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적인 사람들의 도시 뵈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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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저널=김수길 선교사] 신사적인 사람들의 도시 뵈레아 » 그리스 이야기(10) »
‘뵈레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는’ 이 말을 지금도 지키려 노력…
데살로니키에서 새롭게 만든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를 타고 69킬로 달려가면 올림퍼스 산까지 이어지는 페르미온 산맥에 위치한 뵈레아를 만날 수 있다. 봄에 사역을 갈 때마다, 이 길은 내게 행복을 선사했다. 산 중턱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뵈레아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넓은 벌판에는 복숭아와 자두 그리고 사과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신사적인 사람들의 도시 뵈레아(Vεροια)

차로 두 시간 이상 달려가도 계속해서 펼쳐지는 꽃들의 향연은 말로 표현 못 할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내 기억 속의 뵈래아는 봄의 복사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도시라고 표현하고 싶다. 오늘의 뵈레아로 가는 길은 이렇게 아름답다. 그러나 옛날 유대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야밤에 도주의 길을 걸어간 바울의 마음은 내가 느끼는 낭만과 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행전 17:5) 쉽게 이야기해서 바울과 실라가 짧은 시간 테살로니키에 머물면서 전도했을 때 유대인 뿐 아니라 그리스의 귀부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했다.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장터의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소요사태를 만들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로는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인들의 도시가 아니기에 총독(αντιβασιλέας)이나 총독보(κυβερνήτης)가 다스리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의 군대도 많지 않았다. 식민도시의 특징인 다수의 읍장(δημάρχους)들의 집단체제를 아래서는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끝없는 이민족의 침략을 견디어 온 도시
그리스 신화에서 시작된 베뢰아라는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장군 페로나(Περόνα)의 이름을 이어받은 그의 딸 베리타(Verita)여왕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9세기 경 이웃 쓰라끼(θρακι) 지역에서 이주 해온 사람들이 거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도시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알렉산더의 아버지 빌립2 세는 당시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Πέλλα)가 아닌 이 지역 베르기나(Vεργίνα)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히 가까운 뵈레아는 부흥의 기간을 맞는다.
알렉산더家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왕조를 이은 안티고니스(Αντιγόνης) 시대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이후 기원전 168년 전쟁사에 유명한 로마와 마케도니아 왕조의 피드나 전투(μάχη pidna)이후 로마에 항복한 최초의 도시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한동안 부흥하던 이 도시는 슬라브족의 계속된 침입과 904년 동로마 제국과 대립관계에 있던 제 불가리아 1 제국의 시메온 1세(Συμεών Ι)에게 한동안 점령되기도 했다. 그러다 1454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보다 빠른 1434년에 이 도시는 오스만 터키 제국에 완전 점령당해 1912년 해방되기 전 까지 외세에 시달려온 도시다.
미소를 잃지 않은 신사적인 사람들

그 옛날 에그나티아 도로가 끝나는 조금 높은 곳에 바울의 설교 강단(Bήma)이 있다. 비마 옆에는 작은 초등학교와 이슬람 사원이 서있다. 이곳을 찾는 순례 객들을 잠시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왜 바울의 강단 옆에 교회도 아닌 이슬람 모스크가 서있어야 하는지…
원래 이 마드라사(madrassah) 모스크는 교회였다. 15세기에 터키인들이 교회를 모스크로 사용했다. 19세기 중반 다시 리모델링하여 오늘 몇 되지 않는 이슬람 사원으로 바울 성지 옆에서 아직도 이슬람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오늘의 마드라사 모스크가 보여주는 상징성은 이 도시는 예로부터 이방인들의 많은 침략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곳사람들은 성경속의 ‘뵈레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는’ 이 말을 지금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성경에서 말하는 신사적인 사람들은 이곳에 살던 유대인들을 말하는데,,) 그럼에도 외부에서 관광객들이 용무가 급해서 아무가계에 들어가 화장실을 사용하려하면 대부분 허락하고 작은 미소로 답해준다.
뵈레아는 현재 거주하던 사람들이 떠난 유대인거주 지역(γκέττο)과 그리고 이슬람에게 혹독하게 핍박을 받았던 기독교인 지역 그리고 번화가 중심도로를 건너 거주했던 터키인들의 지역으로 나눠졌다. 이제는 허물어져가던 건물들을 구입하여 보수해서 사용하기에 거주민의 구분은 없어졌다.

사도 바울과 관련된 유대인 거주 지역에는 기원전 50년경에 세웠다는 유대인회당(συναγωγή)이 있다. 이 회당은 오스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메흐메드 6세(Mehmed VI)가 많은 돈을 헌금하여 오늘의 회당을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바울시대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1492년 나스르 왕조의 멸망시키며 영토회복(Reconquista)을 이룬 이사벨 여왕은 회교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시킨다. 이 때 추방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테살로니키와 이곳 유대인 거주 지역에 몰려왔다.
2차 대전 시 히틀러와 나치는 이곳의 대부분 유대인들을 폴란드의 수용소로 보내 살해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영구 귀국하여 두 가정만 남았다고 했다. 부모님은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혼자 남은 코엔양은 미혼으로 이곳 유대인 회당의 전체를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이다.
이곳 회당은 가장 오래된 회당이기에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순례를 온다. 이 업무를 코엔이 맡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아닌 한국인이 순례를 하려면 이분과 연결이 되어야 가능하다. 회당 안에는 별다른 장식도 가구도 없다. 예루살렘을 향한 강단이 있고 사방 벽에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성구들이 붙어져있다. 특별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모임장소와 통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애잔한 역사를 이해하면 가슴 한쪽에서 잔인한 인간의 심성들이 생각나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람을 외모와 그들의 편협한 생각으로 대하지 않고 먼저 진위를 생각했던 신사적인 뵈레아의 사람들. 이 정신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주민들의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는 동안, 이 도시는 영원히 신사적인 사람들의 도시 인 것이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전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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