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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되는 말
[새벽묵상] 기도가 되는 말 » 약 3:1-12 » 한은선 목사 » Ein Wort, das zum Gebet wird! 곧 좋은 말은 좋은 영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말보다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말의 문제는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요 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랑의…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영성칼럼] 참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 필자 Dr. Elijah Kim  »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다 할렐루야! 무사히 안전하게 국제선교대회와 32주년 예배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 한 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탈북민들이 성령충만함 받고 영적 재충전과 트라우마로부터 내적치료를 받게 하시고, 안전하게 귀국하시게 하신 주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 강석진 목사 » 이승만의 외로운 대미외교 활동과 시련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을사조약(1905.11)으로 대한이라는 나라의 외교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가 실행되기 4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묵인하였고 바로 이어서 주한미공사관을 폐쇄시켰다. 이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3

강석진 목사 ◙ Photo&Img©ucdigiN

[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3 »

조선과 미국과의 1882년 5월, 국교 관계가 시작된 그 즈음 …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가 성립된 배후에는 지금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매우 복잡한 이해 관계가 당사국 간에 얽혀있었다. 먼저 조선은 새로운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청과의 오랜 종속(사대) 관계를 미국과의 관계처럼 자주적 평등 관계로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첫째 청이 취해온 해금 조치를 풀고 조선과 통상할 것, 둘째 조선이 전통적으로 취해온 청국 사신 접대하는 제도를 폐지할 것과 셋째 전통적인 사신 파견 제도를 폐지하고 조선 사신이 베이징에 상주하는 공관 제도를 만들 것 등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청은 해금 조치 외에는 받아들이질 않았다. 이처럼 조선과 미국과의 외교 관계의 정립은 조선 왕실로 하여금 국제 관계는 국가간의 자주와 독립 국가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경각시켜 준 계기가 된 것이었다.

조선과 미국과의 1882년 5월에 국교 관계가 시작된 그 즈음인 7월 19일에 조선군의 군량미 미지급 사건으로 인한 임오군란이 야기되어 조선 왕실의 보존 자체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사관의 파괴와 일본군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이에 왕실은 청군에게 진압 요청을 하였고 이에 일본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 복잡한 국제 분쟁으로 급진전되어 청은 이 임오군란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제고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배가시키고자 하였다. 즉 임오군란은 청과 일본군의 조선에 주둔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급반전되었다. 임오군란은 군사적 충돌뿐만 아니라 통상조건에서도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어 청과 일본은 조선 내지로의 통상이 보장하는 악조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선과 청과 일본과의 새로운 통상 조건의 강압은 미국 등 다른 서구 나라들과의 무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임오군란 이전인 조미수교통상조약에서는 관세율이 최대한 30%가 적용되었지만, 임오군란 이후에는 이들 나라들에게 최혜국 대우로 조정되면서 관세율이 8~10%로 하향 조정됨으로 조선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한편 이 임오군란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한성에 주둔함으로 조정 내에서는 친중파와 친일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청의 힘을 입게 된 민비의 족적 정치는 수구세력이 되어 기득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김옥균같은 일부 급진 젊은 권력층은 메이지 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의 힘을 빌어 혁파하려는 친일 개혁파로 나누어져 새로운 급변이 야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당시에 미국의 한성 주재 공사관은 조선의 가장 혼란한 정국을 지켜보아야 했다.

임오군란이 마무리된 후 푸트 공사는 조선 왕실이 미국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토록 하여 1883년 7월 8일에 민비의 최측근인 민영익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삼아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푸트는 7월 15일 고종을 알현하여 미국 정부가 조선의 사절단 파견을 크게 환영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 일은 성사가 매우 빨랐다. 이는 그만큼 조선 왕실이 미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강화 모색하여 조선을 국내외적으로 안정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도가 작용된 것이기도 하였다. 왕실은 그 사절단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관인 홍영식과 부수찬 서광범 등 11명으로 확정하여 7월 26일 미국 군함인 <모노카시>호로 출항하였다. 이들은 최초의 조선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나라인 미국을 향해 떠난 것이다. 이 때에 고종을 큰 기대를 갖고 있었고 그 사절단들이 미국을 탐방하면서 그에 대한 보고 들은 바를 세밀하게 기록해 올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배는 일본 요코하마항을 거쳐서 9월 2일에 센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미국 대통령이 특파한 스코필드(Major Gen.J.M.Schofield) 장군의 영접을 받고 4일에는 그곳 상공회의소와 무역회관 대표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 파견단은 지난 날 청나라의 조공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철저한 사대관계였기에 이러한 국가적 예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미국 정부로부터 극진한 예우에 자주국에 대한 긍지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의 외교사절단의 미국 방문에 대해 미국의 유수한 일간지인 <The New York Times>지는 1883년 9월 13일로부터 25일에 이르기까지 기사를 소개함으로 미국인들은 비로서 조선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보빙단(사절단)원은 18일 뉴욕에서 미 대통령 아서에게 국서(친서)의 제정식과 접견식을 거행했다. 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졌다.

“우리 양국민은 영원히 변함없이 평화와 행복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양국간의 친교는 날로 긴밀해질 것이며 본인은 그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본 내용은 엄중한 외교문서라기 보다는 마치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대방을 향한 연서와도 같은 애절함이 묻어나는 내용이었다. 이런 글의 배경에는 그 당시 고종이 청나라와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서 얼마나 불안해하며 새로운 출구와 미국이 신뢰할 만한 우방이 되어 주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아서 대통령의 답사는 고종을 위로나 하듯이 매우 우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미합중국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국력과 부와 무진장한 자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다른 국민을 지배하거나 혹은 그 영토를 획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호적 관계화 정직한 교역을 주고받고 하려는 것을 노력할 뿐입니다.”

사절단의 단장인 민영익(민비의 친족) 일행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박람회, 기계 제작소, 농사개량 모범농장, 면직공장, 인쇄공장, 제약공장, 전신국, 소방서, 우체국, 신문사, 해군기지, 사관학교 등을 시찰하였다. 뿐만아니라 에디슨이 운영하는 전구 제작 공장도 방문하여 전기의 원리로 불이 밝혀짐에 대해 설명을 들었으나 사절단원들은 그 원리를 이해를 못하고 홍영식은 혼자 말로 “이는 분명 도깨비 불이 장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영익은 미국을 떠나면서 자신의 일기에 이같이 그 당시의 심정을 고백하였다.

“나는 어둠에서 태어났고 이제 광명 속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전도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조선의 국정을 맡고 있는 권력의 실세인 민영익은 이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고종과 민비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김옥균처럼 과감하게 개혁의 편에 서질 못하였다. 그 당시 민영익과 같은 청을 배경으로 점진적 개혁파들과 일본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강력하게 유신정책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편으로 갈라지게 된다.

<다음에 이어짐>

강석진 목사 ◙ Photo&Img©ucdigiN

글 강석진 목사/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건국대학교 농대와 성균관대 무역대학원과 백석대 신대원을 마쳤으며,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서 사회 경력을 쌓았다. 청년기에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본 교회의 소단체인 ‘새하늘 선교회’에서 북방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고 1991년에 파송되어 중국 동북 삼성의 조선족교회를 순회 사역하기 시작하였으며 1992년 10월에 요령성 단동(丹東)을 방문한 일이 계기가 되어 북한선교를 시작하였다. 사역이 본격화되면서 미주 SAM의료선교회와 프랑스의 국경없는 의사회/MSF와 협력하여 북한 선교를 구체화하였으며 재정적으로는 미주의 JC REACH-OUT FOUNDATION의 후원을 받아 북한 전역에 양식과 의료품과 성경과 관련 자료를 지원하였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 지역을 순회하면서 탈북자들 제자 양육과 파송 사역을 하였다. 1998년부터는 북한의 지하교회 조직과 연계되어 극동방송과 북방선교부로부터 라디오를 지원받아 양강도와 자강도, 평안남북도 전역에 보급하였다. 2012년에 신변의 위협을 받아 귀국한 후에는 극동방송/FEBC와 자유북한방송/FNK의 대북 설교 방송과 통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부터 충주 양의문교회 담임 사역과 백석총회 북방선교부 총무와 새하늘 선교회 지도 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국내외 선교 컨퍼런스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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