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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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대니얼 웨그너(Daniel M. Wegner)ㆍ커트 그레이(Kurt Gray) 지음, 최호영 옮김/ 추수밭 »
마음에 갇혀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우리 자신의 마음에 갇혀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연결되기가 어렵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탈출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관점이다. 설령 기억을 잃어버리고, 명상을 통해 욕망을 쫓아내고, 정신적 통제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가라앉혀도 우리는 여전히 지각 활동의 한 원천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가 애쓴 만큼 우리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비밀이 열린다. – [책 내용 중에서]

대안학교에서 재생(齋生)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치면서, 번역한 책인 경우는 반드시 원제를 확인하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외국 서적을 번역하면서, 책의 판매를 위해 책 제목을 의도적으로 오역하거나, 원제와 다른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안학교에 인문학 강좌를 들으려고 온 재생에게 번역한 책일 경우 꼭 이 일을 하라고 합니다.《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으로 한글 제목을 붙인 책의 원제는 “The Mind Club: Who Think, What Feels, and Why It Matters”입니다. 한국어 번역에서 부제로 쓴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마음의 비밀’이나 책 제목이 원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대니얼 웨그너의 유작이기도 한 이 책은 지각(知覺)을 통해 마음이 창출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분석했고, 그 사례 안에 동물과 신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말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저자들의 해석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마인드 클럽’의 회원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상처는 아프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몸에 난 상처든지 마음에 난 상처든지 상처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겪었던 고통이 나를 전인적(全人的)으로 규정하는 순간부터 나는 수동태에 의존하는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능동적인 행위 능력을 박탈당하고 오로지 상처받기 쉬운 감수자(感受者)로만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도덕적 수동자로 고착돼 살면, 사회에서 나를 일방적으로 ‘배려’하기에 비난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열 개의 단락 별 주제어를 통해 이런 배려에 빠져서 사는 수동자(受動者)가 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수동자는 능동적으로 일을 만드는 행위자의 반대 개념입니다. 수동자는 삶에 대한 능동적인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존재로만 나를 규정할 경우,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로 인해 개인이 가진 능력은 점점 약화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축됩니다.
해 아래 세상에는 내 생각과 반대되는 도덕점 관점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의 행위가 내게 어떤 경로를 통해 해롭게 지각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동자는 그걸 상처를 경험한 사건으로만 생각하기에, 화(火)와 공포(恐怖)만 불러일으킵니다. 내가 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적(敵)조차 때로 친구가 될 수 있기에, 나와 다른 그와 적절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상처가 더 크게 번지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상처의 기억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지냅니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행복에 이르는 길은 ‘몰입(flow)’해서 자기를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 포함됩니다. 자기가 사라지고 불필요한 걱정으로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현재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데서 인간은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자기가 되게 하는, 정의하기 꽤 어려운 마음의 성질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오늘 아침의 당신이 어젯밤의 당신과 똑같지 않은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억만으로 어젯밤의 나와 오늘 아침의 내가 같은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은 자신을 매우 허약한 존재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확증편향 등에 의해 기억을 선택하는 뇌를 인간이 갖고 있기에, 모든 기억도 선택적으로 잊힐 수 있습니다. 또 기억이 상실될 수도 있고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마음의 석판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어떤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마다 재연되는 연극에 더 가깝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덩달아 변화하는 대강의 각본을 토대로 이뤄지는 연극과 인간의 기억은 같은 모습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에 신(神)도 포함됩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에게 신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신은 일종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을 믿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도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존재로 인간의 마음에 지각됩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세계를 파악해서 마음을 만듭니다. 뇌에 연결된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된 정보를 뇌가 해석해서 마음을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은 지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자유의지는 별개로 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의 연장입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가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도 인간이 벗어나야 할 대상입니다.
중세 때는 동물도 재판했습니다. 농작물 파괴로 유죄를 선고받은 메뚜기, 알을 낳는 암탉으로 행세해서 사형 선고를 받은 수탉, 돼지에 대한 교수형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을 재판한 사람들은 메뚜기나 닭, 돼지 등에게 대단한 지능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해되지 않는 불의의 장면을 목격한 후, 특별히 비난할 대상을 찾아서 행위자와 수동자 사이의 완전한 ‘쌍의 완성’을 이뤘습니다. 그러면서 ‘동물에게도 마음과 의식’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동물이 종교법의 불가사의한 절차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따를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에 갇혀 합리적인 대안을 거부했고, 동물에 대한 재판을 진행함으로써 그들의 땅에 정의가 구현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저자들이 피하라고 조언한 수동적 감수자의 한 유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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