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우상화를 무너트리는 복음통일
Dr.ElijaKim ◙ Photo&Img©ucdigiN
[영성칼럼=Dr. Elijah Kim] 김일성 우상화를 무너트리는 복음통일 »
북한 우상화 무너뜨릴 수 있는 것 –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능력!
남북은 이념대립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먼저 믿는 자가 자신을 처서 복종하고 회개하고 깨끗함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할 때만이 순교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 복음 통일을 이룰 수 있으면 동시에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할 수 있어…
들어가는 말
한국 전쟁 이후 정전 협상이 체결되고 분단이 재개된 지 어언 70년이 지났습니다. 70년의 긴 세월동안 이제는 문화도, 언어도, 사상도, 심지어는 삶의 방식도 이질화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 긴 시간동안 남한에서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와 복음화가 이루어져 세계 선교의 한 주축을 감당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인류사 가운데 한류를 낳았고, 군사적으로 세계 6위를, 그리고 IT를 비롯한 반도체 메모리, 조선산업, 디스플레이, 전자 산업에서는 세계 1위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해외 건축 및 방산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우뚝 선 국가로 남한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길고 긴 김일성 우상 숭배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에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좀더 알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복음 통일을 위한 방안 마련에 진력해야 합니다.
남북한을 바라보는 관점
70년의 분단 앞에 우리는 서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남조선(남한)과 남조선 사람들을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미국의 충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북한을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공산화되고 또한 주체사상화된 나라요 주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남한 이승만 초대 정부는 종전 협정 이후 전쟁의 폐허 뒤에 일어나기 위한 복구화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서는 산업화, 근대화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제는 세계 경제 10 대국으로 선진국에 진입하여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실제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수치가 불가능하지만 세계 216개국 가운데 138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국내 총생산도 책정할 수 없어서 IMF와 World Bank 는 북한을 순위에 포함시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UN이 2020년 기준으로 낸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15,84,700억 달러 그러니까 157억 달러가 조금 넘는 최빈국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UN 발표대로라면 남한과 북한은 114배의 국내 총생산 차이가 납니다. 이는 지금 남북한 차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북한에 존재하는 경제력, 군사력, 인구, 자원 뿐 아니라 70여년의 분단 가운데 형성된 국가 체제와 역사 차이는 상당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북한을 어떻게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13년 현재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한반도가 분단되던 시점에서 소련 점령하의 북한이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가로 70년 이상 그대로 존속해 왔다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남한도 민주주의 체재를 도입하였지만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으면서 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민주주의 성공 사례 국가이면서도 선진국형 수출 주도형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처럼, 북한도 지난 70년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였고,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을 어떤 국가로 보느냐?”에 따라 남북 문제와 복음 통일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남북한 접근법: 특이한 분단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알려면 해방 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78년 동안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볼 때에 북한을 제대로 바라보는 공정한 시각이 형성될 것입니다.
-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시기
- 한국 전쟁 당시
- 종전협상 당시
- 김일성 독재 체제 수립
- 주체 사상
- 김일성주의 우상숭배 종교 국가
- 김정일 체제
- 김정은 체제
우리는 해방 후 당연히 통일 국가로 출범할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매우 특이한 분단을 겪게 되었고 이는 지금처럼 70여년을 넘게 분단국가로 살아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처음 공식 거론된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직후인 1943년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직 일본 군국주의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들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인도차이나 일부 국가와 필리핀을 점령하고 그리고 버마까지 침략하던 전성기(?)에 논의되어졌다는 점입니다. 회담 참석자로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으로서 이들은 전반적인 전후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 중에 조선의 독립을 거론하였고 그들은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동의하였습니다. 그들의 합의는 “우리 미 · 영 · 중 (당시 장개석 국민당 중화민국) 3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서 적절한 경과를 거쳐서(in due course)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합의에서 언급한 ‘적절한 경과를 거쳐서’는 신탁(信託)통치로 해석되었고 해방이 되더라도 바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고 신탁통치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독립시킨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매우 친밀하였고, 국민당과 함께 한 항일운동과 항일 독립운동 등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승만, 김구, 안창호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노력들이 가져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민당의 장개석은 회담 참석에 앞서 김구 주석을 만나 한국인의 간절한 의지와 요구사항을 듣고 이 회의에서 말한 것이며 미국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적극 설득한 이승만의 영향도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조선의 독립이 재차 확인된 것은 일본의 항복 선언이 있기 전인 1945년 2월에 미·영·소 3개국 정상이 모인 흑해 크림(크름)반도 얄타 회담입니다. 여기에서 3국 정상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담의 내용은 카이로 회담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데 한국(당시에는 조선, Korea)을 비롯한 약소국들의 독립을 재확인하며, 그들 국가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합법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이 분할 점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 점령 지역은 서독이 되었고, 소련 점령 지역은 동독이 되면서 독일은 분단국가가 됩니다.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국제연맹의 후속으로 국제연합 즉 UN 창설을 합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패망 1개월 전 포츠담 회담에서 전승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최종 확인하기에 이릅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 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지만 남북은 분할되고 북쪽은 소련군의 주둔으로, 남쪽은 미군의 주둔으로 분할됩니다. 갑작스런 일본의 패망과 중국, 소련,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흩어져서 행해졌던 독립운동은 각각 달라서 통일된 국론을 이루기 쉽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각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에는 이념과 지도자들에 따라 좌우 대립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남쪽에서는 김구,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박용만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인 박헌영까지 남한 정부 수립에 관여하면서 해방 후 정국은 혼돈과 혼미 가운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항복과 해방 이후의 한반도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해방
-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 1945년 북위 38도선 경계로 미군은 남쪽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
-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미영소 외상회의 4개항 합의
- 민주주의 기반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
-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
- 1946 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US-Soviet Joint Commission)
- 1946년 4월 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면 과거 반탁운동을 불문에 붙이고 협의대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공동성명 5호 발표
- 1946년 7월 좌우합작 운동
-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선언
-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1947년 7월 1일 평양 회의 개최
-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 1947년 8월 28일 미국, 한국 문제를 미,소,영,중 4개국 회담에 맡기자고 제안
-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 유엔 상정
- 1947년 9월 26일 소련,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
- 1947년 10월 18일 미국,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 제안
-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 해산
-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 결의
-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 남한단독 선거안 가결
- 1948년 남북한 자체 정부 수립
- 1949년 남북한 간 공식적인 인적 교류 금지
-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민족 간에 적대감 고조
다시 짚어 보는 한국 전쟁 (1950-1953)
우리의 분단은 우리가 원했던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의 독립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전부 민주 진영이었다면 한반도의 분할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함락과 베를린 입성을 이룬 국가는 소련이었기에, 연합군의 한 축으로서 가지는 승전국 소련의 입김은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심요 지역 및 서간도와 동간도 그리고 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그리고 상해를 포함한 중국, 연해주를 포함한 소련 지역, 일본,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망명 정부 및 항일 운동을 하던 단체들은 우후죽순처럼 많았으며, 일본의 패전 후 고국으로 들어 온 이들로 말미암아 강력한 일본 압제가 끝난 남한 지역은 혼돈 그 자체였던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 지역도 소련을 등에 없고 들어 온 김일성은 갑산파를 등에 업고 혜성처럼 김성주가 아닌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남한에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서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남로당을 더이상 이끌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박헌영은 밀입북하여 남로당과 북로당은 하나(조선 로동당)가 되어 남침을 감행하게 됩니다. 박헌영은 남침 만이 통일의 해법임을 설파하고 박헌영과 김일성은 스탈린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남게 된 군수물자를 공수 받게 되었고, 똑똑하고 자기의식이 강한 박헌영 보다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없이 소련을 맹종하는 김일성을 통해 위성국가처럼 조정하기에 용이하다고 스탈린은 판단하였습니다. 한편 하지 중장을 통한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의 정부 수립과 더불어 신속한 정부 이양이 이루어짐을 본 미국은 1950년 1월 12일 에치슨 라인(미국무부 장관 Dean Gooderham Acheson의 이름을 딴 Acheson Line)을 선포합니다.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은 대륙이나 반도가 포함되지 않는 섬으로 미국의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구상인데 북태평양 알류산 열도부터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 그리고 타이완과 필리핀까지 연결하는 Island Line 즉 도서 국가 연결 라인으로 그 외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 하게 되고 남한에는 단 한대의 전차도 남지 않게 됩니다. 미군이 철수한 소식을 접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기회를 절호의 남침 기회로 봅니다.
한국 전쟁은 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을 돕는다고 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에 남침하였기에 우리에게는 6.25 전쟁이라는 용어가 매우 익숙합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경 북한은 암호명 ‘폭풍 224’ 이름으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 한국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간 치열한 교전이 있었습니다.
행정안전부의 국가기록원의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으로 인한 한국군 전사자는 137,899명이고, 유엔군 전사자는 37,902명이며 도합 175,801입니다. 부상자는 한국군과 유엔군 포함하여 모두 554,202명이며 실종 또는 포로는 모두 42,605명입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은 통계치가 한국전란 4년지와 군사정전의 편람과 미군 자료가 다릅니다. 따라서 저는 미군 자료의 통계를 사용하겠습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 인명 사망 522,000명, 실종과 포로는 102,00명이며 비전투 인명 손실도 177,000명에 달합니다. 중공군도 972,600명이 참전하여, 사망자 148,600명, 부상자 798,400명, 실종, 3,900명, 그리고 포로 21,700명입니다. 1951년 3월까지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6,514,581명입니다. 6.25 전쟁 기간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224,663명, 학살 128,936명, 부상 229,635명, 납치된 자 84,532명, 그리고 행방불명된 사람만 해도 303, 212명입니다. (참조: https://www.archives.go.kr/theme/next/625/damageStatistic.do)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김일성이 6월 25일에 남침을 감행하게 되었는지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은 일제로부터 광복하게 된 8월 15일에 남북 적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6월 25일에 남침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를 일자로 계산하면 단 2개월 만에 남한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것입니다. 38선에서 매일 10km씩 남진하면 모두 50일이 필요합니다. 500kim이면 부산까지 점령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계산하기 위해 8월 15일로부터 거슬러 역으로 50일을 계산하면 6월 25일이 됩니다.
전기한 바와 같이 북한군의 남침은 남북한의 심각한 군사력 차이를 보여 줍니다. 북한은 일본이 항복하면서 남기고 간 일본제 무기도 사용했지만 소련이 제공한 군수물자로 남한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상원조를 하던 스탈린은 판매로 바꾸었고, 김일성은 금과, 은, 철광석, 모자나이트, 쌀을 군수 물자 대금으로 지불하였습니다. 세계대전으로 확전을 원치 않았던 소련은 최신 전차나 최신 전투기는 제공하지 않고 2차대전때 사용하던 중고무기와 화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평사포 및 곡사포를 제공했습니다. 전차도 최신 전차인 T-54나 IS-3는 제공되지 않고 화력이나 대전차전 능력이 두 전차보다 약한 T-34가 제공되었습니다. 전투기 같은 경우 제트 전투기도 아니고 소련에서는 이미 퇴역해 예비부품도 부족한 프로펠러 전투기가 제공됐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한군에는 전투기는 커녕 변변치 않은 전차도 없었고, 에치슨 라인을 선포함으로 한반도 방어 라인에서 철수한 미국은 이승만 박사의 군사지원 요청을 외면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는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북한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였고 서울은 3일만에 점령 당하였으며, 불과 전쟁 1년 만에 남쪽과 북쪽을 오르는 내리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 되었습니다. 남한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지연전으로 수도를 포기하고 한강 철교 폭파함으로 수도권에 있는 병력을 남하 시켜 지연전 위주로 북한군의 진격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나마 주효하여서 김일성이 예측한만큼 10km씩 남진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조금 시간을 벌게 된 우리 군은 있는 병력을 재편성하였고,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임시 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에 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방어 라인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왜 이토록 신속하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군 개입이 이루어졌는지를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쪽의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을 철수시킨 미국은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으로 방어선을 한반도 밖으로 밀어냈지만, 실제적인 김일성의 침공을 보고 기존의 정책을 바꾸게 됩니다. 이는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에 북한의 침공을 명백한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유엔군의 참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기 앞서서 미국은 6월 27일에 트루먼 성명을 발표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따르는 유엔군 합동 사령부를 7월 7일에 설치하게 됩니다. 김일성이 남한 전체 점령을 목표로 한 50일 전쟁의 속전속결이 이루기도 전 한국 전쟁 발발 13일만에 일어난 신속하고도 단호한 조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에는 북한의 무력 침략이 국제 평화 질서를 무너뜨리며, 한반도 정세를 방치할 경우 동북아 정세 변화가 일어나고, 이는 소련의 팽창으로 이어질 것은 불 보 듯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은 우리민족이 주님 앞에 기도한 응답이기도 하며 악의 세력의 남하와 적화통일을 무산시킨 성도들의 간구라고 저는 믿습니다. UN 군 참전 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과 전쟁 물자 공급 그리고 육해공군을 통한 연합작전 수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은 낙동강으로부터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이라는 절묘한 노림수를 통해 양동작전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한국전쟁 3년 1개월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는 처음 1년이 지난 뒤인 1951년 6월 23일에 소련이 휴전을 제휴할 당시에는 실질적인 전투 강도는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매우 빠르고 강력했던 북한군에 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군의 본격적인 군사 작전이 투여되기 전까지는 남한군 단독으로 방어를 해야 했습니다. 절대적 열세에 있는 남한군은 호남 방어를 할 여력이 되지 않아 포기하였고 7월 27일에는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마지막 방어선으로 낙동강 유역으로 후퇴합니다. 이때 북한군은 남한의 90%의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처럼 낙동강 지역만을 남겨 놓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있을 때 이승만 박사는 부산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금식을 통한 구국결단으로, 민족 구원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소련군 대표의 유엔 안정보장위원회의 불참으로 유엔은 한국전 참전을 결의함으로 전세는 뒤집혀지게 됩니다. 이어서 인천 상륙 작전은 오히려 북진을 할 수 있게 함으로 위기에 처한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함으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점차 국제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처럼 진행된 한국 전쟁의 큰 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50년 6월 25일: 선전 포고 없는 북한의 기습 침공
- 1950년 6월 28일 3일 만에 서울 함락
- 매우 빠른 속도 남진
- 국군 낙동강 지역까지 최후의 후퇴
- 유엔군의 참전 결의 및 후속 진행
-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 1950년 10월 1일: 국군 38선 돌파
- 중공군의 참전
- 국군 및 유엔군 압록강까지 진격
- 1950년 겨울 유엔군 철수
- 1952년 1월 4일: 서울 재함락, 1.4 후퇴
- 서울 수복 후 일진일퇴
- 전쟁 1년만에 남쪽과 북쪽으로 오르는 접전
- 1953년 7월 27일: 북한측 휴전 제의 휴전 협정체결
휴전 후 70년: 휴전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진행된 한국 전쟁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었으며, 공산화를 이루고자 했던 김일성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1953년 7월 27일에 38선을 중심으로 다시금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종전 협정을 체결한지 70년이 되었습니다. 휴전선이라고 알려져 있는 군사분계선(MDL, Militart Demarcation Line)은 종전 협정 이후 서쪽은 남쪽으로 더 내려왔고, 동쪽은 북쪽으로 더 올라갔습니다. 저의 모교인 송도학교는 개성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전에는 남쪽이었다가 종전 이후로는 북쪽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 각각 2kim씩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을 두고 그 사이에 있는 4km의 공간을 군사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로 설정했습니다.
이렇게 종전과 함께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 38선을 경계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군사적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2년 주기로 발간하는 2022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남한에는 50만명의 장병들이 있다면, 북한에는 128만명의 병력이 있습니다. 남한의 육군이 36.5만명인데 반하여 북한 육군은 110만명에 달합니다. 남한의 해군은 7만명이며, 북한의 해군은 6만명입니다. 남한의 공군은 6만5천명인데, 북한의 공군은 11만명이며, 남한에는 없지만 북한에는 1만명의 전략군이 있습니다. 남북한 합쳐서 영토는 223,000 km2인데 이는 영국의 영토가 242, 000 km2에 비하면 조금 작지만 남북한의 군사력은 178만명이 38선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습니다.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전차, 장갑차, 야포, 다련장/방사포, 전투기와 공군과 해군력에 있어서 수치로 보는 것으로는 북한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더불어 남한의 예비병력이 310만명인데 반하여 북한은 762만명에 달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후 탱크(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침략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남한군은 최첨단화와 전략적 능동방어와 한미연합군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태평양 함대 지원 등 북한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남북한만의 단순한 군사력 비교가 무의미한 것은 수치 외에도 보여 주는 병사들의 건강 상태, 전자전과 최첨단 무기, 공군과 이지스함을 통한 선제 공격 능력, 그리고 현무 및 공군의 압도적 능력은 단순히 전투기 몇 대의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남한 군사력의 우위와 방어력을 말해 줄 수는 없습니다. 특히 북한의 레이더를 무력화하여 북한의 공군기가 출동하기 전에 북한 전지역의 공군기지를 초토화 할 수 있는 화력과 AESA를 갖춘 공군기 등 북한 전투기가 남한의 두배에 해당하는 810대의 수치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북한은 재래식 무기와 병력으로는 적화 무력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전제하에 비대칭 무기를 개발해 왔습니다. 탄저균, 콜레라, 페스트를 유포하는 생화학 무기를 증대해 왔으며, 현재 보고된 바로는 30-4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의 핵도발에 대비하여 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가 남한 배치되어 있고, 한미 양국은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가동하고 있습니다. 확장억제 전략 협의체란 일종의 핵우산으로 미국이 핵무기와 재래식 전력 등을 활용해 한국 등 동맹국에 대한 적국의 핵 공격을 억제한다는 개념입니다. 남북이 아무리 군사 대치 가운데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려고 해도 결국은 수많은 인명 살상과 피해는 불가피하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첨예한 군사대치 가운데서도 우리는 남북한 대치의 해결의 열쇠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북한의 우상화 과정
앞서 전기한 ‘특이한 분단,’ ‘다시 짚어보는 한국 전쟁,’ 그리고 ‘휴전 이후 70년’을 다룬 이유는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김정은 정권의 성격과 실상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때론 서독과 동독의 통일을 말하면서 같은 선상에서 통일 비교론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독일 통일의 예를 통한 많은 비교의 글을 올렸습니다. 분명히 독일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프랑스에서 목회하신 한 목사님께서 주신 글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좋은 의견이며, 이는 제가 또한 하고자 하는 동일한 의도이기도 하여, 아래에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 분의 실명은 인터넷 유크 신문에 나와 있기에 참조가 되셨으면 합니다. (참조: https://www.facebook.com/groups/2024276951100901/permalink/2191225004406094/?comment_id=2194363417425586)
“독일과 한국은 역사와 정치, 문화와 정서 면에서, 더 나아가 서구적 세계관과 한민족 세계관 차원에서도 다르다. 통일정책이란 공통된 목적과 유사한 언어를 사용해도 이해와 적용이라는 실천 면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훌륭한 참고 사례는 되어도 모델 자체는 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글의 저자가 강조한 인류애와 동포애는 한국 정치가 이루지 못하는 지평을 열 수 있는 근본적이고 보편적 가치의 상위 개념으로 목표지향적이고, 가치공유적 방향으로 함께하고, 남북한이 포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는데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남북통일을 저해하는 일제와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된 한민족 역사관을 회복하고, 친일 친미 병리적 의존에서 벗어나, 오천년 동안 지켜온 자주민족주의, 범세계평화공존 가치관이 한민족의 역사 DNA였음을 자각하는 역사문화 개혁운동도 동반할 때, 새롭게 거듭난 민족공동체를 탄생시키는 저력이 되리라 생각해 본다.”
상기의 글은 많은 면에서 우리가 왜 통일 지상론 또는 통일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엄연한 현실에 기반한 통일을 기구해야 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네가지 입장, 그 하나는 남한의 입장 그리고 두번째는 북한의 입장, 세번째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있는 탈북민 및 북한 디아스포라의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과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제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먼저 북한의 실상 파악에 대한 첫번째 부분입니다. 북한의 유일한 지도자인 김일성 수령을 중심으로 영도체제 (북한식 령도체제) 수립은 실제로는 독일과 같은 통일 방식이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소련의 마르크스 레닌의 소비에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명백히 실패한 것임을 알았을 때 찾은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변화를 꾀합니다. 19세기말 독일의 에두아르드 베른스타인(Eduard Bernstein)는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에서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Revisionism)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이는 유럽의 자본주의가 19세 제국주의로 변모한 것과 같이 마르크스주의도 제국주의를 만나 궤도 수정을 해야 하는데 결국 노동 운동도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베른스타인은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 이후 1960년대 동유럽을 비롯한 많은 구공산권 국가들에서 수정주의 사상으로 분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동유럽과 소련이 공산주의를 폐기하기에 이를 때에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수정주의가 아닌 김일성 수령 영도주의 즉 주체 사상이 있었기에 그 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종전 후 70년 동안 공고하게 진행된 북한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 일인 지도체제 수립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태어난 김성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부모가 기독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름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김성주의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안식일 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김일성의 아버지는 반공주의자여서 만주에서 활동할 때 도리어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김성주가 어느 시기에 김일성으로 바꾸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가 조선 공산 청년회에 가담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동안 어떤 혁혁한 성과도 없던 그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전투가 홍기하 전투입니다. 일제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그의 항일 유격대가 초토화되었을 때 소련 88국제여단으로 옮겨 감으로 그가 신분 상승을 꾀한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늘 어릴 때부터 남의 공을 가로채는데 탁월했던 그가 김성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소련군의 후광을 없고 무명에 가까운 그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혜성처럼 평양에 입성한 것은 우리 민족사에 보면 비극 중에 비극이지만 북한에서 보면 길고 긴 우상화 작업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쪽은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었기에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소련 군정에 협력하면서 북한에서 정부 수립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어서 벌어진 신의주 반공학생사건과 1945년 12월에 개최된 외무부 장관 회담의 결의가 문제가 되어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1946년 소련의 군정이 종식되고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이듬해인 1947년에 이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합니다. 그리고 그는 1948년 9월 9일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언합니다. 남한에서 이승만 정부 수립으로 활동 입지가 제한당한 박헌영이 입북하여 김일성과 합류한 것이 그 이후에 일어납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남침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지만 이는 도리어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스탈린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김일성은 철저한 준비 가운데 남침을 감행하고 1950년 7월 8일에 스탈린에게 다시금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3년 1개월의 전쟁은 종식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은 김일성 독재 체제가 초기에는 수립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북한 내에 다양한 공산주의 파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유럽이나 소련과 중공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이 중국식 수정주의를 거쳐 등소평식 개혁 개방을 추진한 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도 아니고 현실에 입각한 실용주의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등소평은 사실상 공산주의의 많은 문제점들을 변화시키고 개혁 개방을 선택함에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중국의 국유기업과 사유재산 도입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문제점들을 전향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중국이 공산당 수립이후, 모택통, 등소평, 장택민, 후진타오, 시진핑에 이르는 다양한 지도자들이 계승되었지만 북한에는 김일성 영도주의를 중심으로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엎고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지지세력이 특출하거나 또는 뛰어난 혁명 사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초기에 그가 수립한 정권은 포괄정당에 가깝습니다. 여러 과정을 통해 출범하게 된 조선로동당은 출신 배경과 성향이 다른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과 계파가 연합한 연립정부에 가깝습니다. 북한 초기에는 소련 직계라 할 수 있는 허가이를 중심으로 한 소련파,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중국 연안파,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활동하던 남로당파,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가 있었는데, 김일성이의 만주 빨치산들은 갑산파와 같은 계열이 되어 연립하는 형태가 되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이 종전 협정으로 북한도 다시금 재건에 들어 가게 되었을 때 북한에, 박헌영과 남로당파 제거, 이어서 갑산파 제거를 위한 종파 사건을 통해 김일성 유일 영도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주체사상과 김정일 체재아래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 사망 후 김일성 우상화는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고 심지어는 수정주의도 아닌 종교적이며 정치화된 김일성 우상숭배의 광신 집단이 된 것입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을 로동당 창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동당이 실제로 출범한 1949년 10월 10일까지 많은 합종연횡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먼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조선 분국과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로동당이 되었습니다. 1948년 9월 9일에 내각 중심제를 기반으로 김일성이 수상에 취임하여 북한 단독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북조선 로동당과 남조선 로동당을 흡수 통합하는 방식으로 조선 로동당이 출범하여 김일성을 당 중앙 위원회 위원장으로 그 체제를 이끌어 갑니다. 이처럼 출범한 북한 로동당은 1949년 10월 10일에 실제적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6.25 남침 후 종전 협정이 체결 된 이후에도 북한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다양한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박헌영 남로당파, 김두봉, 최창익 연안파, 박금출의 갑산파와 만주파(김일성 포함)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위의 파벌에 속하지 않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종전이후 즉시 1953년 먼저 남침 적화 실패의 원인을 박헌영에게 돌려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김무정을 비롯해 박헌영과 남로당파를 제거합니다. 사실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가장 정통한 정적이 제거된 셈입니다.
가장 중요한 정적인 박헌영을 제거한 김일성은 1956년 조선 로동당 3차 대회에서 김일성 개인 숭배를 꾀하려는 김일성과 이러한 1인 숭배를 반대하는 매우 큰 세력과의 대접전이 벌어지는데 이를 8월 종파 사건이라고 합니다.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 서휘 및 소련파 박창옥을 숙청한 것입니다. 최용건이 김일성 1인 숭배를 위한 앞잡이가 되어 소수이지만 만주 빨치산파를 똘똘 뭉쳐 결집한 다음 이미 와해 상태에 있는 남로당파, 그리고 중심 세력이 없는 소련파와 연안파에 비해 김일성 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만듭니다. 이것의 발단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용건을 중심으로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어서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됩니다. 사실 전원회의에는 김일성 세력이 장악했기에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시로 향합니다. 또 다른 반대파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 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습니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하였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습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욱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습니다. 박헌영 남로당 제거에 이어 연안파와 소련파 제거는 김일성 일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를 제거했지만 가장 만만찮은 큰 세력이 있었는데 이는 갑산파입니다. 지금은 양강도에 들어가지만 과거 함경도였던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입니다. 김일성의 만주파와 함께 초기에는 같은 노선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최대의 정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상 세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김일성 이후 후계구도를 꿈꾸는 김정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박금철을 미화하여 영화화한 것을 빌미로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갑산파를 대거 들어내고 당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제거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이고 수년의 시간이 걸려서 대대적인 숙청을 하게 됩니다.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 핵심 인물들은 출당되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등 고초를 겪다가 사망합니다.
김일성 우상화 작업
1966년부터 1970대까지 이루어진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 숙청은 많은 관공서에 사람들이 텅텅 빌 정도로 사라지고 북한 각계각층에 전국적으로 숙청된 인원이 많아 대대적인 물갈이를 할 정도로 영향이 컸습니다. 또한 사형당하고, 수용소로 가고, 강등당한 인원의 규모가 지대했으며, 갑산파의 근거지였던 함경도와 양강도는 철저히 권력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갑산파 제거는 이제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만주파만 남게 되며 이는 백두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거짓의 신화화가 이루어집니다. 김일성 우상화의 사상적 근거는 주체사상으로, 통치체제로는 북한식 사회주의 이념을 기조로 한 일인숭배를 함으로 김일성이는 신의 경지에서 숭배를 받게 됩니다.
1972년 12월 27일에 사회주의 헌법의 공포와 주체사상을 국가 공식 이념화 하면서, 북한은 어떠한 견제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미증유의 우상화 왕조 정부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후에는 김정은까지 이어지는 세습 왕조 정권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972년은 김일성 주체 사상의 원년이며 동시에 북한식 사회주의라 할 수 있고 공산주의 포기 선언이기도 합니다. 1973년에 이르러 신설된 비서국과 조직지도부 그리고 선전부에서 김정일은 담당 비서를 맡음으로 실제적인 권력을 거머쥐게 됩니다. 1980년대에는 북한식 사회주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김일성 우상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이는 1990년 3대 세습 백두 혈통 우상화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어서 김일성 사망 그리고 김정일 사망과 고난의 행군이 있으면서 북한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 김일성 사망 (1994년 7월 8일)
- 김정일 사망 (2008년 8월)
- 김일성 김정일 시대의 3백만 아사자 발생
- 고난의 행군이 준 변화들 (군, 민, 당)
- 소련의 붕괴
- 북한 노동당의 식량정책
- 가장 부패한 통치 구조 (당-정-군 에서 군-당-정)
- 핵 개발과 군비증강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이 원해서 이루어진 분단은 분명 아니지만 남한에 세워진 민주정부는 국민의 표결권과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통치 그리고 농촌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를 통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선진국으로 도약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세워진 김일성주의는 일인 숭배 체재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정적 제거와 숙청으로 북한을 거대한 정신병동화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우상화 작업은 그 무엇보다도 모순 덩어리입니다. 거짓 선전으로 포장된 허상의 인물인 김일성을 신의 경지로 만든 사람은 다름아닌 김정일입니다. 이러한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우상화의 실체를 알고 스탈린을 매도했던 소련의 후루시초프 같은 인물이 아닌 자신의 혈육을 통해 우상화를 유지하는 것만이 거짓을 호도할 수 있기에 병상에서도 장성택을 비롯한 최측근에게 김정은을 통한 권력 승계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무너져 버린 공산주의도 아니며, 또한 북한식 사회주의도 아닙니다. 도리어 거짓으로 포장된 말도 안되는 허상과 허구를 실제로 둔갑시킨 사이비 종교 집단과 같은 김일성 우상화입니다. 저는 이를 종교적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지도체제에 큰 변화가 없으며 김정일 교시는 김정은을 통해 유훈 통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체 인민을 볼모로 삼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일가를 옹위하고 그 소수만을 살게 하는 사이비 집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알고 남북 통일이 동독과 서독에서 이루어진 과정이 아닌 기도와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거짓의 거대한 장벽이 걷히고 진리만이 나타나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김일성 우상화는 먼저 북한 전역에 일어난 대규모 가뭄과 홍수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났고, 인민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모습들이 고난의 행군 가운데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300만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20세기말 최악의 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북한 주민들은 태양처럼 떠 받들던 김일성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체제가 “이밥에 고깃국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낙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후 자발적으로 형성된 장마당은 남한의 실태를 그대로 전달하였으며 자발적으로 들어간 믿음의 성도들은 북한 지하교회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린도후서 10:4-6)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미 로마 제국이 우상숭배 가운데 있지만, 로마 제국을 복음화하는 전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상화된 북한을 오직 복음화와 복음 통일을 위한 전략을 통해 다음과 같이 행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
우리의 무기가 경제나 정치력이나 문화의 힘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 십자가의 능력
우리는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를 비롯한 다신교와 다재신론 및 범재신론과 우상숭배가 팽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을 통해 아래로부터 복음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북한의 우상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 통일에 준비된 자
남북은 이념대립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먼저 믿는 자가 자신을 처서 복종하고 회개하고 깨끗함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할 때만이 순교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 복음 통일을 이룰 수 있으면 동시에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남한의 기도하는 무리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 탈북민 성도들과 목회자 그리고 디아스포라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되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예레미아의 예언(렘 25:11)과 다니엘의 간구를 들으사(단 9:24-26) 70년의 노예제도가 끝나고 북한 주민을 자유케 하는 역사가 시작되기를 기도합니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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