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기도가 되는 말
[새벽묵상] 기도가 되는 말 » 약 3:1-12 » 한은선 목사 » Ein Wort, das zum Gebet wird! 곧 좋은 말은 좋은 영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말보다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말의 문제는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요 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랑의…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영성칼럼]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 필자 Dr. Elijah Kim  »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다 할렐루야!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 한 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탈북민들이 성령충만함 받고 영적 재충전과 트라우마로부터 내적치료를 받게 하시고, 안전하게 귀국하시게 하신 주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 강석진 목사 » 이승만의 외로운 대미외교 활동과 시련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을사조약(1905.11)으로 대한이라는 나라의 외교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가 실행되기 4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묵인하였고 바로 이어서 주한미공사관을 폐쇄시켰다. 이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

주제강연 소강석 박사 ◙ Photo&Img©ucdigiN

[성령포럼=소강석 박사]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 » 주제강연 »

새에덴교회 부흥의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요 바보스러운 나의 설교 때문…

설교자가 자기비하를 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복음이 더 드러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더 애틋하게 전달하고 소통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자기 부인과 비하의 설교를 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열매가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바보스러운 나의 설교 때문일 것이다…

 

소강석 박사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대회장,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주제강연 소강석 박사 ◙ Photo&Img©ucdigiN

우리나라 목회자의 머릿속에 각인이 된 설교는 거의 강해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강해설교의 창시자인 해돈 W. 로빈슨(Haddon W. Robinson)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강해설교를, 설교구성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설교학사에서 강해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해라는 용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강해설교는 본문이 드러나는 설교의 신학적 가치를 말하며, 이때 본문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저자의 의도이다. 설교학자이며 조직신학자인 조엘 R. 비키(Joel R. Beeke)는 자신의 40년 설교의 경험을 가지고 집필에만 20년의 세월을 사용한 ‘설교에 관하여’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 발견되는 강해설교의 특징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회중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의 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전달 방식도 콘텐츠 못지않게 중요하다. 나는 양자 모두를 중요시 여긴다. 요즘은 설교학 분야에서 언어학 이론(화행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칼빈대 김덕현 교수에 의하면 설교도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언어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행위 이론에 의하면 설교의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단순 발화 행위
수사학으로 말하면 지식적인 로고스, 표면적인 내용, 콘텐츠를 말한다. 성경으로 말하면 그 본문에 소개되는 단순한 내용 콘텐츠를 설명하는 것이다.

(2) 의미 수반 발화 행위
내용의 진정성, 진정한 의미 등을 말한다. 성경으로 말하면 단순발화행위는 문자로 기록된 성경 자체 내용을 말한다면, 의미수반발화행위는 그 본문을 기록한 하나님의 마음과 기록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에토스가 되는 것이다.

(3) 효과 수반 발화행위
성령이 임재하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소위 말하면 거룩한 설교적 퍼포먼스를 통하여 성도들이 웃거나 울거나, 감격의 춤을 추거나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감동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나타남의 역사라가 할 수 있다.(고전2:4)

그래서 나도 동일한 성경 말씀을 전달하되, 좀 더 효과적이고 감동적으로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을 문학과 음악의 옷을 입혀 이야기 형식으로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극화된 이야기를 말한다.

‘예술적 개입’(artistic interventio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예술을 경영에 개입하면 놀라운 긍정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럽의 한 제조회사에서 예술가들을 채용해서 회사생활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거나, 직접 생산라인에서 일하게 하자 직원들의 생산효율성이 25%나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기업의 임직원들이 예술가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인간성과 존재가치를 재발견하게 되고, 의사소통이 활성화되면서 회사에 대한 브랜드가 올라가고, 로열티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는가.

1.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한다.

인간은 문학적 존재이다. 문학과 인간은 뗄래야 뗄 수 없고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문학이 있다. 문학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기록된 성경 말씀도 문학의 형식을 빌렸지 않는가. 성경도 일종의 성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에는 반드시 문학성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천 인문학 시리즈’를 설교한 적이 있다. 그때 몇 분들이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성경을 전해야지 인문학을 전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설교를 들어보지 않으면 용감하고 무지하게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경이 대답을 해주는 설교가 얼마나 현대적이고 젊은 지성적 교인들에게 스펀지처럼 스며들겠는가. 또한 설교에 시와 에세이, 소설들을 서론에서 소개하고 그것과 연관하여 성경으로 대답해 주고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 줄 때 얼마나 젊은 지성인들이 좋아하겠는가.

설교 예문1) 주님의 발아래서 최고의 내가 되라(마26:6-13) [2012년 11월 11일 주일예배]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를 아십니까?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을 가을 엽서로 보았고, 그 가을 엽서는 낮은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짙어가는 만추의 계절에 낙엽을 통해서 가을 엽서의 낮은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예수님에게 마치 가을 엽서의 사랑 같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마리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마치 가을 엽서처럼 언제나 낮은 곳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바로 주님의 발아래로 내려앉고, 더 낮게 발 아래로 엎드렸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여인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주님의 발 아래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복하게 해 드렸는지 모릅니다. 과연 주님 앞에 최고의 여인이 되었던 것이죠.(하략)

설교 예문2)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 길을 열라(출14:15-22) [2023년 1월 1일 주일예배]

새해 첫날, 첫 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축복의 길, 새로운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백창우 시인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 테니…(중략)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걸.

길이 완전히 막히는 곳에 이르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또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도 사람은 절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길이 없다고 좌절하고, 어떤 사람은 길이 아예 막혀버렸다고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오히려 더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께서는 길이 막히고 끝나는 곳에서 오히려 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길이 다시 시작되게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10가지의 재앙으로 마침내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애굽 땅을 벗어나 광야를 걸어갔습니다. 얼마나 형통하고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그들의 사기는 하늘에 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걸어가다가 그들은 홍해 앞에 서게 됩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앞으로 인도하시다니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하는데 길이 끊긴 것입니다. 길이 사라지고 막혀버린 것입니다.(하략)

설교 예문3) 당신은 존귀한 자입니다(시16:1-5) [2020년 3월 15일 주일예배]

이탈리아의 복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데카메론’이라는 말은 열흘간의 이야기라는 의미인데요, 이 책의 이야기는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으로 시작됩니다. 1348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에 치명적인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이때는 항바이러스 약이 없었기 때문에 흑사병에 걸리면 거의 다 죽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인구 3천만 명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때 페스트로 가족을 잃은 7명의 과부들이 자기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피렌체 대성당 미사에 참석을 합니다. 그때 한 여자가 우리가 너무 슬퍼하지 말고 전염병을 피해 교외로 나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과부7명과 미사에 참석한 청년 3명이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떠납니다.

그들은 앞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살자고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10명이 하루에 한 편씩 열흘 동안 100편의 이야기를 쏟아 냅니다. 이때 이들은 하나님 중심 이야기가 아닌 인간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학적으로 말합니다. 예컨대 평생 거짓말쟁이로 살다가 죽을 때도 거짓말을 해서 성인이 된 사람, 남의 아내를 빼앗으려는 권력자에게 지혜롭게 대처한 이야기 등을 쏟아내며 배꼽을 자아냅니다.

그 중의 한 이야기를 소개한다면, 피렌체의 고리대금업자 차필레토는 떼인 돈을 받기 위해 프랑스의 브루고뉴를 방문합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죽을 병에 걸려 이제라도 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성직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 고해성사에 감동한 성직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차필레토의 죄를 용서하고 설교 소재로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고해성사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대의 거짓말쟁이 차필레토는 성자가 되고 성자가 되어야 할 성직자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댑니다.

복카치오는 데카메론의 소설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약이 없기 때문이죠.” 지금 이 소설을 읽으면 한심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지금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8천 명까지 늘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사망자는 72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도시와 거리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3천만명이 죽어 나가던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복카치오는 너무 불안과 공포에 떨지 말고 기쁨과 즐거움, 꿈과 행복을 찾아서 살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과는 반대로 데카메론을 인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해학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메론이 문예부흥과 인문주의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서 얻을 교훈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창궐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너무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좀 즐거움으로 살고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신나는 이야기도 하고 이럴 때 일수록 여유를 갖고 꿈과 행복을 찾아서 살아야 합니다.(중략)

그러나 데카메론의 대화의 주제가 하나님이 주제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서 하나님 중심 이야기에 감격하고 눈물 흘리며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생명에로의 소명과 거룩한 신적 소명을 느끼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유럽의 인문주의와 문예부흥이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져봅니다.(하략)

설교 예문4) 베아트리체가 되어 보실래요(계21:1-4)[2021년 8월 1일 주일예배]

여러분, 단테의 신곡은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 3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글이 전부 다 운율로 맞추어진 대서사시입니다. 왜 그가 그렇게 서사시로 쓴지 아세요? 고대 로마의 대시인인 베르길리우스라는 시인과 함께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행은 AD 1300년 고난의 성금요일에 시작이 됩니다.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먼저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그 입구의 문 위에는 어두운 글씨로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방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그 문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곳이 지옥은 아니었습니다. 연옥이었습니다.

그 연옥은 아직 천국이냐 지옥이냐 결정이 되지 않은 채 두려워 떨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지옥에 떨어질지, 천국으로 갈지 몰라서 더 두려워하는 거입니다. 단테가 종교개혁 이전에 신곡을 썼기 때문에 당시는 당연히 연옥 교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개혁교회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테는 연옥을 거쳐서 지옥을 가요. 지옥에 갔더니 지옥은 땅속 깊숙이 들어간 깔때기 모양의 거대한 심연이었습니다. 이곳은 악마 루시퍼가 하늘에서 쫓겨나 추락을 하면서 땅속까지 뚫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아홉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 층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중략)

단테는 3일 동안 지옥을 경험을 한 후, 다시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연옥을 구경하고 마침내 연옥을 지나갑니다. 그런데 연옥에서 천국을 갈려면 정화의 산에 아홉 단계를 올라야 합니다. 그 단계를 올라야 마침내 불의 담을 넘어 낙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테는 불의 담을 넘기 전 꿈에도 그리웠던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안내로 불의 담을 넘어 아홉 개 하늘의 낙원을 구경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단테의 신곡 이야기보다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이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은 가상 인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실제 인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괴테를 비롯해서 실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요.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아홉 살 때 만납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녀를 본 순간 그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9년 후 18세가 되었을 때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단테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베아트리체가 성녀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얼마나 연모하고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모릅니다.(중략)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완전히 끌려 버렸습니다. 베아트리체를 보자마자 성녀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뛰고 영혼도 떨린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아트리체는 돈 많은 은행가에게 시집을 가 버립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2년 만에 콜레라에 걸려 24살의 나이로 요절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 단테가 얼마나 상심을 했겠습니까? 그 이후로 단테는 많은 작품에서 베아트리체를 성녀로 묘사를 합니다. 게다가 단테가 35살이 넘어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모함과 연모의 심정이 얼마나 짙었겠습니까? 그래서 가왕 조용필 씨도 ‘슬픈 베아트리체’라는 노래를 이렇게 불렀지 않습니까?

♪ 그대 슬픈 눈에 어리는 이슬처럼 맑은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 들어와 푸른 샘으로 솟아나리니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하략)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사모하고 연모했던 베아트리체가 성녀가 되어 천국 문 앞에 서서 자기를 영접하고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테가 얼마나 황홀해 버렸겠습니까? 단테는 낙원의 모습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그녀에게 안내를 받는 것 자체가 천국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중략)

여러분, 단테가 점점 천국의 여정에 접어 들어가는데 천국의 아름다움과 황홀함을 당연히 목격하였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단테는 아름다운 천국의 광경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베아트리체와 함께 하고 베아트리체에 의해서 천국의 안내를 받는 것이 너무너무 황홀한 것입니다.(중략) 단테에게 최고로 가슴 설레이는 연인이 베아트리체였다면, 오늘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최고의 사랑은 누구여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단테가 부르다가 죽을 노래의 주인공이 베아트리체였다면 오늘 우리도 부르다가 죽을 노래,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바랍니다.(중략)

여러분, 사랑에 빠진 자는 자꾸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잖아요. 또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자꾸 자랑하고 소개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이 시대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고 천국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중략) 주님!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베아트리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나는 언젠가 ‘본질이 아니면 우상이다’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한국의 기독교 문학이 다 소개돼 있다. 또한 단태의 신곡을 소개하면서 “우리 모두가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되자”고 했다. 실로 청중에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설교를 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문학적 옷을 입힌다고 하지만 아가서를 비롯하여 지혜서, 선지서 같은 경우는 그 자체가 문학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문학의 옷을 입혀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한다.

인간은 음악적 존재이다. 음악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영화에 음악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드라마와 연극 그리고 뮤지컬 등에 음악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설교도 음악과 함께 혹은 음악의 옷을 입혀서 설교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설교엔 음악성이 들어있고 음율이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모세도 운율과 곡을 섞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암송하라고 하지 않은가.(신명기31:19) 모세뿐인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 프랜시스는 그야말로 음악적 설교를 한 사람이다. 그는 거리와 시장, 광장에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할 때면, 평민들에게 익숙한,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였다.

그래서 그때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3세는 사제들이 성 프랜시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아니다’라고 하면서 성 프랜시스를 옹호하고, 그로 하여금 프랜치스코 수도단까지 설립하도록 해줬다. 그때 당시의 사제들은 전부 고상한 라틴어로 설교를 했고, 평민들은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때 성 프랜시스는 시장에서 장터 언어로,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힌 노래로 복음을 전하면서 평민들을 구원했다.

그뿐인가. 존 칼빈도 쥬네브 찬송을 만들 때,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민요나 대중가요에 시편 말씀을 가사로 붙여 부르도록 했다. 칼빈은 시편을 다 외우게 했다. 그런데 그냥 외우려면 힘드니까 음악으로, 음율로 외우게 했다. 그렇지만 그 많은 노래를 어떻게 다 작곡하겠는가. 그래서 프랑스의 건전한 민요들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나는 설교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한다. 그러면 성도들이 말씀을 더 기억하고 감동을 받는다. 심지어 나는 성 프랜시스나 칼빈처럼 대중가요를 복음적으로 개사해서 부를 때가 있다. 처음에는 많은 비난도 받았는데 성 프랜시스와 칼빈도 그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찬송가에 나오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스코틀랜드 민요이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신자 되기 원합니다’는 미국 민요와 흑인영가에서 차용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는 베토벤이 작곡한 합창 교향곡 ‘환희의 송가’ 중에 나오는 선율이다. 이 모든 찬송가들이 일반 노래의 가사를 복음적으로 개사해 부르면서 찬송가에 편입이 됐다.

오늘날 설교 속에 예화가 없는 설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예화는 어차피 다 세상 이야기다. 그렇게 볼 때, 곡조가 있는 예화냐, 곡조가 없는 예화냐만 구분될 뿐이다. 일반 예화는 곡조 없는 예화이고, 노래는 곡조가 있는 예화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호세아가 “너희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내용을 설교할 때, 나는 이런 노래를 부를 때가 있다.

♪ 돌아와 그대 / 내게 돌아와 / 난 온통 그대 생각뿐이야
불같은 나의 사랑 피할 수 없어 / 그대여 내게 돌아와요

그리고 전도설교를 하며 인간의 죽음과 내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나는 반드시 ‘모닥불’이나 상여 나갈 때 부르는 ‘만가’를 부르곤 한다.

♪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 모닥불 같은 것…

♪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정든 집을 두고 나는 가네
어젯 밤에는 안방에서 잤건만 오늘 저녁은 북망산천….

그것이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경박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절대 다수의 청중은 그 만가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인간이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는 반드시 부활을 하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된다고 설교할 때 대부분이 다 눈물을 흘리고 다시 한 번 복음을 확신하게 된다.

3. 성경을 이야기로 전한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장막을 통해서 이야기체와 구전 형태로 전해져 왔다. 그러다가 모세 때 와서 그 모든 이야기가 서술적 단문으로 기록이 되었다. 모세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기자들이 다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단문 속에서 성경이 원래 이야기체로 전해진 말씀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네러티브 구조로 재구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 설교를 하고, 그것을 넘어서 극화된 설교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그랬지 않는가. BAGD 사전의 편집자인 프레드릭(Frederick)은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머물던 상황을 표현하려고 차용된 단어 ‘스케노포이스’(σκηνοποιός 행 18:3)는 천막 제작자(tentmaker)보다는 극장에서 사용하는 소품을 만드는 소품 제작자(maker of stage properties)라고 번역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제안한다. 뿐만아니라 바울 자신을 포함한 동료 사도들의 설교를 묘사할 때 그가 사용한 ‘어리석음’과 동격인 ‘구경거리’의 헬라어 단어 ‘테아트론’(θέατρον, 고전 4:9-10)은 요즘 말로 하면 우아하고 고상한 오페라 혹은 연극무대에서 행해지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웰본(Welborn)이란 학자는 사회문화적 개연성을 가지고 당시 극장과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광대(fool)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설교자 상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윈디쉬는(Windisch)는 고린도후서 11:1-12:13 에 나타나는 바울이 자신의 어리석은 것을 자랑하는 본문이 가진 수사적 특성에 대해 바울이 고린도 지역 극장의 대중적인 마임(Mimus)에 등장하는 배역을 본 경험으로부터 학습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고대 로마의 소설가 아풀레이우스(Apuleius)가 말하는 고린도 지역에서 유행하는 대중적인 공연형식을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서 바울은 극화된 설교를 했다.

칼빈의 경우도 그랬다. 말씀의 임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설교의 기능을 칼빈(Calvin)은 성례전적인 이해로 설명한다. 설교적 시연의 신학적 배경으로는 칼빈의 성례전적 설교 이해에도 그 신학적 배경을 가진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성례를 시연함으로 보이는 설교가 진행되는 것처럼 칼빈이 말하는 성례전적 설교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선포자와 배우로서의 설교자의 모습을 성례와 설교라는 범주 안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실제로 180명으로 구성된 사진 집필자와 함께 윌리엄 월리몬(William H. Willimon)과 리차드 리스쳐(Richard Lischer)가 편집 설교학 사전(Concise encyclopedia of preaching)은 선포자와 배우로서의 설교자라는 내용을 “성례와 설교”의 주제를 설명하는 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설교를 성례전적 이해로 설명하는 칼빈의 설교는 여러 가지의 은유, 비교, 속담에 관한 이미지들, 그리고 상상에 호소하고 잇는 경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설교에서 연극적인 내용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대구법, 강조를 단계적으로 변화시켜가는 것, 탄성, 불합리와 아이러니등의 다양한 수사학적 전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칼빈의 설교는 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설교에서 하나님과 악마를 마치 주인공과 조연처럼 서로 대비시켜 놓거나 또한 그의 청중들에게 익숙한 전투장과 싸움의 이미지를 극화하기도 하였다. 설교에서의 이러한 생생한 연출은 칼빈이 자신의 모습을 설교에 이끌어 들이거나 질문화법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도전하는 경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렇다. 황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 머릿속에 반드시 각인을 시켜주고 창의적 세계,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로부터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야말로 이야기는 황홀한 상상의 세계였다. 아마도 내가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은 막내로 자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형이나 누나는 천자문, 수학 공부, 구구단 암송 등 늘 엄한 매로 공부를 시켰다. 시험 점수를 올리는 지식 교육을 많이 시킨 것이다. 그러나 막내였던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래서 할머니, 어머니, 누나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귀신, 도깨비, 보릿고개 이야기, 6.25때 고생한 이야기… 그야말로 꿈과 환상의 보물섬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극한 효자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머님이 병환으로 곧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효자는 죽은 사람의 다리를 잘라서 삶은 물을 마시면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효자는 깊은 저녁 공동묘지를 찾아 한 묘지를 골라서 파헤친 후 시체를 꺼내어 다리를 자른다.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마치 내가 공동묘지에 있는 것처럼 벌벌 떨면서 이야기 속에 빠져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나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를 자른 효자가 옷섶에 시체의 다리를 숨기고 밤공기를 가르며 숲속을 달린다. 어디선가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도 함께 달린다.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때 뒤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달려온다. 그리고 도망가는 효자의 뒷덜미를 잡는다. “내 다리 내 놔, 내 다리 내 놔~” 효자는 질겁하고 도망을 간다. 할머니가 갑자기 내게 손을 뻗치며 “내 다리 내 놔!” 하면 놀라서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리고 몸을 덜덜 떨면서도 또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침내 효자는 집에 와서 다리를 삶아서 어머니께 봉양한다. 그런데 아침에 보았더니 그것이 산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놀랍도록 상상의 세계가 커진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 나는 이야기가 끝나면 또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들이 나중엔 이야기 보따리가 떨어진다. 그래서 거짓말로 이야기를 지어서 해 주곤 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 때문에 나에게는 독특한 상상력과 창의력, 문학성이 길러졌다. 즉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게 하는 내러티브의 힘이 생겼다.

목회자로서 설교를 할 때도 이야기 설교를 한다. 어떤 딱딱한 교리나 이론적인 설교를 해도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 속에 빠진다. 돌이켜보면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은 정말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나를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한 위대한 안내자였다. 또한 어린 시절 집에 TV가 없었지만 라디오가 있었다. 그 라디오에서 ‘손오공’이라는 연속극을 하였고 ‘마루치 아라치’, ‘무지개 마을’ 등에 연속극을 들었다. 그럴 때 나는 그 연속극에 빠져들었다. TV를 보는 것보다도 더 재밌게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나는 지금도 손오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손오공의 주문을 외울 수 있다. 나는 손오공을 통해서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그 상상력은 창의력을 가지다 주었다.

간략하게 기록한 성경을 이야기로 전한다는 것은 흥미롭고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서술적인 이야기처럼 전하는 것도 감동이 있고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극화가 되어서 청중에게 전해지면 더 감동적이고 더 효과적인 언어수반발화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똑같은 말씀을 어떻게 극화를 시키는가. 성경의 진리를 다른 어떤 내용과 대립을 시키고 모순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절정에 가서 다시 반전을 일으켜 실마리를 발견하게 하고 해결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로 답을 얻게 하고 복음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때 청중은 “아~” 탄성을 지르고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다. 이 깨달음을 우리 삶에 적용을 하게 하고 도전을 주며 스스로 드라이브를 걸게 한다. 그러면 얼마나 설교가 감동적으로 전달이 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계적이고 방법론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아무리 문학과 음학과 이야기체로 극화적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방법론이나 원리로만 고착화되면 안된다. 무엇보다 설교자 자신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의 내용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설교자 자신이 먼저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설교자의 위대한 품격과 고매함으로 하나님을 잘 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 비하와 설교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도 ‘팍스 이에수스’를 이뤘지 않는가. 바울도 화려한 수사학이나 웅변술보다는 전도(설교)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했다.(고전 1:21, 고전 2:4-5)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요, 성령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 보렌은 설교를 “성령과 함께 춤을 추고 놀이하는 행위”라고 했고, 데이비드 버트릭은 설교를 “하나님의 신비의 가장자리에서 춤추는 사역”이라고 했다.

둘째, 애틋함과 애절함이 있어야 한다.
과거의 광대나 현대의 광대나 이 세상의 광대들도 애절함과 애틋함(에토스)을 가슴 속에 불태운다. 이 세상의 광대들도 사람들을 웃고 울리기 위하여 그토록 애틋함과 애절함을 갖고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애틋함과 애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교자가 에토스를 가지고 한 영혼, 한 영혼에게 하나님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전달해야 한다. 애틋함이 있다면 무미건조하게 지식 전달과 정보전달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가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사무치는 애틋함과 애절함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

셋째, 자기 부인과 비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고의적으로 설교자의 격을 떨어뜨리며 바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복음을 극적으로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부인을 하고 비하를 하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우아하면 얼마나 우아하고 격조가 높으면 얼마나 격조가 높겠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다 추악한 죄인이지 않는가. 중요한 건 우리가 죽음으로써 교회가 살고 낮아짐으로써 그리스도가 높아지듯이, 우리가 망가짐으로써 성도의 영혼이 살고 교회가 살면 하나님이 오히려 더 높여주시고 존귀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가 자기비하를 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복음이 더 드러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더 애틋하게 전달하고 소통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자기 부인과 비하의 설교를 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열매가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바보스러운 나의 설교 때문일 것이다.

(1) 교회가 바보스러운 인격적, 신앙적 공동체가 된다.
(2) 역설적 슈퍼 공동체가 된다.
(3)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이 회복된다.

새에덴교회는 정말 바보스러운 교회다. 바보스러운 교회가 아니면 어떻게 17년 동안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국교회 연합과 공적사역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선도적으로 해 왔는지 모른다. 나는 부족하지만 반이슬람 운동을 제일 먼저 했다. 그리고 반동성애 운동도 제일 먼저 했다. 종교인 과세 문제도 제일 최전방에서 대처했다. 분열된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교회 부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시간과 체력과 재정을 쓰고 좋은 소리도 못 듣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교회가 바보스러운 공동체와 역설적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해 왔겠는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바보스러운 나의 설교 때문일 것이다.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ategories: 전략/포럼
UCDigin: 유크디지N(ucdigiN) 편집국-디지털 저널 및 출판 맞춤 모든 굿 뉴스-세상 땅 끝까지 굿 뉴스를 찾아갑니다. 또한 세상 어디든지 굿 뉴스라면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Relat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