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움직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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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모두를 움직이는 힘 » 마이클 하얏트(Michael Hyatt) 지음ㆍ한미선 옮김/ 출판사: ROK MEDIA »
경험은, 심지어 나쁜 경험까지도 단지 정보에 불과…
경험은, 심지어 나쁜 경험까지도 단지 정보에 불과하다.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은 그 정보를 이용해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의 단순한 자유로운 진실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당신의 과거가 무엇이었든,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 것인가? – [책 내용 중에서]

비전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미래로부터 온 그림인데, 책에서 제 눈을 사로잡았던 건 비전에 대한 저자의 해석보다 비전을 이해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책의 원제인 “THE VISION-DRIVEN LEDEAR”가 말해주듯이 훌륭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고 싶거나, 리더인 사람을 더 의욕적으로 만드는 힘은 ‘마음이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좋은 해석’이 필수 요소로 개입합니다. 내게 일어난 일을 어떤 비전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그가 앞으로 어떤 리더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늠자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비전을 제시하고 공유하는 리더와 자기의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투입해 강요하는 관리자를 혼동합니다. 리더가 제시한 ‘비전’은 여러 사람이 그걸 공유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듭니다. 그래서 비전은 항상 따듯한 열기를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나 관리자가 강요한 ‘목표’는 비전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모임의 구성원들을 옥죄는 차가운 현실이 됩니다. 그 모임의 성격이 무엇이든지 주변을 옥죄어 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은 관리자 앞에서 서로 자기의 효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혈전을 벌여야 합니다.
리더가 비전을 보여주면 싸워야 할 대상이 주로 외부로 집중되지만, 관리자가 목표치를 말하면 싸워야 할 대상이 내부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리더가 보여준 비전을 품고 구성원들과 연합해서 비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관리자가 강요한 목표치를 달성했다는 보고서를 서로 먼저 제출하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내분이 자주 발생합니다.
영어에서 ‘Vision’과 ‘Visionary’는 뜻이 다릅니다. ‘Vision’ 뒤에 ‘-ary’가 붙으면 ‘환상에 빠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리더가 제시하는 게 ‘Vision’이고 관리자가 강요하는 게 ‘Visionary’라고 봅니다. 리더가 보여준 비전은 리더뿐만 아니라 리더가 속한 모임의 구성원들에게도 영감을 주지만, 관리자가 강요하는 ‘Visionary’는 관리자 혼자서 본 환상에 근거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 뿐 비전까지는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비전도 늘 저항에 부딪힙니다. 비전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과 비슷하기에, ‘그게 과연 가능할까’라고 묻는 다른 사람들의 소박한 질문이 비전을 향해 수시로 화살을 쏘아댑니다. 그래서 비전이 이뤄지려면 반드시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게 쉬운 일이라면 사람들이 굳이 리더에게 ‘비전이 뭐냐’라고 묻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리자는 자기가 제시한 목표를 믿고 따르라고 강요하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리더는 관리자처럼 다른 사람에게 목표를 강요하지 않고, 구성원들이 비전을 공유해서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모임이 되도록 수시로 이런 질문에 비전을 근거로 답을 해줍니다.
비전도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 새로운 비전이 필요할 경우 비전을 전환해서 상승기를 계속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새로운 비전도 제시해야 합니다. 과거의 비전이 그때는 옳았지만, 이제는 한계가 있다고 판명이 났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비전이 줬던 달콤함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성숙기에서 ‘비전 전환(Vision Zag)’을 이뤄내지 못하면, 이후 비전도 쇠퇴기를 거쳐 좀비기ㆍ사망기로 전이가 일어납니다.
비전의 ‘성숙기ㆍ좀비기ㆍ사망기’ 등은 저자가 책에 쓴 표현인데, 비전에 ‘좀비기’가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비전이 성숙기에서 곧바로 사망기로 가는 게 아니라, 좀비기를 거치면서 채무를 갚을 수 없는 노후화된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꼭 있다고 합니다. 이건 일종의 ‘콩코드 오류(Concorde fallacy)’인데, 앞날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없이, 과거의 비전이 줬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좀비기입니다. 좀비기가 길수록 성숙기에 쌓아뒀던 온갖 명성을 야금야금 갉아먹습니다. 따라서 비전의 효용이 다했다고 판단되면, 비전을 전환하는 게 필요합니다. 효용성이 사라진 좀비기는 거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실패는 삶에서 일어나는 정상적인 성숙의 과정입니다. 어떤 비전이 단 한 번의 활동으로 영원한 가치를 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기업이나 종교 단체 중에 파산 직전까지 가는 비전의 사망기를 거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효용성이 떨어진 비전은 과감하게 무덤으로 보내야 합니다. 때로는 실패나 사망기로 인해 집중을 방해하는 모든 요인이 제거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지닌 소중한 자산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기에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뉴 비전(New Vision)’을 출범시켜야 합니다.
비전에는 리더와 조직을 위한 것뿐 아니라, 나와 소비자를 위한 게 포함돼 있어야 합니다. 비전으로 리더와 조직의 배만 불리고, 비전으로 만든 제품을 판매하거나 소비하는 사람들은 혜택을 하나도 받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건 비전이 아니라 관리자가 제시한 ‘Visionary’기에 비전 전환을 통해 빨리 폐기하고 무덤으로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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