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부 사태를 통해 본 북한 붕괴론
Dr.ElijaKim ◙ Photo&Img©ucdigiN
[영성칼럼=Dr. Elijah Kim] 북한 내부 사태를 통해 본 북한 붕괴론 » 2023/04/03 »
북한 붕괴를 가늠할 수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짚어보면…
남북한 통일 가운데 가장 가능한 시나리오는 건전한 북한의 지성인 그룹이 체재를 전복하고 북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면 이때 남한과 미국 그리고 UN이 평화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듯 이러한 영적 출애굽의 역사는 오직 기도와 간구만이 이루실 줄 믿으며 오늘도 두 손 모으며 기도…
들어 가는 말
북한 붕괴를 가늠할 수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
1956년 종파 사건
1967년 김영철 사건
1976년 해주 폭동
1987년 온성 정치범 수용소 폭동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
1998년 황해 제철소 시위 사건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 사건
제1차 군사 쿠데타 모의
제 2차 군사 쿠데타 모의
쿠데타 실패와 숙청
6군단 군사 반란 모의 사건
6군단 사태의 발단
여성정보원 역할
6군단 군사 쿠데타 모의에 대한 수습
북한 사태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북한 내부 사태 문제 연구에 대하여
북한 붕괴론 및 체재 변혁론
글을 마무리 하면서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승공통일,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통일 그리고 그 이후의 정권들은 이구동성으로 평화통일을 천명했습니다. 북한 정권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습니다. 적화통일을 이룬 나라는 남베트남을 점령한 북베트공에 의한 베트남이 있습니다. 물론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적화통일을 이룬 중국공산당(CCP)도 있습니다. 반대로 평화통일을 이룬 나라도 있습니다. 서독과 동독입니다. 분단을 겪지 않은 동유럽 국가들, 발칸 국가들, 국가로 독립하게 된 구 소련 공화국들은 대체적으로 평화적으로 국가 수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생화학무기, 전술핵, 심지어 전략 핵잠수함과 같은 비대칭 무기를 증대하고 있는 북한을 보면 과연 평화통일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통일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자 염원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북한 공산주의 즉 조선로동당의 붕괴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 왕정체재가 무너져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평화통일과 복음통일을 가늠하기 위해서 저는 이번 글에서는 실제적으로 북한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 즉 군사 쿠데타 사건과 여러 사건들을 짚어 봄으로 북한의 내부 붕괴를 통해 남북 통일을 가능할지는 살펴 보고자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다양한 북한 붕괴론을 살펴 볼 예정입니다.
북한 붕괴를 가늠할 수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통일 또는 북한 붕괴가 턱밑에까지 온 사건들이 실제로 몇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회주의 체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사회주의 밖의 체재를 건설하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견고한 것처럼 보이는 북한 체재가 거의 무력화되거나 아사 직전에 이른 적도 있으며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북한이 붕괴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실패로 끝난 군사 반란과 쿠데타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열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북한의 붕괴는 내부 모순에 의한 붕괴 그리고 외부적인 개입이나 충격에 의한 붕괴, 그리고 내부적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 모든 결부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한 붕괴입니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안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6년 종파 사건
한국 전쟁이 종식되고 전쟁 수습에 들어 간 북한의 조선 노동당에는 다양한 파벌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소련파, 연안파 등입니다. 1956년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 주도 권력 집중에 반대하여 비판하자 김일성을 지지하는 만주파(빨치산파), 갑산파들이 조선의용군을 이끌던 거물 김두봉을 비롯해 그 외에도 연안파와 소련파들을 종파 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건입니다. 특히 연안파인 이필규, 윤공흠, 서 휘, 그리고 김 강이 중공으로 망명하면서 소련과 중공과의 외교개입으로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반대파를 반종파 분자로 몰아 견제 받지 않는 1인 독재 체재를 수립할 수 있었고 만주파의 도움으로 김정은까지 이르는 3대 세습 통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김일성이 이 사건을 수습하지 않고 많은 다양한 파벌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리고 소련식 그리고 중국식 사회주의 정권을 유지했다면 서독과 동독과 같은 통일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1967년 김영철 사건
이 사건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의 친인척인 김영철이 군사 정변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하고, 김영철은 처형되었습니다. 김일성의 막내 동생인 김영주도 연루되어서 그는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었다가 나중에 다시금 회복됩니다.
1976년 해주폭동
해주폭동은 1976년 8월 12일 발생한 북한의 해주시에서 김일성의 통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에 북한 당국은 4개 여단 규모의 특수부대를 파견해 무자비한 진압을 벌여 무려 3만명의 사망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해주 폭동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학살이기에 해주 학살이라고도 부릅니다. 김일성은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을 뿐 만 아니라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해주 시민과 인근 개성 시민까지 수용소에 수감시키고 평양 주민들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해주와 개성으로 강제 이주시켜서 도시를 물갈이하고 반란의 불씨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김일성의 잔학무도함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만약 해주에서 일어난 이 봉기가 체재 전복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전국적인 규모로 번져서 전 북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면 큰 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 역대급 큰 사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987년 온성 정치범 수용소 폭동
1987년 온성 정치범 수용소 폭동은 함경북도 온성 제12호 정치범 수용소에서 자행된 대학살 사건입니다. 무려 1만 5천명의 정치범 가운데 5천명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인근 수용소에 경비병으로 입대했던 안명철(33)씨가 탈북하여 증언함으로 이 사건의 일부가 알려졌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한 정치범이 심하게 구타를 당하다가 그를 때려 눕히게 되고, 현장에 있던 정치범 200명이 보위원 가족까지 살해하게 되면서 합세한 규모가 5천명에 이르게 됩니다. 수용소 경비대에서 곡사포와 기관총으로 5천명 전체를 몰살했다고 합니다. 이후 온성 수용소는 해체되고 항거에 가담하지 않은 나머지 정치범들은 타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고 합니다..
1992년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 사건
이 부분은 아래에서 따로 다룰 것입니다.
1995년 6군단 군사 반란 시도 사건
이 부분도 아래에서 따로 다룰 것입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
1994년 7월 8일 북한은 공식적으로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는 사망 직후가 아니라 조금 시간이 걸려서 보도되었습니다, 김일성 사망이 몰고 올 사태가 통일로 이어질 수 있었을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면담했고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에 평화통일을 바라는 많은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는 198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면 체재 경쟁을 일삼던 김정일이 장성택을 통해 평양 축전을 위해 무리하게 재정을 낭비하였고 더불어 북한 곳곳에 일어난 토지 황폐화와 잇따른 홍수와 가뭄이 계속되면서 식량 생산이 급감합니다. 이어서 식량 배급이 평양을 제외한 대부분에 공급되지 못하자 이에 따른 기근으로 아사자들이 속출하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북한은 3백만에 가까운 아사자들이 나오던 시기였기에 치안도, 군인들도, 국경선도 많은 영역에서 이전처럼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많은 탈북자들이 속출하였고 당시 그 현장을 다녀 왔던 저로서는 북한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 기반인 평양만을 목숨 걸고 지켰고, 더욱 더 북한 주민 전체를 볼모로 잡아 세습 정권을 지켜낸 것을 보면 북한에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해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는 정권이 손쉽게 정권을 내어 놓치는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1998년 황해제철소 시위 사건
이 사건은 1998년 북한 황해제철소 시위 사건은 북한 황해북도 신의주시의 황해제철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고난의 행군 3년째 아사자가 속출하자 황해제철소의 자재를 팔아 먹고 전선줄 및 수많은 물건들을 도둑질한 것을 조사하는 과정 가운데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는데 이를 과도하게 부풀려서 증언한 탈북민들을 통해 2001년 모 월간지에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 사건’이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수십명을 탱크로 깔아 죽이고 반발한 간호사를 즉결 처형하는 등 중국 천안문 사태와 비슷하다고 해서 일파만마로 번져 갔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이는 확인되지 않은 과장 보도이고 실제로는 김정일이 사회 기강을 잡으라는 지시에 따라 밀무역을 집중 조사했고 많은 철강재가 고철로 팔리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조사 몇 달 뒤인 1998년 8월초에 인근 전차부대를 동원했고 문제가 된 간부 11명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송림시 안전부 부부장, 강철직장 보위지도원, 제철소 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선전대 대장 등입니다. 이들의 행위를 반당반혁명종파분자, 간첩 등으로 몰아 처형한 것이 또 다른 일부 언론에 의해 과장되어 보도된 것이라고 주성하 기자는 밝힙니다. (참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901/109045324/1)
또 다른 신문인 통일신문에 따르면,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전 무역국장을 역임한 탈북민 김화순씨에 따르면 북한의 2대 제철소인 일명 송림시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송림사건”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황해 제철소 사건이 간부들이 고난의 행군 말기에 식량 배급을 위해 중국에 압연철판을 팔고 대신 밀가루와 옥수수를 들여 왔다고 합니다. 이에 간부들을 급히 체포하게 되고 선한 의도를 갖고 했던 간부들이 끌려 가는 것을 본 노동자 수천명이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새벽에 탱크 부대가 진입하면서 일부 시위자 수십명이 탱크에 깔려 들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관련자 42명을 국가 반역죄로 누명을 씌어 공개 처형하고 6개월 뒤 2차로 36명을 총살했다고 합니다. 김화순씨는 대략 100명이 죽게 된 북한판 5.18이라고 말합니다. (참조: https://www.unityinfo.co.kr/32904)
김정일 암살 시도
SBS는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를 인용해 탈북한 전직 북한 정보원이 전한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는 북한내에서 김정일 암살 기도가 두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 시도는 한 남성이 자동소총을 갖고 김정일을 쏘려다 체포된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시도는 어떤 사람이 20톤 대형 트럭을 몰고와 김정일의 자동차 행렬을 들이 받은 것입니다. 김정일은 다른 리무진에 있었기에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조: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327956&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 사건
북한의 프룬제 군사 쿠데타 사건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사건이 성공했을 때에 과연 어떤 일이 가능했을지를 예측할 수 있는 실례가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만약 성공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군사 쿠데타였으며 동시에 이들 계획대로 되었다면 남한에 무력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 사건’라는 제목이 많은 것을 담아 내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푸룬제는 구 소련의 모스크바 프룬제 군사대학의 이름이며, 이 학교에 유학간 북한 군인들이 김일성 제거 그리고 김일성 사후에는 김정일 제거를 도모한 ‘모의’에서 비롯되었기에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북한 유학생들의 북한 정권 붕괴 모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초로 김일성 제거 모의를 하게 된 이 사건은 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일성 체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소련 프룬제 군사학교 유학생들
고르바초프로부터 개혁 개방을 보고 북한에도 소련과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 도입을 계획하게 됨
전쟁이나 또는 군사반란으로는 김일성 제거가 쉽지 않음으로 소수 인원으로 극비리에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는 김일성을 전차의 대포를 발사해 김일성 제거를 계획함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제거하고 북한식 정통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함
군사 쿠데타 성공시 무력으로 적화 통일을 성취함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푸룬제는 1918년에 설립된 소련군 장교 교육기관입니다.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러시아는 1917년 11월 17일부터 1922년 10월까지 치뤄진 적백내전 또는 러시아 내전(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в России)에 많은 당파들이 서로 죽이게 됨으로 러시아 인구 9천만명 중 전사자 백만명, 아사자 9백만명을 낳게 됩니다. 볼세비키 적군과 백군 표트르 브란겔(Пётр Врангель, 1878~1928) 그리고 남작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Роман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1886~1921)가 이끄는 백군 사이의 전쟁입니다. 이때 러시아 적군파의 총사령관이자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사람이 미하일 프룬제였으며 그의 이름으로 따라 세워진 군사학교 명칭이 프룬제 군사학교입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북한의 고위급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프룬제 군사학교에 유학생들을 보냈습니다. 당시 소련은 북한 내에 제 2의 소련파를 육성하기 위하여 소련에 있는 북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KGB 소속의 백인 미녀들과 술을 이용해 이들을 포섭합니다. 이러한 회유와 포섭으로 당시 프룬제 유학생들은 북한 내부정보를 돈을 받고 KGB에게 넘깁니다. 한쪽으로 KGB가 제공하는 후원과 김일성이 보내준 장학금으로 이들은 북한에 비해 매주 풍족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때 20세기에 최대 변수가 나타났는데 개혁 개방을 이끄는 고르바초프의 등장입니다. 그는 소련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었고 그 뒤 1992년 소련 제국의 공산주의는 붕괴합니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 본 프룬제 군사학교에 유학중인 유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고 북한에도 러시아식 개혁 개방을 이끌기 위해 김일성 제거 계획을 세웁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지켜 본 김일성 부자는 프룬제 군사학교 유학생들에 평양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북한으로 돌아 온 유학생들은 이미 모스크바에서 맛본 자유와 풍족한 삶과 북한의 열악한 당시의 상황을 비교하며 사회주의 체재와 주체사상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고 유학생끼리 비밀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주체사상이 아닌 정통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게 됩니다. 이들이 귀국한 당시에는 김일성이 실권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는 1991년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직을 이미 넘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김일성 그리고 김정일 부자를 제고하고 주체사상 중심에 북한식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적화통일을 완수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제 1차 군사 쿠테타 시도
비밀리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 제거 계획을 세운 이들은 인민군 창군 60주년에 거행될 군사퍼레이드를 디데이로 잡습니다. 그 날은1992년 4월 25일입니다. 북한에서는 4월 25일을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기념일로 지키며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합니다. 우리가 TV에서 자주 보는 바로 그 군사 퍼레이드가 바로 이날 행해집니다. 프룬제 군사 쿠테타 사건 모의가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기념일의 날짜를 따서 “4.25사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열병식 주석 단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서게 될 것이고 그곳을 전차의 대포를 쏘아 일거에 제거하기로 모의합니다. 당시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 부대는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수도방위사령부 전차 사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차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수도방위사령부 대신 인민무력부의 전차가 대신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면서 1차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만약 제2차 쿠데타 시도가 없었다면 후에 알려졌다 해도 대규모의 숙청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 2차 군사 쿠데타 시도입니다.
제 2차 군사 쿠데타 시도
급작스런 전차 부대의 교체에 따라 군사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4년 뒤인1996년 4월 25일 열병식에 군사 쿠데타를 다시 시도하기로 모의합니다. 제1차 시도의 실패를 겪고 제2차 시도를 주도한 사람은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입니다. 당시 홍계성은 소련 유학생활을 마치고 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것도 계급장은 김정일이 직접 달아주었습니다. 이 쿠데타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는 홍계성 뿐 아니라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 그리고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 등 북한 내분에서 신뢰가 두터운 엘리트 그룹이었기에 성공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들 모두 쿠데타 계획에 합류하였습니다. 이 쿠데타 모의가 발각된 것은 북한 내부의 정보가 아니라 러시아의 KGB가 흘린 정보를 통해서 입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후 명실상부한 북한의 실권을 장악한 김정일은 이 정보를 접하고 비밀리에 이들을 매우 조직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색출하여 숙청합니다.
쿠데타 실패와 숙청
KGB가 쿠데타 모의를 파악한 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 제1차 쿠데타 모의가 실패하자 이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KGB의 한 간부가 러시아 북한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의 정보를 전달합니다. 이를 들은 김정일은 인민군 보위국 (당시에는 보위 사령부가 아니었음)에 이들을 일제 소탕하라고 지시합니다. 1992년 4.25 쿠데타 시도 실패 후 1993년 2월 8일 프룬제 유학생들에게 중대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하고 이들을 체포할 작전조를 투입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회의에 참석하러 온 홍계성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지휘관 70여명이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습니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도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사령부는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양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 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 처형하였으며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숙청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려 5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대대적인 숙청입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의 쿠데타 모의가 실패한 후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됐고, 보위국장이었던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명의 장령과 100명의 좌급 군관 70명의 위급 군관 등 도합 200명의 소련 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이 총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소련 유학파들이 북한 당국의 감시하에 있습니다. 프룬제 4.25 사태 이후 북한은 해외 군사학교에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의 쿠데타가 성공하였더라면 이들이 세운 계획대로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살아남은 병사들이 북한을 탈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북한은 이 사건을 “반군 선동 사건”으로 발표하면서 관련자들을 처형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낸 정도로 북한 내부의 극히 소수에게 알려졌습니다.
6군단 군사 반란 모의 사건
6군단 사건은 청진시 라남 구역에 사령부를 두고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 6군단이 주도한 쿠데타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6 군단에는 보병 3개 사단, 포병 1 개 사단, 방사포 4 대 여단의 전투 부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병력의 절반은 군단 직할이고 나머지는 지방군의 충원됩니다. 프룬제 4.25 사태는 평양과 중앙 그리고 북한의 인민무력부의 최고위층이 관련된 비교적 메머드급 군사 반란 모의였다면 6 군단 사건은 북한 내부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실체와 영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최초의 시도를 했던 6군단 사건의 주모자인 정치위원의 이름이 일반에 알려진 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모 정치위원이라고 표현합니다. 6군단 사태 후 김정일은 아예 6군단을 해체해 버렸고 대신 이들 대부분을 강원도와 함경남도 주둔군으로 보내어 재배치했습니다. 이 일에 관련된 탈북자들의 증언과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심층 보도들도 있습니다.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는 전체적인 내용에는 이견이 거의 없지만 6군단 사태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평가절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예 이 사건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실제적으로 최초의 입안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진 6군단 정치위원이 어떤 동기와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추정되는 것으로 6군단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을 포위하는 내전을 일으키거나 한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함에 오게 한 다음 특수 부대가 평양을 잠입하여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애기가 있으나 어떤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북한 평양 김일성대학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김정일 군부를 장악하고자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김길선 기자와 전소현은 6군단 사건이 군사 반란이 아니라 두만강 접경지대와 국경지대에서 자본주의의 돈의 맛을 본 사람들이 그 돈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려고 부대를 해체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6군단 사태가 밝혀진 후 장성급을 포함한 인민군 간부 40명이나 처형당하고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집니다. 1995년 6군단 사건에 대해서 1999년 워싱턴 타임즈 빌 거츠 기자가 공개한 미국 행정부 극비문서에도 쿠데타시도가 있었다는 여러가지의 증거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형태의 문서와 논문 그리고 자료를 참조하기도 했지만 생생하게 이 사건에 관련된 탈북민들의 증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북한에도 북한 내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군사 정변이나 반란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을 한번 돌아보고 그 실체를 알아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6군단 사태를 말하고자 합니다.
김정일에 의해 해체되기 직전의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에서 접경지대의 수비군 역할을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이어진 탈북의 행렬과 북한에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국경 무역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수비군의 역할도 중요해 진 것은 재화와 무역을 통한 많은 돈이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남한에 온 탈북민 대다수가 함경남북도와 양강도 출신이 많은 것은 두만강을 건너 온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6군단 사태의 발단
프룬제 4.25 군사 쿠데타 모의와 마찬가지로 6군단 사태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김정일 권력 승계의 시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6군단 정치 위원은 우리나라의 중장에 해당하는데 그는 김정일 지도체제에 불만을 품고 김정일 체재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도모하게 됩니다. 나중에 단행된 숙청 그리고 군단 재배치 등을 얼마나 이 사태가 큰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쿠데타의 동기와 체재 전복에 대한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사건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북한 고위급 간부들의 고급 정보를 들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 북한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강명도 교수와 같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주체사상이 정통 사회주의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북한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만약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알게 되면 북한이 얼마나 김일성 김정일 부자 우상숭배 체재인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러한 사상적 통제를 엄격하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6 군단 사건의 내막에는 북한의 왜곡된 사상체재와 김부자 우상숭배를 타파하고자 한 6군단 핵심 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북한 인민군은 실제적 군 책임자인 군단장 그리고 정치적 사상 통제를 하는 정치위원 그리고 보위국 보위국장이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3중 감시망 체제가 작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북한 체재 전복을 꾀하게 된 것은 6군단의 정치위원이 최초의 입안자가 되었고 그가 6군단을 담당하는 보위국장 사이에 논의를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 남은 군단장이 동의하게 되면 군사 쿠데타 시도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6군단 정치위원은 보위부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지만 군단장이 동의할 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기에 1995년 설날을 맞아 군단장을 방문합니다. 이러한 것은 관례적인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6군단장을 접촉하게 됩니다. 정치 위원과 보위부장은 군단장에게 자신들의 군사 쿠데타 계획을 밝히고 동참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6 군단장은 저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저들의 모의에 동의하지 않자 그들은 술에 독을 넣어 암살하게 됩니다. 정보를 꽉 쥐고 있는 보위부장이 연루된 사건이기에 북한의 노동 신문에는 “6 군단장이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라고 보도합니다. 6 군단장의 암살로 이 사건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 될 뻔 했습니다.
1995년 6군단장이 암살되기 전 “군사 반란에 대한 모의가 있었다”는 정보가 입수됩니다. 라남구역 라성동을 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 여성 요원이 취중 첩보를 통해 “6군단에서 쿠데타 음모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보고를 받은 라남구역 보위부장은 이 사실을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장에게 보고합니다. 그는 즉시 반탐처 처장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참고로 반탐처는 방첩 또는 우리나라 군대의 보안사에 해당됩니다. 해당 여성 정보원을 만난 반탐처 처장은 정보의 출처를 묻게 됩니다. 여성 정보원은 “6군단 정치부 군관이 취중에 말한 내용을 보고한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반탐처 처장은 정보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함경북도 라남지구는 북한에서 최북단 오지이며 평양과 상당한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있는 함경북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으며 극비사항인 쿠데타 모의를 일개 군관이 취중에 쉽게 흘린다는 것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군에도 군단을 감시하는 군단 보위부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중차대한 쿠데타 움직임이 있다면 즉시 보고했을 사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어떤 쿠데타 징후도 볼 수 없었기에 반탐처 처장은 정보가 신빙성이 없다는 취지로 함경북도 보위부장에게 보고합니다. 따라서 보고의 내용이 쿠데타 시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보고를 받은 함경북도 국가안전 보위부장은 자료를 서류함에 넣고는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모든 일의 결말이 이 즈음에 이르자 이 사안은 여기서 끝나는 듯 했습니다.
여성 정보원 역할
정보를 제공했던 여성정보원은 더 이상 상부에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반탐처 처장이 허위보고를 했다고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이 여성정보원은 자신이 보고한 정보를 사회보위부가 아닌 군대인 조선인민국 총참모부 보위국에 보고하기로 결심합니다. 여성정보원은 평양으로 넘어가 지인들에게 인민군 보위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에 이릅니다. 이 사실은 보위국장이던 원응희 중장에게 들어 가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정일은 6군단 대리로 군수총국장이던 김영춘 대장을 파견하고 그는 그곳에서 수사팀을 결성합니다. 파견된 김영춘은 원응희 보위국장과 함께 내사에 들어갔고, 6군단장의 사망이 단순 지병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광범위한 수사 결과 최초의 입안자인 6 군단 정치위원과 군단의 포병 사령관 등이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외화벌이를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마련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참고로 북한의 군대는 우리나라처럼 100% 국가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군대마다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시설을 갖고 있습니다. 신발공장, 피혁, 수산물, 피복 등 이익을 내야지만 군대의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조차도 군대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달해야 합니다. 물론 탱크의 기름이나 포탄 등은 국가가 제공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칫 먼지에 쌓인 파일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사건을 여성 정보원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알려진 것이지만 실제로 이 정도 규모로 정치위원이 쿠데타를 도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6군단 군사 쿠데타 모의에 대한 수습
이러한 북한 체재에서 볼 때에는 6 군단이 외화벌이에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는 군사 반란이나 쿠데타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김영춘을 비롯한 원응희 보위국장은 이 사건을 군사 쿠데타로 보게 됩니다. 그들의 6 군단 쿠데타 모의는 6군단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예하 부대 대대급 지휘관까지 참여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함경북도 군당 책임비서, 행정일꾼,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인민보안성) 부부장 이상 간부급이 대거 가담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북한의 정보 당국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그리고 귀에 걸면 귀걸이기에 사실은 아무런 가담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인지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잡혀 가서 고문당하고 강제로 고백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코에 걸면 코걸이 그리고 귀에 걸면 귀걸이 대규모 조사를 통해 이들은 은밀하게 체포 작전에 들어갑니다. 프룬제 4.25 체포처럼 정치위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함경남도 리원 비행장에 모이게 되고 그들이 도착하자 마자 무장 군인에 의해 체포됩니다. 이들 핵심 인사들은 체포된 뒤에도 약 10개월간 조사를 받게 됩니다. 프룬제 사태가 5년 이상 내사를 받은 것에 비하면 짧을 수 있지만 매우 외떨어진 지방의 향토 군단이란 점을 감안하면 결코 짧은 것도 아닙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김영춘과 보위국은 적극 가담자 뿐 아니라 단순 가담자, 이들과 가깝게 지냈던 행정간부들까지 모두 체포했습니다. 적극 가담자들은 가혹한 고문 후에 처형당하고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6군단의 초급 군관 등 수백명이 강제로 전역한 후 탄광 등 오지에 배치되었습니다.
김정일은 군사 쿠데타의 뿌리를 뽑기 위해 6군단을 영구 삭제하고 모든 병력을 타지방 부대로 재배치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6군단 예하 사단 병력은 열차로 강원도와 함경남도 주둔군으로 대체되기에 이릅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북한의 모든 부대들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세대교체 명목으로 지휘관들도 대거 교체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김정일이 하는 행태에 주목합니다. 김일성이도 끊임없이 라이벌인 박헌영, 허가이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하고, 자신에게 오는 암살과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 정보와 상호 감시 체계를 더 강화했습니다. 김일성 사망 사건에 대하여 심층 보도를 했던 월간 조선은 중국의 깊은 정보와 북한 내부의 은밀한 정보를 통해 김정일과 김일성 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과 내분이 김일성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또한 긴급한 상황에서 묘향산 특각에 있던 김일성을 바로 처치하지 않고 늦게 헬리콥터가 뜨게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심층 기사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 보도된 월간 조선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김정일이 갖고 있는 심리상태에 관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아버지 뿐 아니라 자신조차도 북한 내분에 일어나는 다양한 반란과 소요를 제압하지 않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그의 심리적 상태가 이러한 사건 이후 어떠한 잔혹한 처방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형과 고문 그리고 가족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하는 일들은 국가 전체를 운영하는 시스템과 관련이 깊습니다. 김정일은 그가 집권하는 기간 동안 과도한 숙청과 인권 유린 등을 자행했습니다. 장성택 처형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를 보더라도 김정은이의 잔학 무도함은 김일성 김정일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여성 정보원의 정보를 통해 6 군단 군사 쿠데타로 정의하고 사건 전체를 지휘한 김영춘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김영춘은 이후 총참모장으로 진급하였고 보위국장 원응희도 인민무력부 보위사령관, 계급은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합니다. 또한 보위국은 사령부로 승격되었습니다.
북한 사태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저는 위에서 간략히 살펴 본 바와 같이 북한은 여러차례 붕괴되거나 또는 적어도 와해되어 통일이 목전에 이를 수 있었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김일성 사망이나 고난의 행군처럼 전국가적이 사건도 있었고, 함경북도 6군단 군사 반란 모의와 같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도 있었으며 프룬제 군사 쿠데타 모의와 같이 북한 정권을 엎으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이 지금과 같이 많은 부분에서 북한의 내부 사정을 잘 알서 없었던 시기였기에 남한 전체에 이러한 사실이 당시 바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한의 정보 당국은 충분히 그러한 상황들을 파악했으리라 정황상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한에 탈북한 사람들과 가운데 고위급 인사의 자녀들도 포함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강명도 교수입니다. 이제는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지만 편의상 글의 전개를 위해 그가 몸담고 있는 경기대학교 북한학과 교수이기에 강명도 교수로 칭하고자 합니다. 그의 부친은 내각 부상을 지냈고, 모친은 평양시 당위원회에 근무하였고, 그의 장인은 1984년까지 이후 1992년부터 도합 두 번에 걸쳐 공화국 총리 직을 두번씩이나 역임한 강성산 총리입니다. 강명도 교수의 증언은 후에 알게 된 북한 내부의 반란과 북한 붕괴로 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하여 자세한 내막을 증언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2023년 지금 비록 오래 전 일이라 해도 남북이 철저히 상대에 대하여 문을 닫고, 도대체 무슨 일이 북한에서 일어났는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다양한 경로와 관점에서 북한 붕괴가 앞으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 내부 사태 문제 연구에 대하여
북한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여타 국가를 연구할 때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자료의 접근과 투명성 나아가서 자료의 신빙성과 정확성과 신뢰성 확보입니다. 북한 정보가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고,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북한 자료들도 1차 자료보다는 2차 자료 즉 출판물과 북한측에서 이미 검열을 마친 자료들이 대부분이기에 북한을 연구하다 보면 북한측 선전 선동 및 의도에 휘말릴 여지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남한 측에서 행하는 북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에 관한 연구의 가장 큰 난제는 자료 수집입니다. 국경이 봉쇄되고 북한을 직접 연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수단이 차단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2차 자료와 탈북민들의 증언 그리고 미국 및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같이 우회적 연구를 통한 자료 수집들이 있습니다. 국방부, 통일부의 자료와 공개된 정보당국의 자료 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부분이 탈북민들의 증언입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북한에 살았다고 해서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자세히 다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와서 제일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김일성이나 김정일, 주체사상, 북한식 사회주의 그리고 북한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고 고백한 부분들입니다. 그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통제된 정보만을 접하고 살다가 남한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탈북민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는 충격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저 보다도 훨씬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안 별로 탈북민들의 증언을 구별하고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탈북민의 증언과 간수로 복역했던 탈북민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종파 사건, 프룬제 사건, 6군단 사건 등은 아무리 북한 내분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여전히 이 사건들의 실체는 자세히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분적 사실이 언론이나 블로그에 나와 있다고 해도 이 사안들의 근거와 자료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답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2020년 김정은이 사망했다고 한 일들이 유튜브와 인터넷을 크게 달군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데일리 NK가 최초로 보도하였고 미국 CNN이 이를 인용해 보도하였습니다. CNN 보도 이후 한국 언론도 앞다투어 김정은 사망설을 보도했고 이러한 보도는 일본에서도 있었습니다. (참조: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나아가서 유튜브나 포털을 통해 많은 탈북민들이 가장 정확한 북한 내부 폭로라는 나름대로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김정은이 사망했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당시에 국정원은 김정은이는 여전히 건재하며 살아 있고 그의 동선을 여전히 확인한 바 김정은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김정은 사망 주장에 대하여, 수십년에 걸친 정보 수집과 휴민트의 활용 및 정찰 위성, 군사 첩보 등을 통한 대북 정보가 여야가 바뀌면서 많은 부침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보 당국의 주장은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이념적 분야는 그래도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남북한 언어학, 자연과학, 기초과학, 응용과학 등은 이념의 색채가 적기에 상대적으로 그리고 학문적 접근이 용이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행정학, 정치학, 사회과학 전반과 역사학 그리고 정치 제도,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편차가 매우 큽니다. 그래도 남북한 체재 비교, 남북한 사회의 동질성 및 이질성 비교 연구, 남북한 군사력 비교는 광범위하게 연구가 진행되었고 해마다 군사력 증강과 변화에 따라 업데이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서독 통일 이전에 동독이 가장 집중하고 에너지를 쏟은 분야가 이념적 우위 선점과 냉전에서 독창적 이데올로기의 주도권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독의 내재적 접근법입니다. 북한의 통제를 유리하게 하고, 전 국민을 북한의 주체 사상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어 거대한 정신 병동안에 강제로 구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북한의 현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통해 전주민을 통제하고 노예화하는 북한 지도부를 어떻게 남한과 세계가 다루느냐?는 문제입니다.
북한 지도부에게 차마 항거하지 못하고 노예화를 당해도 항거할 수단마저 없는 대다수의 주민들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내독 정책이나 독일 통일이 이루는 여러 정황들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남한 그리고 디아스포라 Korea가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비록 복음 통일이 목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통일 이전에 취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위의 문제들을 차근 차근 짚어 나가기 위해서 먼저 1번의 문제는 남북한 당사자와 통일부 그리고 남한에 있는 다양한 통일문제 연구소 및 기관들이 내어 놓은 방안들이 많기에 저 개인의 의견을 내어 놓지는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사안별로 해야 할 해법이 있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해야 할 사안들도 있다면 이제는 영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해야 할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논지를 이어 나가고자 하는 부분은 2번 북한 주민의 노예화를 막는 방안들, 복음 통일 기반 조성과 통일 이전에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고자 합니다. 과연 이 부분이 통일로 이어질 지 아니면 통일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가운데 스쳐 지나간 일들이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저는 북한이 여러 형태로 붕괴 내지는 급진적 변화 그리고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 등을 통해 국가 체재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붕괴론 및 체재 변혁론
북한 붕괴론은 북한이 경제, 정치, 사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무너질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현재 유엔의 제재와 국제 사회의 공조로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의 고립이 체재 변화를 일으켜서 내부 반란, 봉기, 군사 쿠데타, 외부적 군사 개입이나 위협 등에 대한 변동 요인으로 북한이 더이상 체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영어로는 Regime change로 더 알려져 있는 북한의 체제 변혁은 외부적 요인이나 아니면 내부 요인 그리고 다양한 변수에 의해 현재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정권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등장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체재 변혁이 통일로 이어질 수 있는 급진적 체재 변혁과 변화나 개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체재 변혁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 개입이나 또는 소련 붕괴와 같은 국제적 요인이 아닌 내부 쿠데타 내지는 내부 반란 때문입니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통해 어느 정도 내부 반란을 색출하고 숙청하는데 있어서 조직 내부의 필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제는 아예 그러한 시도조차 불가능한 구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북한의 엘리트 집단들이 비밀리에 내부 붕괴에 이르도록 하는 요인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통일이 가능한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동서독처럼 양국 당사자에 의한 통일과 외부적 요인과 군사적 개입을 통한 통일 그리고 내부 반란이나 쿠데타에 의한 붕괴로 인한 통일입니다. 필자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내부 붕괴입니다. 역사는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만들어 내는 유산물입니다.
사람들의 개입과 반응들이 흔적으로 남게 되고 공통적으로 그리고 변화의 기점을 이룬 것들을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또한 기록하기도 합니다.
남한에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는 무력에 의한 체재 변혁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참조: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2-08-17/south-korea-doesn-t-back-use-of-force-for-regime-change-in-north#xj4y7vzkg) 하지만 미국의 정보 당국과 국무부 그리고 백악관은 여전히 체재 변혁에 대한 기본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2019년 미 의회에서 통과된 오토 웜비어법을 포함해 강력한 경제제재 수단을 동원해 김정은 정권의 생존에 의존하는 해외 자금 유입을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성공적으로 탈출하거나 탈북한 북한 주민으로 구성된 북한 망명 정부를 조직하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보스톤 글로브의 Jeff Jacoby 기자는 정권교체만이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참조: https://www.bostonglobe.com/2020/04/29/opinion/only-regime-change-can-end-north-koreas-nuclear-threat/)
아무리 북한을 수십 년간 국제적으로, 경제적으로 고립시켜도 핵무장을 강화하고 핵실험을 중단하지 않는 북한 체재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비핵화의 의지는 전혀 없고 도리어 핵무장을 빌미로 다양한 선전선동과 협상 테이블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만 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북한 정권을 단념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으로 바이든 행정부는 새롭고 유연하며 탄력적인 전략과 정책을 채택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 정권은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더욱 더 고립되었고 유일한 무역 파트너인 중국과 구상 무역의 감소로 경제 뿐 아니라 북한 주민의 생활 전반과 삶이 더 피폐해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증강을 통한 북한의 무력 도발과 핵무장을 통해 비대칭 전략은 갈 수록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핵 시설, 프로그램, 비축량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투명성을 제공하는 대가로 소수의 제재 해제와 같은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갈 경우 체재 변혁을 시도하는 방안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미국 행정부의 방향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체재 변혁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참조: https://www.cfr.org/backgrounder/north-korea-sanctions-un-nuclear-weapons)
글을 마무리 하면서
일제 강점기 36년 그리고 스스로 쟁취해서 맞이한 광복이 아니라 일본의 패망으로 맞게 된 광복(해방) 그리고 남한 단독으로 수립된 정부 그리고 북한의 공산 정권의 출범, 김일성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 그리고 전쟁 후 복구 사업으로 남과 북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경제적으로 우위를 선점하려 했으며 이념적으로 체재 우위 경쟁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남한에는 자유 민주주의가 실행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경제 대국 10위를 달성하며 선진국에 이미 진입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감히 북한이 무력도발을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방어태세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197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는 김일성 김정일 세습 체재와 주체 사상 그리고 사상 통제와 경제적 고립으로 3백만이 아사하는 고난의 행군을 맞이하면서 더이상 북한은 남한과 견줄 수 없게 됩니다. 문제는 북한에 거하는 수많은 주민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김정은 정권이 스스로 정권을 내어 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외부적 요인에 의한 무력 침공이나 군사 개입을 통해서 얻게 될 통일이 그에 따른 희생이 너무 크기에 우리는 평화 통일 그리고 복음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최상위 지도자 그룹에서 김일성 유일체재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배고픔과 차별 그리고 압제에 항거하여 몰살 당하기도 하고,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탈북의 통로들이 여기 저기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남북한 통일 가운데 가장 가능한 시나리오는 건전한 북한의 지성인 그룹이 체재를 전복하고 북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면 이때 남한과 미국 그리고 UN이 평화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듯 이러한 영적 출애굽의 역사는 오직 기도와 간구만이 이루실 줄 믿으며 오늘도 두 손 모으며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8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3.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4. 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들이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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