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과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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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한평우 목사] 단테의 신곡과 베아트리체 »
정치가에게 절제라는 단어처럼 아름다운 단어는 드물 것
단테가 14세기에 신곡을 민간들이 사용하는 라틴어 사투리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또한 그는 믿음보다는 사랑을 앞세웠다. 천국을 가려면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그런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어렸을 때 잠깐 스쳐지나갔고,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고, 이미 20대에 세상을 떠난 베아트리체를 지옥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인도자로 삼았다.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원천으로 이해하려고 하였고, 이성에 의해서만 참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근래에 들어와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수능에서 논술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된 시기는 르네상스로 인한 인간 본질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스콜라철학의 견고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밖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유럽이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다.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유럽의 국가들이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동을 쳐들어간 십자군들이 가져온 것이 아리스토델레스에 관한 책이었다.
사실, 그에 대한 사상은 이미 3세기 칼리에누스 황제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고, 로마로 이주한 철학자 플로티누스(204-270)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어거스틴이 영향을 받아 성육신의 해석 방법론으로 응용한바 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런 사상은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로 덮임으로 잊힌 도시가 되었다가 16세기에 한 농부에 의해 발견 되었던 것과 방불하였다.
13세기 가톨릭의 수도사이자 스콜라철학의 거성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발 빠르게 신학의 방법론으로 플로티누스의 철학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으로 이용했다. 이런 흐름은 노도와 같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모든 분야에 새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교회의 해석에 숨죽이며 쫓아가야 했던 세상은 너도나도 새로운 철학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도전 정신은 원어 탐구에 심취하였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열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사상의 흐름이 문학, 예술, 신학 모든 분야에 팽배하게 되었다.
단테의 신곡 등장
그런 중에 나온 책이 단테의 신곡이었다.
신곡은 단테가 아홉 살 때, 우연히 만난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그녀를 만났다는 설에 대해 두 가지가 있다.
피렌체의 아르노 강을 건너가도록 만들어진 오래된 베키오 다리를 건너가던 중에 마주오던 베아트리체를 만났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메디치 궁의 광장을 끼고 있는 골목에 있는 작은 성당(20여명도 채 들어갈 수 없는)에서 미사를 드리는 중에 만나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그 어린 나이에 잠깐 스쳐가듯 만났던 어린아이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시인이 자신의 책 신곡을 저술할 때,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자신을 인도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이리저리 떠도는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중에 신곡을 저술하였다. 그랬으니 이 책에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 안타까운 마음들이 작중의 인물들에게 투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랬기에 지옥편 인물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는 가톨릭의 지도자들을 그곳에서 고통당하는 자들로 묘사했다.
아마도 자신을 사면하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 가톨릭의 당국자들에 대한 미움의 대상들을 지옥에 보냈고, 거기서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싶다.
인문주의의 특징 발견
신곡을 통해 인문주의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는 정통 라틴어로 기록하지 않고 사투리인 이태리 방언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라틴어를 당시 유럽문화의 수도 불란서에서는 18세기까지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라틴어를 모르면 그는 지성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바티칸에서는 현재도 공식 전례 문으로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물며 단테가 14세기에 신곡을 민간들이 사용하는 라틴어 사투리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또한 그는 믿음보다는 사랑을 앞세웠다.
천국을 가려면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그런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어렸을 때 잠깐 스쳐지나갔고,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고, 이미 20대에 세상을 떠난 베아트리체를 지옥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인도자로 삼았다.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원천으로 이해하려고 하였고, 이성에 의해서만 참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식의 사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현대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결과는 허무주의, 또는 하나님 없는 실존철학의 기반을 이루게 했다.
이런 인문학의 잘못된 호기심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렸다.
글 한평우 목사/ 본지 목양저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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