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정체성, 따갈로그와 현대 히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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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 선교사의 정체성, 따갈로그와 현대 히브리어 »
필리핀의 대표적인 ‘히야(Hiya)’ 문화가 있습니다…
스페인 333년 식민 지배, 미국의 48년 식민 지배, 그 사이에 일본의 3년 반 식민 통치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세대가 뿌리깊게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생긴 문화입니다. 통치자들에게도 굽실거리고 웃음과 미소로 잘 협력하지만 ‘히야” 문화를 건드리면 폭동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히야는 ‘부끄러움(shy)’이라는 단어로도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수치(shame)’라는 의미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이며 제일 많이 쓰이는 필리핀의 단어가 ‘히야’입니다. 수많은 파생어가 있습니다. 이 히야를 느끼는 민족이 필리피노이며 같은 필리피노로서의 유대감을 갖고 한 가족이 된 동포 또는 유대감을 ‘까프와(kapwa)’라고 하며, 이 까프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우리(Tayo 와 Natin)’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이라는 필리핀 말은 Sa amin Dios 로 Sa atin Dios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필리피노 의식 속에서는 ‘우리’라는 단어를 쓰지만 외국인은 절대로 ‘우리’라는 가족 안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평생 그곳에서 사역해도 여전히 남입니다. 필리핀 말 가운데 ‘Pakikisama’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말로 ‘모두 함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외국인은 이 단어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필리핀 언어는 대부분은 간접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화 통화하는 상대에게 ‘당신 누구세요(Who are you)?’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그가 누구입니까(Who is he or she)?’라고 묻는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하는 문화입니다. 모든 필리핀 언어 구조에 처음부터 끝까지 간접 언어와 간접 표현이 매우 많습니다. 통치자들에게 대들지 않고, 상대에게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문화입니다. 이 문화로 인해 식민문화(Colonial culture)의 대표적인 표현이 ‘히야(hiya)’입니다.
더불어 필리핀 언어는 내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모두 다 가족으로 표현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꾸야(kuya)’로 형 또는 오빠를 가리킵니다. 여자는 ‘아떼(ate)’ ‘누나’ 또는 ‘언니’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로 부릅니다. 나이가 어중간 하면 삼촌, 이모가 됩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이 나의 가족의 호칭으로 불리웁니다. 시장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해외에 나가서도 이 호칭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확대가족(extended family)이라고 부릅니다. 필리핀 전체가 확대가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필리핀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필리핀 말을 아무리 잘해도, 필리핀 음식을 먹고, 필리핀 사람들과 친해도 외국인은 특히 선교사들은 ‘확대 가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남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300년 넘게 통치했어도 그들은 외인이었습니다. 남이었습니다. 일본인이 들어와도, 그리고 미국인이 반세기를 통치했어도 미국인은 여전히 남이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1970년대 말부터 입국하기 시작하여, 1980년 몇 가정을 이루더니, 제가 입국한 1992년 1월 즈음에는 제법 그 수가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00가정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필리핀 전역에 누가 어디에 있고, 그 집 아이들은 몇명인지를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나투보 화산 근처에서 난민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면서 영어로는 더 이상 사역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필리핀 말인 따갈로그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원만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고 제자훈련도 불가능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따갈로그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는 필리핀 국립대학인 UP(University of Philippines)도 있고, OMF에서 하는 언어 학원도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OMF에서 하는 언어 학원에 등록하였습니다. 사역한 첫해에 따갈로그에 목말라 했기에 교재를 받아보니 그렇게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초급, 중급 그리고 고급까지 마치려면 18개월이 걸리는 과정이었습니다. 따갈로그는 말레이 언어이며, 후에 들어온 중국 후치엔 단어와 더러는 광동어들, 그리고 스페인어, 일본어 더러, 그리고 영어가 마치 자신들의 언어인 것처럼 완전히 동화되어 자유자재로 변화 그리고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어와 어순과 구조가 다르고 일부 단어는 현지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연습으로는 안되는 단어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현지인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저의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또 솔직한 필리핀 사람들은 제가 틀린 말이나 발음을 하면 동네 어귀에서 저의 말과 발음을 흉내 내며 웃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말을 모를 때에는 그것이 나를 두고 한 말인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한 말인지를 몰랐는데 알아 듣기 시작하면서 이만 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안녕하세요?라는 필리핀 말만 해도 좋아하고 박수 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니 “이렇게 오랫동안 필리핀에 있으면서도 그 말도 못 알아 듣느냐?”라고 말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영어로 설교할 때에는 통역을 세워서 했기에 존경을 받는 것(저만의 착각) 같았는데, 필리핀 말로 설교하기 시작하니 따발총처럼 저에게 필리핀 말을 하는데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필리핀 그 큰 땅에서 저 혼자 바보가 된 듯 하였고, 아무리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이해하려고 해도 어순과 문법 구조가 다르며, 표현법이 한국어와 말레이 언어는 아예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일본어나 중국어는 얼마나 친숙하며 배우기 쉬운 언어였는지를 그때 알았습니다.
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아내와 상의하고 교회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따갈로그를 배워서 따갈로그만을 쓰고 따갈로그로 설교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성도들은 영어를 하지 못하니 말할 때마다 답답해 하였고, 저도 못 알아 들으니 표정만 보고 짐작하는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필리핀에 들어간지 반년이 넘어서 시작된 일입니다.
OMF 언어 학원에서 준 교재를 받아 들고 보니 그 두꺼운 교재가 얼마나 그토록 쉽게 잘 쓰여져 있는지 밤을 새고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명사형 언어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밥을 먹습니다. 밥을 짓습니다. 밥 벌어 먹습니다.
우리말은 모든 문장에 명사를 딱 집어 넣어 명사에 목적격, 목적격 조어, 주어 그리고 동사를 붙여서 문장을 만듭니다.
필리핀 따갈로그는 어근(root word)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입니다. 어근은 모든 어휘의 뿌리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 뿌리 단어를 변형해서 목적어, 명사, 동사, 형용사를 무한할 정도로 만들어 냅니다. 이 뿌리 언어를 중심으로 시제(과거, 현재, 미래형)도 바뀌고, 주어부터 말을 끝맺는 모든 문장이 다 같이 바뀝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저의 영혼은 하늘로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제 생애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학원 가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한 달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는데 학원 강사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공부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미 필리핀 따갈로그의 언어 구조를 깊숙이 이해하고 있고, 문법을 통달해서 자신이 더 이상 저를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간청했습니다. 아니다?고 그것은 당신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나는 언어로는 베이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당신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저를 내쳤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따갈로그를 배운 것은 그 1개월이 전부입니다.
저는 따갈로그를 깊게 배우고 싶은데 OMF 언어 학원에서 조차 배울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신 감동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채로 따갈로그로 암송해라!
세계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성경 번역에는 최고급의 어휘와 가장 유려한 표현으로 번역합니다. 저는 Magandang Balita 따갈로그 번역 성경으로 학원도 1개월 밖에 안 다닌 제가 따갈로그로 강해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따갈로그를 공부하겠다고 성도들에게 발표를 해 놓고 불과 한 달 만에 따갈로그 강해 설교를 하겠다고 하니 성도들이 비웃는 듯 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구요.
저녁 시간이 되어 따갈로그로 강해를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엉터리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의 반응은 좋았습니다. 영어로 할 때는 아예 반응이 없었는데 이토록 ‘아멘’도 잘 해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신학교를 다니던 연세가 지긋하신 토니 집사님이 저를 강대상 앞에 있는 칠판 앞으로 세웠습니다. 그의 손에는 빼곡하니 메모가 가득했습니다.
그는 칠판에 메모지에 적혀 있는 단어나 문장을 쓰고, 제가 틀린 발음, 틀린 표현법, 틀린 단어를 말하고 갓난아이처럼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선교사이자 목사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꾹꾹 눌러 담고 따라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언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의 표현법은 초등학교를 조금 넘긴 수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필리핀 전역을 돌며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지도자 훈련을 하고, 전도집회를 여는데 모두다 따갈로그로 통역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필리핀 간지 첫해입니다. 현지인 목사님들이 따발총처럼 말해도 제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제가 말의 속도가 좀 빠릅니다. 통역할 때의 저의 언어 속도가 매우 빠른가 봅니다.
저는 필리핀 사람처럼 콧수염도 기르고, 거의 원주민 수준으로 새카맣게 그을린 전형적 필리핀 사람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필리핀 어느 한 도시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통역에 그리고 기도회에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때에 한 필리핀 목사님이 저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 고향이 어디입니까?”
저는 질문이 궁금해서 무슨 질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고향을 묻는 것인지 또는 필리핀 고향을 묻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필리핀에서 따갈로그가 깊은 지역인 불라칸(Bulacan) 다음으로 까비테(Cavite)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은 대학에서 따갈로그를 전공했고 매우 깊은 따갈로그를 구사하고 있는데 자기가 보건데, 저의 따갈로그는 불라칸 따갈로그도 아니고 더러는 까비테 따갈로그가 보이지만 희한하게 ‘와라이 와라이’ 즉 사말 사투리가 묻어 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희 교회 성도들의 고향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따갈로그 지적질(?)을 했던 토니 집사도,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사말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성도들로부터 은연 중 사말 사투리에 사말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필리핀 사역하던 두번째 해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그 필리핀 목사님의 말을 듣고 흘러 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멈추질 못했습니다.
“내가 드디어 필리핀 따갈로그어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필리핀 사람이 다 되었구나”
우리는 히브리어를 말할 때 사어라고 합니다. 수메르어, 아카드어, 히브리어 모두 사어입니다. 문자로는 기록되어 있는데 구어로 생활용어로는 사용이 안된 지 수천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외무부 장관인 벨파우어(Arthur Belfour)가 벨파우어 선언(Belfour Declaration)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 땅에 오는 유대인들은 언어가 다 달랐습니다. 이디쉬 언어를 쓰는 사람, 모로코 아랍어를 쓰는 사람, 독일어를 쓰는 사람, 폴랜드어를 쓰는 사람, 우크라이나 언어를 쓰는 사람 그리고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로 유대인 정착촌은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죽은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현대 히브리어로 만든 사람은 현대 히브리어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 1858-1922)입니다. 그는 죽은 언어인 히브리어를 생활언어로 쓰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현대 히브리어 사전 편찬이었습니다. 지금의 벨라루스의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Eliezer Yitzhak Perlman입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1881년에 예루살렘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 가서 정치학과 중동학을 공부하였고 정통 고전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독일어, 러시아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다른 언어 구사도 뛰어났습니다.
그가 현대 히브리어를 사용하려고 하니 문제가 많이 발견 되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우리가 고전 히브리어를 보면 시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는 히브리어는 깊고 깊기만 합니다. 이것을 성경 고전 히브리어가 메시야 오심과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두 개의 시제만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 히브리어가 전체가 메시야 중심으로 되어 그렇게 단순한 것 같아도 신비하고 오묘하고 놀랍도록 그 의미가 깊기만 합니다. 그런데 현대 히브리어를 창제하려고 하니 어제 밥을 먹은 것인지, 지금 먹고 있는 것인지 또는 앞으로 먹을 것인지에 대한 시제가 분명히 있어야만 했습니다. 마치 무슬림들이 코란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운 무슬림 학자들조차 코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1400년 전에 쓰여진 아랍어 그 중에서도 사투리 중에서 가장 변방의 사투리인 꾸라이시 부족 아랍어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정통 유대인 학자조차도 성경 히브리어를 이해하려면 타나크 람(Tanakh Ram)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타나크 람은 구약 성경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현대 히브리어로 재개정한 번역본에 해당합니다.
현대 히브리어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난제가 있었습니다.
세탁기, 텔레비젼, 라디오, 기차, 자동차, 엔진 등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엘리에제르 벤 야후다는 몇가지 원칙을 정합니다. 고대 히브리어에 존재하는 단어가 지금도 통용되는 것은 다시 사용하고, 고대 히브리어의 문법을 기본으로 현대 히브리어는 좀 더 쉽고 평이하게 문장의 골격과 문법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법에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 준비했어요’와 같은 아주 자주 사용되는 일상 표현 등이 성경에는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조차도 새롭게 만들어 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정착한 언어가 혼잡한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에 현대 히브리어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이 학교입니다. 어느 날 벤 엘이에제르 벤 예후다의 아들 이타마 벤 아비(Itamar Ben-Avi, 원래 이름은 Itamar Ben-Zion이었으나 후에 개명)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엘리에제르가 묻습니다. 벤 자이온(당시 이름)이 대답합니다. “나를 자꾸 아이들이 놀려요” 그래서 묻습니다. “아이들이 이디쉬를 썼니 아니면 히브리어를 썼니?” 그 말에 벤 자이온은 대답합니다. “히브리어요”
수천년 만에 죽은 히브리어가 아이들 학교에서 장난치고 놀릴 수도 있는 살아 있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자신의 자녀를 통해 확인할 순간입니다.
저는 필리핀을 떠난 지가 22년이 지나서 일년에도 몇 번씩 필리핀을 방문하건만 필리핀은 저의 조국처럼 가난한 모습만 보아도 가슴 아프고, 아직도 그 언어가 정겹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리핀 사람으로부터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던 그 질문이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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