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7
[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7 »
고종, 1887년 6월 29일 박정양(朴定陽)을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
알렌과 박정양은 천신만고 끝에 결국 두 달이 지체된 후 1887년 12월 10일에 요코하마항에서 미국으로 향하였다. 이들 일행은 12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여 열차 편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1888년 1월 9일에 워싱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종은 알렌에게 청의 굴욕적인 조건을 수용한 것에 대해 알리질 않았다. 그 내용을 알게 되면 알렌은 주미공사의 참찬관 자리를 내려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채 워싱톤 공사관 설립과 주재관 파견을 통해 조선이 주권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로 생각하였다. 이들 일행이 워싱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본국으로부터 들은 청의 공사관은 박공사에게 미국 정부측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자기네의 공사관을 예방하고 그 후에야 자신들의 인솔하에 미국 해당 기관에 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놀랍게도 박정양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알렌은 미국무부 장관을 예방하기 전에 청의 공사관을 먼저 예방하면 사표를 내고 떠나 버리겠다고 격노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국왕이 분명 당신의 목을 칠 것이요.”라고 엄포를 놨다.
박정양 공사 일행이 베이야드 미국무장관을 예방하기로 예정된 날짜가 1월 13일로 잡히자, 청의 공사는 자신들이 미국무성 건물 앞에 와서 기다리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그러나 그날 조선의 공사관 일행은 알렌의 인솔하에 아침 일찍이 미국무성을 먼저 방문하였다. 이어서 1월 17일에도 미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예방도 청의 공사관에 미리 알리지 않고 행하였다. 그 결과 한성 주재 청의 공사관과 위안스카이는 고종에게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그가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청에서는 박정양을 소환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난처해진 조정에서는 시간을 끌면서 무마해 보려했으나 워낙 강력하게 항의를 하자, 그 해에 박정양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조선으로 불러들였다.
알렌은 약 3년 동안 주미공사의 참찬관으로 조선이 미국 외교계에서 자주적 활동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청의 속방적 관계를 털어내 버리려했다. 그로말미암아 청 정부와 조선의 관계는 불편하였다.
알렌의 미국에서 공사 역할은 1887년 6월부터 1890년 8월까지 약 4년여 동안에 외교관으로서 많은 경험을 체득하였다. 그런 즈음에 주한 주재공사가 공석으로 있었다. 이에 미국무부에서는 알렌이 조선 주재 공사 대리를 하도록 인사발령을 내어 이번에는 역으로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조선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담당케 하였다. 알렌은 1890년 9월에 총영사 및 대리공사직을 맡게 되어 조선으로서는 오히려 우군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로인하여 알렌은 조선에서 제 3막의 사역을 하게 되었다. 제 1막은 제중원을 세워 조선의 근대식 의료활동을 광범위하게 인술을 베풀었고 고종의 어의로도 그 역할을 다하였다. 제2막은 초대 주미공사의 중요 직책을 갖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알렌은 격변기의 조선에 그 나름대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의 역할은 다방면에 걸쳐 기여하였다. 고종은 국가에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알렌의 조언을 구했다. 이에 대해 그는 “고종은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의지하듯 나에게 의지한다.”고 했다.
알렌은 조선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한 홍보대사의 역할도 능동적으로 행하였다. 1893년 4월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조선이 참가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함으로 조선은 청국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기여했다. 이에 고종은 전적으로 지원하여 만국박물회장에 조선 전통의 기와집으로 조선관을 건축하게 하여 그곳에 조선 자기와 공예품 등의 토산품을 전시했으며 국악인 10명을 파견하여 궁중 아악을 연주하게 하여 미국인들에게 조선 고유의 문화를 알리어 그 존재감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군대 근대화를 위해서도 알렌은 그 역할을 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일본에 의한 신식 군대 양성 실행이 실패한 후에 고종에게 미국 군사 교관 파견을 제안하였다. 이에 알렌은 퇴역 장군 윌리엄 다이(William M.Dye)를 고종에게 추천하였다. 그는 동료 장교 3명을 대동하고 입경하여 조선 최초의 신식 사관학교인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립했다.
알렌은 주한 주재 총공사관으로 재직 중에 그 당시 조선반도를 중심으로한 열강의(러.일.청.영) 각축장이 되자,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1858~1919) 대통령과의 대면을 통해 미국이 러시아를 지원하여 일본을 견제하여야 한다는 외교 정책을 강조하였다. 미국이 러시아를 도와주면 미국의 이권을 수호할 것이고 나아가 조선의 독립이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일본을 도와주면 일본은 미국을 배신하고 문호 개방 원칙을 폐기하여 미국 세력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추방할 것이며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정반대의 친일 정책으로 반영되어 대통령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1905년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가 거의 결정될 무렵에 이같이 말했다.
“우리는 일본을 거역하면서까지 조선 문제에 개입할 수는 없다. 조선인들은 자기 나라의 방어를 위해서 제 손으로 총 한 발 못 쏘는 사람들이다. 난 처음부터 일본이 썩 마음에 들었소. …더구나 일본인은 내가 좋아하는 전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소. … 일본이 어떤 합법적 주장을 하면 미국은 전적인 지지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있소.”
결국 루즈벨트는 그 말은 하기 전인 3월 29일 주한미공사인 알렌이 미국무성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반일 자세로 나아가는 것을 견책하면서 그를 공사직에서 해임하였다. 그 배경에는 당시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러일전쟁(1904년)에서 승리함으로 미국의 태평양 대외 정책에 일조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신뢰하는 우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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