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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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포럼=김삼환 박사]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 » 발제1 »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 구원의 역사 이뤄내는 구조를 현상학적 보여줌 가장 탁월한 예 가운데 하나…
악의 구조는 가장 외부적인 단계에서의 악을 상징하는 것들이 외부와 내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죄’의 단계에서나 그리고 순전히 내면적인 ‘죄의식’의 단계에서도 그 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들이 관찰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외부에서 오시는 분이어야 한다. 나의 자유의지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해도 악이란 것이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 밖에서 근본적으로 주어진 외부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악이 외부와 내면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악인 ‘죄’의 단계에서나 온전히 내면화된 ‘죄의식’의 단계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악이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이러한 해결은 오직 하늘로부터 (즉 외부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여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유혹하기 전에 이미 에덴낙원에 들어와 있었던 사탄의 정수리를 깨트리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창3:15)
김삼환 박사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공동대회장, 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목사
1. 조용기 목사의 사차원의 영성에 대한 해석학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금세기 해석학의 대가인 Paul Ricoeur의 <<La symbolique du mal>> <악의 상징>에서 해석된 악의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악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순전히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악으로써 흠이나 때나 오염(la souillure)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 창세기에서도 이러한 악을 볼 수 있으니 에덴낙원에 이미 사탄이 뱀의 형상을 하고 들어와 있는 것에서 이러한 악을 찾아볼 수 있다.
– 이러한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악이며 따라서 순전히 외부적인 것이요 객관적인 실체이며 인격적인 주체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 따라서 이러한 악은 책임적인 주체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로 인해 더러워지는 것과는 관계없는 악이요 결국 계명이 아니라 어떤 주술적인 금기를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 금기와 관련된 것이란 어떤 부정을 탔다는 것이다(개구리가 불속에 뛰어들거나 하이에나가 천막근처에서 똥을 누거나 하는 것)
– 결국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어떤 금기를 어긴 까닭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당하는 고난과는 달리 인간주체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다.
– 의인 욥의 고난과도 같은 것이다.
– 벌은 금기를 어겼을 때 당할 복수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 이러한 벌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이 이제 인간주체의 윤리성을 지닌 두려움으로 되는 것은 흠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의 단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 창세기에서 이 단계는 뚜렷하게 관찰된다.
– 에덴낙원에 이미 들어와 있던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은 처음은 에덴낙원을 오염시킨 외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제 다음 단계로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라고 유혹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2) 죄(le péché)의 단계
– 죄의 관념이 생기는 범주는 하나님 앞이라는 범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다.
– 이 죄의 단계에서의 악이란 사탄의 유혹과 인간주체의 자유의지적인 반응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 죄의 단계에서의 악이란 외부적인 것과 인간주체의 내부적인 것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 이 죄의 단계에서의 첫 번째 상징은 ‘없음’ ‘결여’이다.
– 이 죄의 단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온 그 무엇, 무엇인가 있는 것, 즉 실재적인 것(때나 흠이나 오염 따위)에서 무엇인가 없는 것(하나님과의 계약이 파기됨으로 없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그리하여 ‘죄’란 어떤 목표가 없음, 빗나가 버림(하말티아), 벗어나 떨어지게 됨, 방황 등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은 바람과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시114:4).
– 그러나 두 번째로는 앞 단계, 즉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서의 흠의 상징에서처럼 실체로서의 죄의 모습이 드러난다. 즉 이 ‘죄’의 단계는 외부와 주체 내부와의 연결의 단계이므로 외부적인 것이 근본적인 것으로써 계속 살아서 주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의 죄의 고백은 죄인이 그 악을 온전히 내면적으로 의식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언자들이 폭로하고 드러낸 악의 실재성을 죄인이 자신의 내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바깥에서 본 것이다. 따라서 죄의 외부적인 실재성이 드러나게 된다.
–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죄를 회개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그와 같은 죄의 외부성, 실재성 때문이다
– 구약성경에서의 ‘죄’는 처음부터 개인적이면서도 이스라엘 공동체적이기도 한 까닭에 주관성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 또한 죄에서 원죄라는 유전적인 죄 관념이 생긴 것도 순전히 개인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초주관성 때문이다.
– 또한 이 ‘죄’의 단계에서는 죄를 의식하는 것이 온전히 나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에서 의식하므로 초주관성을 가지게 된다.
– 결국 ‘죄’는 내면적이기도 하나 동시에 객관적인 것이다
– 이처럼 흠과 죄의 내면적이고 현상학적 연결성이 분명해진다.
– 특히 ‘죄’가 지니는 보편성(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죄’가 주체의 어떤 능동적이고 고의적인 행위로 발생하기보다는 수동적 체험으로서의 ‘죄’가 발생한다는 것 즉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는 주체가 주체의 책임의식과는 관계없는 외부적인 흠의 세력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조적인 죄가 이러한 경우를 잘 보여준다.
– 죄의 상징인 빗나감 떨어져 나감에 대하여 돌아옴의 상징은 대칭을 이루는데 돌아옴의 상징이란 곧 용서를 말하는데 이 용서는 깨끗이 씻는 상징과 연결되는바 이는 때를 씻는 것이니 즉 흠의 상징에서의 차원이 다시 죄의 상징에 대해서도 돌아온 것을 보여준다.
– 사람이 스스로 짓는 죄의 결과로 포로 됨의 상태에 빠진다.
– 이 포로 됨의 상징은 자기 스스로 죄를 지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결과로 사람이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외부적인 흠의 구조가 다시 등장한다.
– 죄인은 나중에 돌아옴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자유의 상징으로 연결된다.
– 그러나 이 자유의 상징에도 외부적인 요소가 첨가되는데 그것이 바로 해방의 상징인 것이다.
– 이 해방의 상징이란 외부적인 것 즉 흠의 상징에서의 차원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 이처럼 흠의 구조는 다시 죄의 상징들 속에 재등장한다.
– 속죄의 날에는(레16장) 죄를 고백해야하지만 여러 가지 피를 뿌리는 속죄행위가 중심을 이루며 양을 광야에 내 보내는 의식이 있다.
– 이러한 속죄의 상징은 씻는 것과 양을 광야에 추방시키는 것으로 이는 외부적인 흠의 구조에서의 속죄의 상징이 ‘죄’의 단계에서의 용서의 상징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위해 다시 들어온 것이다.
3) 죄의식(la culpabilité)의 단계
– 죄의식이란 어떤 잘못의 주관적이고 온전히 내면화된 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의 존재론적이고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 죄의식은 온전히 내면화된 것으로 온전히 외부적인 흠의 차원에서의 벌이 복수하고 보복적인 것에서 이제는 교육적인 것으로 곧 교정의 과정으로 탈바꿈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 이제 악을 측정하는 것은 각자 내면의 양심이 된다.
– 또한 ‘죄’의 단계에서 ‘죄’를 바라보는 절대적 눈이 하나님의 눈이라면 죄의식의 단계에서는 그 절대적 눈이 바로 양심의 눈이 된다.
– 또한 ‘죄’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인류 전체가 그 안에 들어있는 상황이나 죄의식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개개인이 일으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 또한 ‘죄’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인데 ‘죄의식’에는 등급이 있어서 많고 적음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 죄란 전부 아니면 전무임을 바울은 말한다(롬3:10)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의인은 없으되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죄의식은 정도의 차이에 따라 의로운 자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다(창6:9)라든가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다(창5:24)든지 욥도 당시 흠이 없었다(욥1:1)라는 것 등은 그들이 남들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으로써 ‘죄의식’의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 이러한 죄의식이 발전하면 나와 나사이의 분열이 생기고 나는 소외된다.
– 내가 나 자신의 심판자가 되면서 자기 소외가 생겨난다. “나는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롬7:19)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20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스스로를 절망시키면서 절망하는 의지가 나타난다.
– 이러한 고백은 가장 내면화되고 세밀한 악의 경험을 나타낸다.
– 이러한 고백이 담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노예의지라 할 수 있다.
– 노예의지란 (자유의지+노예)인 것으로 자유롭게 살려하지만 점차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한다.
– 이 노예의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앞서 언급한 “죄의 단계”에서의 상징이 있으니 바로 포로 됨의 상징이다. 자기를 죄의 노예로 만드는 스스로의 자유의지 행위를 통해 죄인이 되고 죄인이 되어 포로 된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자기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가장 세게 조이는 자는 바로 자기이다’라고 말했다.
– 바울의 고백도 보면 자신 속에 자신이 아닌 외부적인 요소 즉 죄가 들어와 있다고 했다.
롬7:19, 2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이 죄의식의 단계에서는 이처럼 ‘죄’의 단계에서의 상징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이고 외부적인 흠의 상징도 들어와 있다.
– 즉 죄의식은 내면적이지만 악의 유혹이 외부에서 들어와서 그 유혹으로 죄를 짓고 죄의식이 주어지는 까닭이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약1:13)
(유혹은 외부적인 것, 즉 흠의 상징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
-흠의 상징이 비신화화를 거쳐 상당부분 주술적 개념들이 사라진다 해도 이 유혹의 바깥구조는 결국 죄 의식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데카르트적 순수의식이나 칸트의 비판의식은 외부적인 것 구조적인 것들을 다 제거시킴으로써 즉 흠의 상징에서 보여 지는 주술적 개념들을 비신화화를 거치게 함으로써 다 제거시키는 바 해석학은 이러한 비판철학의 역할도 다 포함해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 또한 외부적이고 유혹적인 것에서 오염이라는 상징도 나타나는 바 이 오염이란 상징은 흠의 상징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조로써 악이란 아무리 강해도 오염에 그치는 것이지 파괴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결국 노예의지라는 상징으로 압축되는 죄의식의 단계에서도 가장 외부적인 흠의 상징 그리고 오염의 상징이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론: 이처럼 악의 구조는 가장 외부적인 단계에서의 악을 상징하는 것들이 외부와 내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죄’의 단계에서나 그리고 순전히 내면적인 ‘죄의식’의 단계에서도 그 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들이 관찰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외부에서 오시는 분이어야 한다. 나의 자유의지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해도 악이란 것이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 밖에서 근본적으로 주어진 외부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악이 외부와 내면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악인 ‘죄’의 단계에서나 온전히 내면화된 ‘죄의식’의 단계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악이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이러한 해결은 오직 하늘로부터 (즉 외부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여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유혹하기 전에 이미 에덴낙원에 들어와 있었던 사탄의 정수리를 깨트리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창3:15)
2. 조용기 목사의 사차원의 영성(꿈, 믿음, 생각-언어)에 대한 해석학적 적용
Paul Ricoeur가 그의 해석학에서 밝혀낸 악의 현상학적인 구조에 대응하여 기독교 신앙은 악을 제거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용기 목사의 사차원의 영성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보여줌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 조용기 목사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사차원의 영성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외부적인 희망의 원리는 다름 아닌 꿈이다.
– 꿈이란 죄악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스스로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말세에 하나님의 성령이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바 순전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희망의 원리인 것이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사차원의 영성 중 꿈이란 것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꿈을 말하는 것이다.
2) 그 다음으로는 믿음이 등장한다.
– 믿음은 외부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나 자신의 자유의지적인 내면의 응답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희망이나 꿈)의 실상이라고 함으로써 꿈이나 희망이 믿음에 앞서는 것임이 분명하다.
3) 그 다음으로는 생각과 언어가 같이 등장한다.
– 생각과 언어는 온전히 내면화된 것으로써 외부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관계를 이루고 있는 믿음의 단계 그 다음이다. 믿음이 언어에 앞서는 것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는 성구로 보아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 또한 생각과 언어는 같은 차원에 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생각이 말로 나타나는 까닭이며(cf. 눅 6:45) 그리고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보듯 말이 생각을 주도하기도 하는 까닭에 생각과 말은 무엇이 앞서는가를 따질 수 없고 이 둘은 같은 차원에 있다.
– 리꾀르의 악의 상징에서 보듯 외부적인 것은 외부와 내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순전히 내부적인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이런 원리는 4차원의 영성에도 적용된다. 즉 꿈은 믿음의 근간을 이루며 생각과 말의 근간을 이루기도 한다. 즉 바라는 꿈이 없으면 믿음은 생겨나지 않으며 꿈은 우리의 생각을 주도하고 언어를 주도하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된다.
– 그러나 그 역의 방향 즉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겨나거나 꿈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믿음을 가진다고 순전히 외부적인 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도 아니다.
– 긍정적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엘 오스틴 목사의 심리주의적인 사상은 이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언어에서 믿음과 꿈이 주어지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꿈과 믿음에서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언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힘의 방향은 존재론에서 심리학으로 흘러가는 것이지 심리학에서 존재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세례와 그에 따른 표적으로 방언을 강조하는 정통 오순절 주의자인 조용기 목사는 4차원의 영성에서 외부적인 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꿈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힘의 방향이 존재론에서 심리학으로 흘러가는 것이지 그 역의 방향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용기 목사의 사차원의 영성과 오순절 신앙은 Word of Faith Movement나 오럴 로버츠, 케네스 헤긴, 캐더린 쿨만 그리고 오순절 은사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오순절 정통주의자 조용기 목사의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강조
– 왜 우리는 방언을 말해야 하는가?
– 말에 관한 한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말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방언 그리고 무의식을 구성하는 langue(랑그)의 언어 그리고 의식을 조성하는 parole(파롤)의 언어다
–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쟈크 라깡(Jacques Lacan)의 분석을 보면 무의식은 랑그의 언어로 구조되어 있고 의식은 파롤의 언어로 조성되어 있다.
– 이 무의식을 구성하는 언어 랑그는 배열구조를 이루며 이 배열구조는 알파벳 순서처럼 음운론적인 배열로 되어있는데 이 배열에 나타나는 단어들은 각자 말뜻은 분명하나 결코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 그러나 의식을 조성하는 파롤의 언어는 말뜻도 분명하고 말과 말의 연결이 논리적이고 추론적이다.
–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은 의식 밑에 무의식이 존재하며 따라서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실체라고 본다. 결국 무의식이 새로워져야 의식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며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방언이란 무엇인가? 이는 아예 말뜻도 모르는 말이니 말과 말의 연결이 논리적이고 추론적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방언은 무의식을 구성하는 랑그의 배열구조보다 더 외부적이고 더 밑바닥에 있는 근원적인 말인 것이다.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게 되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 변화된다.
– 우리의 무의식이 변화되어야 우리의 의식도 진정으로 새롭게 된다.
– 이러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는 성령이 시키시는 말인 방언을 해야 한다.
– 결국 힘의 방향은 방언에서 랑그로 랑그에서 파롤로 이어지는 것이지 그 역의 방향이 아니다
4.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에서 언급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의 순서
– 이 외부적인 것에서 외부와 내부의 관계로 그리고 내부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순서의 방향은 예수님이 마가복음 16잘17,18절에 언급하신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 그 표적의 처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다.
– 이는 온전히 외부적인 것 즉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귀신에 상응하는 첫 번째 표적의 단계다.
– 다음은 우리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 이는 성령이 우리에게 시키시는 방언으로써 성령과 우리의 의지가 연결되는 관계의 단계다.
– 다음은 우리 내면에 능력이 주어져서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되는 온전히 내면화 된 세 번째 단계다.
– 다음은 우리 내면의 능력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흘러가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단계다.
–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내어쫒는 것이 첫 번째 단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나 자신의 의지가 만나서 주어지는 믿음은 외부와 내부가 연결되는 관계로써 두 번째 단계가 되는 바, 믿음으로 계속 기도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첫 번째 단계인 귀신을 쫒아내는 단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는 우선 외부의 방해세력인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쫒아 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귀신을 쫒아낼 수는 없으며 오직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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