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여년의 근대문명사 리뷰
[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여년의 근대문명사 리뷰 » 1부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음은 지난 날 미국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
금년 4월28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수교 140년을 기념하는 미의회 국회의사당에서 ‘자유의 동맹, 행동하는 동맹’(Alliance of Freedom, Alliance in Action)이라는 주제로 미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이들로부터 20여 차례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 연설문 중에서 1882년 미국과 수교가 된 이후 미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각 분야의 문명화와 특히 교육과 의료와 언론, 독립과 건국에 큰 기여했음을 설파하였다. 윤대통령의 이 연설은 미국을 움직이는 200여 명의 정치인들에게 큰 감동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1882년 수교에서 시작된 140년의 한미 양국의 교류와 협력, 그리고 동맹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를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에게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우리 국민의 독립과 건국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세기 말 한국에 온 호러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메리스크렌튼, 로제타 홀 등 미국의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여성 교육에 힘썼고, 그 결과 한국 여성들이 교육, 언론,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 활동에 진출하는 기반들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처럼 조선 말기에 입경한 선교사들은 복음화(Evangelization)와 함께 근대문명화(Civilization)를 동시에 구축해 나갔다. 저들의 눈에 비친 조선이라는 나라는 근대문명화를 이미 성취한 자신들의 나라에 비해 한없이 뒤쳐진 미개한 비문명국이었다. 이 당시 조선의 문맹률은 약 90% 이상이였고 엄혹한 신분제로 철저히 차별받는 계층이 절대다수였다. 특히 조선의 여인네들은 이름조차 없었다. 조선인들의 삶은 토속 미신에 빠져있었고 관원들의 잔혹한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착취와 구조적인 부패가 만연된 사회였다. 그들의 생활 환경은 비위생적으로 선교사들에게는 시급히 그 사회를 개혁, 계몽, 개화시켜 나가야 할 시대적,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핵심 목적 사역은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여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었지만 함께 수행해야 할 조선의 선제적 사역이 바로 근대문명화였다.
그들은 단지 외형적 근대문명만을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박애주의라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그들의 사역과 삶을 통해 친히 보여줌으로 조선인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 조선의 고귀한 정신적 유산으로 축적되었고 승화되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지난 날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 선조들에게 전해준 그 근대문명의 유산을 기반으로 오늘의 첨단 선진국으로 발전되었다. 이제는 지구상에 궁핍한 나라들을 지원하는 공여국(Donor country)이 되어 인류 공영에 공헌하는 나라와 민족이 되었다. 이과같이 축복받은 나라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미국을 통해 전해 받은 근대문명으로 각 분야의 모범국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이같은 성장과 결실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객관화된 역사를 통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교과서이며 현재의 역사는 거울이 되고 미래 역사는 내일을 바라보는 창이다.
1. 한미 수교 역사의 시원(始原) : 1866년 제너럴 셔만호 사건
모든 역사의 최종적 결과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으며 그에 대한 여건 조성을 통해 현실화 되면서 그 결말을 보여준다. 한.미 수교가 최초로 발단된 그 배경에는 1866년 미국 국적의 상선인 제너럴 셔만호가 평양에서 화공당하여 전소되어 침몰되었다. 그 배의 선주인 미국인이 살해되었기에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미 정부로서는 그 사건을 그냥 방기(放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제너럴 셔만호는 미지의 조선이 엄격한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중에도 조선을 택했으며 그것도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아닌 이북 지방의 중심지인 평양으로 진입했는지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도 무모한 진입과 일방적 통상 요구였다. 더욱이 이 셔만호는 중국에서 출항 전에 이러한 정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배의 승선원들은 미국인 선주 프레스톤, 선장 페이지, 항해사 윌슨 세 명과 영국인 화물주인 호가스와 그의 소개로 합류한 같은 국적의 토마스 선교사 2명과 그 외의 일반 선원인 아시아인 19명으로 모두 24명이었다.
이 제너럴 셔만호는 원래 미국 남북전쟁(1861~1864) 중에 전투를 한 증기 기관의 군함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반 상선으로 개조되었으며 항행의 보호를 위해 대포 2 문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 배를 용선한 무역회사는 영국의 메도즈상사(Meadows & company)로서 중국의 천진항에서 기항하고 있었다. 이 배에는 망원경과 유리 제품과 비단과 자명종 시계를 교역품으로 선적하였고 이 배의 통역원이자 안내자는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Thomas.R.J)였다. 그가 그 배에 승선한 이유는 일 년 전에 백령도에서 건너온 천주교 신자인 김자평을 산동성 연대에서 만나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건을 듣고 조선의 선교에 대한 계획을 갖게 되었다. 1885년에 그는 김자평과 함께 백령도에 와서 6개월 동안 선교 활동을 하면서 황해도 연안 지역에 접근하여 전도 활동을 한 바있었으며 이 때에 조선어를 조금 익혔었다.
그는 백령도에서 연대로 다시 돌아와 조선에 대한 선교의 비젼을 품고 있던 차에 셔만호가 연대항으로 들어와 조선어 통역인을 구할 때에 토마스는 자원하여 그 배를 실제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었다. 토마스는 그 배에 승선하기 전에 6백여 권의 중국어 성경을 실었다. 그 배가 1866년 8월21일 평양에 도착하자 토마스는 구경나온 평양 주민들에게 그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다. 그 배는 10여일 동안 만경대에서 정박하면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평양 도성인들은 이 배가 병인박해시에 프랑스 천주교 신부 9명을 살해한 것에 대해 보복하러 온 프랑스 군함인 줄 알고 있었다. 그 때에 놀랍게도 지달해라는 천주교인은 아들들과 천주교인 8명을 대동하고 참외 100개를 준비해서 토마스에게 사례를 하였고 그와 필담으로 대화를 하였다. 이들은 토마스 선교사가 천주교 신부인줄 알았던 것이다. 이 셔만호가 격침된 후 지달해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배를 당하였다. 지달해는 평양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제너랄 셔만호는 9월 2일에 평양 감사인 박규수의 지휘에 의해 화공전법으로 전소되어 침몰당하였고 토마스 선교사는 그 직전까지 성경을 배에서 던져주고 마지막으로 배에서 뛰어 내려왔으나 박춘권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박춘권에게 예수를 믿으라며 성경 한권을 건내주었다. 이로서 그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후에 어느 교회 역사가는 그의 순교에 대해 이같이 평가하였다.
“토마스의 순교의 피가 흘려진 대동강물은 평양인들에게 생명수가 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교회사에서 입증되었다. 그의 순교가 있은지 40년만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샤무엘 마펫)의 대부흥운동으로 나타났고 그로인해 조선 전국에 놀라운 성령의 운동과 부흥이 일어났다. 1932년에는 평양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순교당한 그 자리에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 예배당을 T자형으로 건축하여 헌당 예배를 드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제너럴 셔만호의 비극은 조선의 기독교화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였음을 알게 된다.
이 셔만호 사건은 한국 근대 역사에 두 가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먼저는 외교사적으로 볼 때에 한국과 미국과 국교 관계(조미수호통상조약)를 갖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으며, 두 번째로는 한국교회사 측면에서 토마스의 순교가 한국 교회 역사에 최초의 밀알이 되었다는 것이다.
2. 셔만호 사건으로 이어진 신미양요(1871)
미국 정부는 자국의 셔만호가 조선에 들어갔다가 격침당하고 자국인 3명 모두가 사망한 것에 대해 북경주재 미공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미정부는 1867년 1월에 슈펠트(Shufeldt.R.W)에게 이에 대해 현지 탐문하여 조선으로부터 이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받도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선의 완강한 거부로 결과가 없자, 다시 1868년 4월 페비거(Febiger.J.C)의 2차 탐문으로 강경한 대응 정책을 사용하도록 선회하였다. 결국 1871년 베비거의 강경한 함포정책으로 조선 원정을 단행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되었다. 이때에 미국이 조선의 무대응과 쇄국정책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응징하였는지를 그 당시 군사력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미해군은 로저스 제독하에 군함 5척과 해군 및 해병대 1,200명과 함포 85문으로 강화도에서 조선군을 응징하였다. 이에 조선군의 반격 규모는 지상 병력 600여 명과 화승총과 대포로 대응했지만 화기의 성능이 뒤졌기에 상대가 되질 않았고 그 전투에 희생된 조선 군인은 240여 명의 전사와 익사자 100여명과 포로 20명이었고, 미군의 희생자는 전사 4명 부상 12명이었다. 조선군은 결사 항전과 포로되는 것을 거부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자가 많아졌다. 포로된 이들은 미군이 제공하는 음식까지도 거부하였다. 미군은 조선 정부의 항복 의사의 없음과 전염병이 돌게 되자 후퇴를 결정하였다. 이 강화도의 조.미간의 전투는 조선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군대와 대결한 것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최초의 원정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의 이같은 군사적 항전은 일본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1854년 미국이 일본 에도 막부 정권에 함포 외교로 겁박하자, 미군의 우월한 군사력을 직접 확인하고 군사적 항전없이 가나가와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개항함으로 새로운 문명시대로 진입하여 유신정책으로 아시아 최초의 근대문명국으로 거듭났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신미양요의 결과는 오히려 조선왕국을 더욱 불행하게 하는 사건으로 치닫게 되었다. 강화도 전투에서 미군이 후퇴하자 이를 승리로 자위하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더욱 쇄국정책을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이런 완고하고 불통스런 정책에 반대를 하는 개화 세력들을 제압하는 기회로 삼아 전국의 유생들의 근거지인 수많은 서원들을 철폐하였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악수는 자신의 권력 몰락을 가져왔다. 2년후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마침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개화파가 득세하였다.
조선은 대원군의 치세하에서 미국과 두 번의 전투를 벌였다. 1866년 첫 번째로 미국 민간인 상선 셔만호와 대동강에서 격전을 치루었고, 1871년 두 번째의 강화도 전투는 국가 간의 무력 충돌이였다. 그 전투의 결과 외형상으로는 승리라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전조가 되었다.
한편 일본은 개항한 후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산업과 군사력을 발전시켜 동아시아에서 군사 대국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하였다. 개항후 불과 20연 년 만에 최신예의 군함인 운양호를 1875년에 강화도로 진입시켜 무력 충돌을 야기시켜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였고 결국 1876년 조선은 굴복하여 인천항과 부산항을 개항하고 불평등 강화조약을 맺음으로 사실상 쇄국정책은 종식되었다.
이 강화조약은 일본의 성공적인 서구화 정책을 통해 국력을 배양하여 동북아 극동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조선 반도를 일본의 영향력 하에 두고 청나라의 지배력을 악화하려는 지정학적 정책이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점차 조선을 향한 지배력을 독점하기 위해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조선 지배력을 단절시켰고 10년 후인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동해 진출 차단과 조선반도의 부동항 확보에 제동을 걸었다.
3. 조선과 미국의 국교 관계 구축
1871년 신미양요 이후 1878년은 한미외교의 근대적인 서막이라 할 수 있다. 그 해 미국 상원의원 서젠트(A. Sergent)가 제너럴 셔만호 사건의 잘못이 미국 측에 있으며 그런 인식에서 조미간의 통상조약 체결을 서두를 것을 대통령 헤이스(A.A.Hayes)에게 요청하였다. 헤이스는 셔만호의 행방을 찾아 그 해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슈펠트(R.W.Schfeldt)에게 수호조약 체결의 실현을 일임하였다.
1880년 5월 일본에 온 슈펠트는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통하여 조선 조정에 접근하려 하였으나, 일본이 미국의 조선 접근을 꺼려 조선의 조정 알선에 불응하자 이에 직접 부산에 와서 서류상으로 전달코자 하였으나,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결국 미국은 일본을 통한 중재 교섭을 포기하였다. 슈펠트가 눈을 돌린 것은 청나라의 북양대신이자 실세인 이홍장(李鴻章)이었다.
미국이 이처럼 조선과의 수교와 통상을 맺으려하는 데에는 미국의 새로운 해외 팽창 정책으로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 비약적인 산업 발달로 해외 시장 개척이 필요로 하였으며 이 당시에 서유럽의 나라들은 이미 해외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도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해외 전략이 필요하였다. 일본과 중국과는 이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어 경제 교류와 인적 교류를 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유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유학생들을 보내어 서구의 근대 학문과 기술과 그 나라의 법률과 사회제도 등을 배우게 하여 근대 문명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으로 일본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나 조선만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 극동의 3국은 미국의 통상 확장을 마무리 지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이 조선과의 통상,외교 관계를 맺게 되면 자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기에 미국의 수교 중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미국은 청나라의 이홍장을 이용하여 조선과의 외교.통상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였다. 청의 이홍장으로서는 그동안 일본이 조선과의 강화조약(1876)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해 가자 상대적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되어 가고 있었기에 이를 우려하는 처지에 있었다.
미국이 먼저 청에게 조선관의 외교 통상를 중계해 줄 것을 요청하자 반색을 하였다. 중국인들이 흔히 쓰는 외교정책으로 오랑캐는 오랑캐로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으로 미국을 통해 일본의 견제와 또 극동 지역을 통해 남하하려는 러시아와의 영향력도 주시하고 있는 터에 미국을 조선에 개입시키는 것 또한 견제의 역할이 가능한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기에 그의 의중에 따라 좌지우지되어 왔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원스카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총독처럼 행사하게 하였다.
이홍장과 슈펠트와의 교섭은 1880년 8월 25일부터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측의 조선에 대한 외교 원칙은 청과는 달랐다. 청의 리홍장은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묶어두려는 속방(屬邦) 원칙을 고수하려 하였다. 즉 이홍장은 슈펠트의 조선의 독립적 전제를 계속 반대하면서 속방제를 분명히 하여 조선의 속방권을 존속하려 하였다. 이에 슈펠트는 이는 국가간의 자주적 관계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조건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결국 미국 측의 요구가 반영되었다. 이는 조선이 세계 속의 자주국으로 나서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주자는 데에 있었다.
이어서 또 다른 수교문 작성에 쟁점은 교회 문제였다. 그 항목에 종교에 관련된 불입교당(不入敎堂) 으로 조선에는 교회당을 건립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었다. 이를 김윤식이 나서서 강변하였으나 이홍장이 나서서 그런 전례는 타국에도 없는 것이고 이는 조약 자체를 막는 처사라며 반대하여 이를 조선 측에서 수용하였다. 만일 조미수호통상 조약문에 이 조항이 기재되어 있었으면 선교사들의 활동은 원천적으로 불가하였다. 조선 측에서 불입교당을 강조한 것은 중국의 경우 선교사들이 들어와 중국의 고유 문화와 전통적 도덕 정신이 변질되는 것과 조상숭배와 자유와 평등 등의 사회적 윤리 등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기에 이같이 기독교의 진출을 막으려했던 것이었다. 또 대원군 시기에 천주교 박해로 인한 격변 등을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서양의 종교를 법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이 조약문이 체결되기 전 1882년 5월 17일에 김홍집과 이 조약문을 작성한 청의 마건충과 만났을 때에 마건충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어 조선측을 설득하였다. 조선과 미국과의 수호통장조약문을 처음에 작성할 때에 조선의 실무자는 배제된 상태에서 미국 측의 슈펠트와 청의 마건충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1년 10개월 만에 최종적으로 이홍장과 슈펠트가 승인하고 조선 측에 마지막으로 통보되었다. 그 배경에는 조선은 청의 속방이었기 때문이었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에서 미국의 슈펠트와 조선 측에서 신헌과 김홍집과 전 14조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의 국명은 <大朝鮮國>이었다. 미국 명은 <대아메리카합중국>이었다. 체결 장소는 제물포 앞바다에 떠있는 미국 군함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해 21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이에 앞서서 조선을 상징하는 국기가 있어야한 다는 점을 주지시켜 조선 측에서는 태극기를 급조하여 게양되었고, 예포 소리에 조선인들이 놀라워하자 이는 축포 예식이라며 안도시켰다. 선상의 태극기가 날리고 예포가 울려퍼질 때에 조선측 관리들은 감격해 하였다. 그 순간은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만방에 선포되어 탄생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수교가 있은 후 수개월 만에 영국,독일,프랑스, 이태리,덴마크, 러시아가 이어서 미국과 맺은 조약문과 같은 수호통상을 맺음으로 조선은 세계 속의 국가로 인정되었다.
이날 청나라에서 파견된 마건충은 그 조약식을 자신들이 타고 온 배에서 수행하자고 고집했으나 이를 슈펠트가 거부하였고, 다시 마건충은 조약식에 자신이 입회하여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이 또한 슈펠트가 거절하여 조선과 미국의 측근 인사들만이 참석하여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식>이 거행되었다. 슈펠트는 리홍장이 조선 속방 운운한 구절을 본 조약문에서 삭제한 커다란 공적을 남기고 이틀 후 제물포를 떠났다. 이로서 그동안 세계적으로는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은 비로소 서양과 수교한 나라가 되었다. 그가 남긴 공로는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시켜 줌으로 사실상 슈펠트는 조선 자주국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16년 전의 제너럴 셔만호 사건은 조선과 미국이 악연으로 시작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1882년 5월에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라는 우방 관계가 구축됨으로 서양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건국대학교 농대와 성균관대 무역대학원과 백석대 신대원을 마쳤으며,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서 사회 경력을 쌓았다. 청년기에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본 교회의 소단체인 ‘새하늘 선교회’에서 북방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고 1991년에 파송되어 중국 동북 삼성의 조선족교회를 순회 사역하기 시작하였으며 1992년 10월에 요령성 단동(丹東)을 방문한 일이 계기가 되어 북한선교를 시작하였다. 사역이 본격화되면서 미주 SAM의료선교회와 프랑스의 국경없는 의사회/MSF와 협력하여 북한 선교를 구체화하였으며 재정적으로는 미주의 JC REACH-OUT FOUNDATION의 후원을 받아 북한 전역에 양식과 의료품과 성경과 관련 자료를 지원하였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 지역을 순회하면서 탈북자들 제자 양육과 파송 사역을 하였다. 1998년부터는 북한의 지하교회 조직과 연계되어 극동방송과 북방선교부로부터 라디오를 지원받아 양강도와 자강도, 평안남북도 전역에 보급하였다. 2012년에 신변의 위협을 받아 귀국한 후에는 극동방송/FEBC와 자유북한방송/FNK의 대북 설교 방송과 통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부터 충주 양의문교회 담임 사역과 백석총회 북방선교부 총무와 새하늘 선교회 지도 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국내외 선교 컨퍼런스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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