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가치
[교육저널=정이신 목사]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가치 » 87회
훈계ㆍ지식ㆍ지혜를 금ㆍ은ㆍ진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잠언> 기자는 이 글을 <잠언> 낭독자에게 전해 들었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를 <8:9>에 만들어 놨습니다. 훈계ㆍ지식ㆍ지혜를 금ㆍ은ㆍ진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참조. 8:10∼11) ‘총명(빈)’과 ‘지식(다아트)’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훈계ㆍ지식ㆍ지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셋을 금ㆍ은ㆍ진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싸구려 처세술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 셋이 가진 가치를 잘 모르고, 오히려 금ㆍ은ㆍ진주를 더 값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잠언> 기자는 이 글을 <잠언> 낭독자에게 전해 들었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를 <8:9>에 만들어 놨습니다. 훈계ㆍ지식ㆍ지혜를 금ㆍ은ㆍ진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참조. 8:10∼11) ‘총명(빈)’과 ‘지식(다아트)’이 있는 사람입니다.
<8:9>에서 “총명”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빈’은 우리말의 번역처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 ‘식별하다, 분별하다, 지각하다, 깨닫다, 이해하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총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번역이 우리말과 달리 히브리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이 말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사이기에 “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훈계ㆍ지식ㆍ지혜가 뭔지 압니다. 또 <8:9>에서 “옳게 여긴다(나코아흐)”도 한 단어입니다. 우리말의 번역과 달리 히브리어로는 두 구절이 모두 한 단어입니다.
이런 용례를 통해 보면 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써 인간이 경험을 축적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이것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윤리적 분별력이 포함돼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것을 숨기시면 아무도 이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8:9∼11>을 비유를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좋은 물건이 가게에 나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이리저리 따져보지도 않고 곧바로 가게로 가서 자기가 원했던 물건을 살 것입니다. 자기가 그 물건을 사려고 준비해 놓은 게 있기에 바로 가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건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살까 말까 망설이며 주저합니다.
그러다가 그 제품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 그제야 그 물건을 사러 갑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와서 물건을 다 사 갔기에,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그토록 바랐던 자유가 예수님을 통해 주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투덜댑니다. ‘왜 자기의 죄를 다른 사람이 대속했느냐?’, ‘자신의 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토록 자기가 바라고 원했던 상품이 나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진열대에 있는 상품을 보고 ‘살까, 말까?’라고 주저하거나, ‘혹시 비싸게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고민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지혜가 진열대에 상품으로 나와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총명으로 그걸 확인한 후, 재빨리 금ㆍ은ㆍ진주보다 더 빨리 구매하십시오.
그리고 절대 이것을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마십시오. 지혜의 가치를 잘 모르면 비교하게 되고, 잘못 비교하다가 엉뚱하게 제대로 산 지혜를 헐값에 손해 보면서 파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비교할 것은 비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비교하면 사고가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가치와 비교할 수 있는 게 이 땅에는 하나도 없고,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지혜를 다른 것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애써 얻은 지혜를 헐값에 팔게 됩니다.
<출애굽기 34:6>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를 말씀하시면서 야훼라는 이름을 세 번 언급하십니다. 이는 최상급 표현으로써 하나님이 주님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왜 하나님은 구약시대 주님의 호칭으로 쓴 야훼를 언급하셨을까요? 우리에게는 이런 표현법이 문법적으로 꽤 생소하지만, 히브리 문학에는 자주 나옵니다. 또 이와 비슷한 사례는 <이사야서 1:2>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법정에 고발하셨는데, 이를 위해 증인이 둘 이상 필요했습니다(신명기 19:15).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남유다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소환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에게 남유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님이 말씀하실 테니, 이에 대해 증언자가 돼달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6:13>에는 구약성경에서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이유가 설명돼 있습니다. 사람이 맹세할 때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존재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맹세할 때는 하나님이나 해ㆍ달ㆍ별을 들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주님이 따로 이름을 대고 맹세할 만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십니다. <출애굽기, 이사야서>의 표현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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