습니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임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클릭하게 되고 그것은 검색에서 최상위를 차지해 또다른 편견을 낳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도, 지식도, 이론도, 논리도 아닙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글을 맺으며
청계천을 헤매며 원하는 책을 찾던 소년 그리고 청년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 원하는 책이 손에 잡혔을 때 너무 읽고 싶어서 잠자는 것도 잊고 다 읽고 나서야 잠시 눈을 붙였던 그 시절이 그립니다. 이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주일에 적게는 20권 많게는 40권의 책을 주문합니다. 분명히 논문이나 전자 자료로 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통전적 시각에서 저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마치는 글이 담긴 책에는 기승전결이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으며, 또한 강조점이 있고,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똑같은 사안을 갖고서도 심미안을 갖고 분석하기도 하고, 통찰력을 갖고 예지력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으며,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깊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글도 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에게는 두 개의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사람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을 아는 지식은 법, 제도, 사회학, 인문과학, 자연과학, 응용과학 등 많은 학문 영역의 지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지식의 끝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연과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끝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저는 시편 14편 1절부터 3절로 저의 의견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보스톤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김종필 목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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