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좋은 시를 만들려면 ‘알’을 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문화저널=조신권 박사] 시인이 좋은 시를 만들려면 ‘알’을 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
창의적 형상화(embodiment)는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한 순간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그레이엄 월러스(Graham Wallas)는 1926년 자신의 저서 『사고의 기술』(The Art of Thought)에서 창의적 사고의 단계를 넷으로 나누었는데, 준비(preparation), 부란(incubation), 조명(illumination), 검증(verificarion)이다. 창의적 형상화(embodiment)는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한 순간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소요되는 시간은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완성은 일정한 부란(孵卵)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부란’이란 한 새나 닭이 알을 품고 새끼를 까는 것을 말한다. 닭이 아무리 알을 품고 병아리를 까고 싶어도 때가 맞아야 하고 알(egg)이 있어야 하고 알을 품을 둥지나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알과 둥지를 만드는 기간이 필요한데, 시인에게 있어서 그 기간이란 널리 찾아서 수집한 소재와 사물과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만지는, 느끼고 생각한, 체험들을 품고 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을 품기 전에 둥지도 만들고 다양한 체험을 통해 부화할 알과 같은 소재들을 다수 수집하여 축적하여야 한다. 그런 일로써 시인은 광맥을 찾는 광부처럼 자연과 생활현장을 계속 탐사하여야 하고, 소재 탐색을 수없이 모색하고 반복적으로 시도해야 하며, 일상의 갈피갈피를 샅샅이 더듬고, 다양하게 책도 읽고 인상 깊은 사항을 노트도 하며, 여러 곳을 여행도 하고, 오감을 한껏 열고 수많은 인상과 느낌들을 긁어모아야 한다. 알이 없으면 둥지가 아무리 좋고 사명까지 챙겨 놓았다 해도 그 어떤 생산도 이루질 못할 것이다. 알 없이 어떻게 새끼가 나오겠는가?
알과 같은 소재나 다양한 체험이 축적되어 있다 해도 암탉과 같은 시인이 알을 품지 않으면 새끼에 비유되는 시는 생산되지 못한다. 특히 좋은 시를 완성하고자 하는 의식만 단지 있다고 해서 그 당장에 시가 되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즉석에서 즉홍시를 짓기도 하고 그것이 반듯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런 시는 깊은 맛이 나질 않는다. 좋은 시를 만들려면 오랫동안 그 재료를 품고 지속적으로 온도도 유지하고 알도 수시로 굴려주어야 알이 곯지 않고 부화된다. 그러니까 부란기란 알을 굴리며 일정한 기간 동안 생명생성을 이루는 시간이라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요리를 할 때 냄비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불을 붙이지만 완전한 맛이 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능한 요리사라해도 의식적으로 무엇인가 하기 보다는 한발짝 뒤로 물러나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생산 작업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화’라는 말은 ‘알을 까는, 곧 시를 만드는 그 작업에 대해서 상시 마음을 쓰고 있다’는 뜻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부란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순간적으로 알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무의식적인 정신 작용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아이디어 또는 시어(詩)가 꽃처럼 치솟아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중의 대표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843-1950)의 시를 가지고 시인이 좋은 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길던 짧던 ‘부란’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을 설명해보겠다. 필자의 역으로 “바다 옆에서”(By the Sea)라는 시를 함께 읽어 보자.
고요하고 풍만하고 아름다운 저녁,
숨죽이고 예배드리는 수녀처럼
조용하고 거룩한 시간, 환한 대낮의 해는
고요히 지고 있고
바다에는 하늘의 안온함이 깔린다.
들어라! 힘센 존재(신)는 깨어나
그 영원한 거동으로 끝없이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낸다.
여기서 나와 함께 걷고 있는 귀여운 아이! 귀여운 소녀!
네가 엄숙한 사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듯해도
너의 본성이 덜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너는 일 년 내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성전의 지성소(聖所)에서 경배하기에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도다.
-“바다 옆에서” 전문
이 시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초기 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흥분한 나머지 단 걸음에 프랑스로 달려가 얼마 동안 프랑스에 머문다. 그가 잠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동안 발롱(Anette Vallon)과 열애를 갖게 되는 데, 그녀와의 사랑의 열매로서 얻은 애가 칼로린(Carolin)이라는 딸이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실망한 워즈워스가 귀국을 서두르는 동안 어느 날 자기의 딸 칼로린과 함께 도버 해협의 프랑스 항구인 칼레(Calais) 해안을 거닐게 된다. 그때는 고요하고 풍만하고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것이 워즈워스가 딸 칼로린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면서 갖게 된 체험이었다.
이 시는 그가 딸과 함께 칼레 해안을 거닐면서 느낀 자연에 대한 신비로운 감정을 형상화한 14행시 소네트(sonnet)지만,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바로 쓴 시는 아니다. 만일 이 시가 그 자리에서 바로 쓴 시라면 현재 남아 있는 그런 종교적으로 심화되고 그토록 가슴을 울리는 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귀국한 즉후이었건 과거 어느 때이었건,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찾아 수녀가 숨죽이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본 거룩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품어져 있다가, 그 딸과 함께 칼레 해안을 거닐며 보았던 저녁 풍경과 연결되면서 ‘알’에서 ‘새끼’가 까져 나오듯이 그 기억 즉 무의식이 부화되어 시의 모습을 이루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체험이 확대되니까 사원에 감돌던 경이로운 힘이 칼레 해안으로 옮겨져 그 수면에 운행하는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부란과정이 없었으면 칼레 해안은 그저 고요하고 풍만한 아름다운 밤바다로 그려졌을 것이다. 수녀의 예배하는 분위기와 연결되면서 잠자던 힘센 존재가 깨어나 천둥 치듯이 파도를 일으켜 신적인 존재의 영원한 거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성서와 연계되면서 그 의미와 감성이 더욱 확대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바다 옆에서 느꼈던 체험만 담았으면 그저 하나의 생명정신을 노래한 낭만시로 그치고 말았을 시가 아주 그 의미가 깊은 종교시로 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승화되면서 더욱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세속에 깊이 묻혀 있는 어른들보다도 나사로와 같이 심신이 모두 가난하고 천진난만한 어린 딸에게서 그는 자연과 직관적으로 영교를 나누며 낙원의 축복을 누리는 거룩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으로 대유된 신을 찬양하기 위해 그는 성서적 인유(biblical allusion)를 끌어들여 ‘너는 일년 내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성전의 지성소에서 경배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연과 영교를 나누는 어린 딸 칼로린을 대제사장에 비유하게 되게 된다. 그렇다면 성전의 지성소란 신이 임재 하는 곳, 곧 경건한 자연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보다는 어린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있음을 워즈워스는 강조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전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그것은 이방인의 뜰, 성소, 지성소(Holy of Holies)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방인들은 성전 밖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만 들어올 수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곳으로 성별된 지성소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나눌 수가 있다. 이런 성전 구조와 묘사를 배경으로 하여 워즈워스는 자연과 직접 영교 하는 딸을 지성소에서 경배하는 대제사장에 비유했던 것이다. 결국 이 시에 나타나는 성서적 인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볼 때 자연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심신이 모두 가난하고 천진난만한 칼로린과 같은 사람은 지성소에서 직접적인 영교를 신과 나누며 합일의 축복과 환희를 누리는 대제사장과 동일시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시는 자칫 서정적인 자연찬미로 끝났을 서정시를 부란기를 거치면서 잠재의식 속에 묻혀 있던 지난날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드렸던 엄숙한 수녀의 예배에서 받았던 거룩한 풍경과 인상이 재생되어 칼레 해안의 체험과 연결되면서 서사구조가 이루어져 매우 심오하고 신비로운 시세계로 상승되는 것이다. 부란기란 이렇게 서정의 세계를 서사로서 좀 더 확대시켜 의미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는 종교시라고는 할 수 있어도 기독시라고는 할 수가 없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그의 시작 중기까지는 범신론적 신비주의자였으나 후기로 넘어갈수록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담은 시를 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영적인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서시』(The Prelude)라는 서사시다.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지은 시”라는 시를 하나 더 살펴보자.
땅 위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다신 없으리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자는 그 영혼이 무딘 사람이리라.
이 도시는 지금? 옷 마냥? 아침의
아름다움을 입고 있다. 조용히 벌거벗고
배도? 탑도? 대저택도? 극장도 사원도?
들을 향해?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
연기 없는 대기 속에 모두 찬란하게 빛나며.
태양도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그 첫 광휘로 골짜기와 바위와 언덕을 비춘 일 없으리.
이처럼 깊은 고요를 나는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노라!
템스 강은 유유히 마음대로 미끄러지듯 흐르고
아, 사랑하는 신이여! 집들은 잠든 듯하고
저 강대한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도다.
–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전문
이 시는 이른 아침에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체험한 장엄한 런던의 정경을 형상화한 14행시다. 마치 여장(女裝)을 한 듯한 아름다운 런던 시가 조용히 벌거벗고 들과 하늘을 향해 조용히 누워 있다. 조용히 벌거벗고 누워 있는 그녀를 향해 아폴로 신이 4륜 마차를 타고 행차하듯이 태양이 장엄하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며 감탄을 발한 시다.
“조용히 벌거벗고/배도? 탑도? 대저택도? 극장도 사원도?/ 들을 향해?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 연기 없는 대기 속에 모두 찬란하게 빛나며”라고 한 구절과 “아, 사랑하는 신이여!”를 보면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거의 틀림없고, 자연을 강력한 살아 있는 영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에서도 우리는 범신론적 자연신비주의를 감지할 수가 있다. 고요히 누워 있는 ‘강대한 심장’은 런던 시를 가리키는 비유다. 여자에 비유한 런던시가 조용히 벌거벗고 태양신 앞에 누워 있는데, 이런 일은 실로 감대한 심장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런던은 그만큼 강대한 도시인 동시에 태양신과의 합일을 열렬히 갈망하는 욕구와 종교적 신비가 깃든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대담한 표현을 통하여 범신론적 자연신비주의를 표출한 시다.
글 운암 조신권(시인/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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