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회 됨을 가꾸고 돌봐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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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이창배 발행인] 나의 교회 됨을 가꾸고 돌봐야 할 때 »
타철진열(打鐵趁熱)의 자세로 교회 본질 되찾는 노력 펼치고자…
지금 늦었을까?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낙후되고 버려진 탄광지역에서 해바라기밭으로 말미암는 생기가 되살아나듯이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되찾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나의 교회 됨을 가꾸고 돌봐야 할 때이다…
무덥다. 여름 날씨야 당연히 무더운 것이 뭐 그리 대단할 일도 아니지만 예년에 비해 갈수록 무더위가 심해지는 것은 분명하고, 기후 위기 운운하며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전망치를 보자면 그 심각성이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이 삼복 무더위 속에 잠깐 짬을 내어 당일치기로 강원도를 다녀왔다. 모처럼 푸르른 산야와 시원한 바다를 보니 맘도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오래전 고국을 떠나 독일에서 선교사역으로 보낸 세월이 스무 해가 넘다 보니 귀국한 지금도 아직 우리나라의 국토 변화가 제대로 실감이 나질 않는다. 아닌 말로 여기가 유럽이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그만큼 많이 변모됐다. 예전 기억 속에 남아있던 망상해수욕장 풍광은 이미 먼 옛날이 됐고, 해수욕장 주변 시설과 도시의 모습도 달라져 왠지 낯선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좋았다. 이만큼 고국의 산천과 바다가 곱고 아름다우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망상해수욕장을 오기 전에 태백에서 열리고 있는 해바라기 축제를 다녀왔다. 넓은 산골짜기를 해바라기밭으로 일궈 일만 송이 해바라기꽃이 활짝 핀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유럽 생활을 하면서 종종 여행을 할 때 둘러본 프랑스의 드넓은 들녘에, 헝가리 들판에, 루마니아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해바라기밭하고는 그 규모에서 비교가 되진 않지만, 분명 다른 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꿈이라는 점이다. 농작물로 거두기 위해 농사를 지은 해바라기밭과 달리 여기저기 보기에 좋도록 가꾸고 돌본 사람의 손길이 가미된 그 차이는 분명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은 둘러보기에 좋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해 백일홍 꽃밭과 코스모스 꽃이 조화를 이루고, 지루하지 않도록 작품성을 곁들인 조형물과 오솔길 등이 발걸음을 한층 즐겁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렇게 수고로 단장한 해바라기밭을 마치 예술품 관람하듯 보고 나니 이렇게 외진 산골 지역을 잡목이 우거지고 인적이 끊어진 황량한 산지로 두느니 개발을 일궈낸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 무언가를 마음에 남긴다는 일은 소중한 것이다. 우연인 듯 아닌 듯 스쳐 지나는 수많은 일상의 반복 가운데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기억에 둘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열에 아홉은 그저 스쳐 가는 그 순간이 지나면 잊고 만다. 굳이 그 이유를 되새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지 않는가?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어떤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수고와 열심을 쏟아낸 어떤 사람들이 참 귀하고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냥 지나는 생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간편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술이라고 하기엔 그 동기와 목적이 너무 순수하다. 태백산의 험준한 산지에서 무엇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산골 마을 주민들을 위해 조성한 사업이고, 그 수입을 나누어 지역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 그들은 또한 농사짓는 마음으로 한뼘 한뼘 해바라기밭을 일구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이려니 오히려 감사의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둘러보기까지의 장시간 운전도, 더운 날씨도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 모름지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만큼 이 찰나의 순간을 마음 깊이 간직했으리라 싶다.
더욱더 가꿈과 돌봄 절실
우리의 신앙이 마찬가지이다. 기쁨이 절로 나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않는가. 그래서 더욱더 가꿈과 돌봄이 절실해진다. 예전에 우리가 몹시 가난했을 당시엔 사실 가꾸고 돌본다는 말은 사치로 여겨졌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없을 만큼 각박한 삶을 살았다. 그때는 대충이라는 말이 통용됐다. 또 빨리 빨리도 유행했다. 마치 들불이 번져가듯 나라 전체가 빨리 빨리라는 말로 도배가 됐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전화번호를 8282 숫자로 하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그러던 지금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니 어쩌면 지나치게 빨리 지나온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든다. 세상의 변화는 그렇다 쳐도 우리 신앙의 모습까지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진다.
고국으로 귀국한 이후 나름 이름난 교회와 관련 기관들을 방문할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그럴 때마다 좀 아쉽게 느껴오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한창때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진 무기력한 모습 아니 어떤 기운이랄까,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노년기의 적막함까지 보인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부흥의 시기를 지나버린 노쇠한 모습들, 20년 전 그 전후로 성장기가 멈춰선 듯한 교회 구석구석 건물과 시설에서 풍기는 낡은 냄새이다. 이게 나쁘거나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고도 방치해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러 보이지 않는 사정들이 나름 존재한 까닭이다. 건물이 크던 지 작던 지의 문제가 아니다. 타철진열(打鐵趁熱)이라는 말처럼 신앙의 부흥기에 내면에 치중하지 못하고 외양에 성급했던 그 후유증을 그대로 앓고 있는 모습들로 와닿아 마음이 저렸다.
지금 늦었을까?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낙후되고 버려진 탄광지역에서 해바라기밭으로 말미암는 생기가 되살아나듯이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되찾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나의 교회 됨을 가꾸고 돌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