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 당신의 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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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이창배 목사] “카르페 디엠(CARPE DIEM)” 당신의 꿈을 위하여 »
당신이 할 수 있거나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나의 모자람, 그것이 늘 나를 긴장하게 했고, 나를 도전하는 원천이었다. 실상 인간적으로도 아직 모자람이 많다. 지식적으로도, 배움으로도 그렇고, 인성으로나, 덕성으로도 그렇고 이 모자람 때문에 숱한 날, 고민하고, 허탈해 하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 됨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부끄러움을 떠올렸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여기까지 왔던 길이고 보니 오늘의 내가 있음은 늘 모자람이 원동력이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가 있다. 괴테의 글을 인용하면, “당신은 진지한가? 바로 이 순간을 붙잡아라. 당신이 할 수 있거나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도전하는 용기의 속성은 천재적이고 강력하며 마법적인 능력이다.” 라는 의미다. ‘이 순간을 붙잡아라’는 의미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Seize the day)이라는 구문의 원전은 호라티우스 의 ‘송시(ODES·頌詩)’에서 비롯되었는데, 호라티우스는 고대 로마에서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는 정치적으로 카이사르 암살사건 후 부르투스 진영에 가담해 신분적 상승을 꾀하였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사람이다. 그 후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는 하급 관리로 봉직하며 시를 쓰며 살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바로 그의 시집 ‘송시’의 1권 열한 번째 작품에서 이 유명한 문구가 탄생됐다. 미래를 유난히 걱정하는 어떤 여인을 꾸짖는 내용에서이다. 시인은 이 여인에게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일깨운 뒤 이렇게 끝맺는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영어로 옮기면 ‘Seize the day and trust tomorrow as little as possible.’ 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며,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오늘을 붙잡으라’ 대략은 이런 말이다.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그 의미적으로 동일하다. 성경도 그렇게 말한다. 다만 오늘을 붙잡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을 길게 하고, 주어진 시간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라고 한다. 곧 인생의 행복을 꿈꾸는 자가 의당 해야할 교훈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에서 괴짜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역)이 부임해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게 된다. 단연 시인인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바라보는 눈은 학교 당국과는 다르다. 전통 명문학교로 학생들은 모두가 잘 길들여진 부유층 집안의 자제들이다. 그들을 정신적으로 무기력하고 꿈과 야망을 잃어버린 가여운 영혼들로 그려진다. 이 무미 건조하고 삭막할 정도로 도전정신이 없는 젊은이들, 진지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선 고민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 가고 있는 학생들에게 키팅 선생은 ‘도전정신’의 중요성을 일깨며 이렇게 설파했다. “도전을 겁내는 대부분의 사람은 꿈을 억누른 채 살아가지, 그러나 너의 인생을 위해서라면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니?”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도전정신을 다시금 리바이벌한 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꿈꾸는 걸 실현하려면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야(Seize the day)한다.”라는 명대사가 탄생됐다.
키팅 선생은 소년들을 데리고 학교의 로비로 내려가 트로피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개교 초기 졸업생들 사진 앞에서 “이 사진들을 봐라.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젊은이들은 한때 너희들과 똑같은 불길을 눈동자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 그들은 폭풍과 같은 힘으로 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인생을 멋진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졌지 그것이 70년 전의 일이란다. 이제 그들은 모두 죽었을테고 무덤에는 데이지 꽃만 자라고 있겠지? 그들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진정으로 실현했을까?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웠던 꿈을 성취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똑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왔을까? 자신이 하고픈 삶, 꿈꾸며 도전했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왔다면 축하할 일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된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에 잡힌 쟁기를 놓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라면 승리자라 할 것이다. 그 후회 없을 가치를 끝까지 잡았던가? 이 물음이 핵심이다.
어느덧 시간의 흐름은 빨라, 한해의 끝을 목전에 둔 10월이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 보아도 그렇다. 언제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빠른 시간 앞에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시간의 소중함을 이제 인생의 후반부에 와서야 더욱 깨닫게 된다.
주님의 종 되고, 독일 선교사 생활을 거쳐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넉넉한 물질을 손에 쥐어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부족했고, 답이 없었고, 기댈 곳이 없었다. 언뜻 돕는 인적 자원이 부족했다는 문제로도 여길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라 할 수 없다. 선교사의 삶이란 늘 익숙치 못한 현장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 대처를 위해 힘에 부칠 정도의 에너지 소모가 따를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결국은 돌아보면 모자람이 그 답이다.
나의 모자람, 그것이 늘 나를 긴장하게 했고, 나를 도전하는 원천이었다. 실상 인간적으로도 아직 모자람이 많다. 지식적으로도, 배움으로도 그렇고, 인성으로나, 덕성으로도 그렇고 이 모자람 때문에 숱한 날, 고민하고, 허탈해 하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 됨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부끄러움을 떠올렸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여기까지 왔던 길이고 보니 오늘의 내가 있음은 늘 모자람이 원동력이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기도하기는, 나의 이 모자람을 부족하다고 멀리하시지 않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대신 주님의 능력으로 채워주심을 간구한다. 그래서 내겐 언제나, 이 간절함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다. 나를 부르시고 택하여 쓰시는 분의 눈길 앞에 머무르고자 지금을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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