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8
[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8 »
고종, 1887년 6월 29일 박정양(朴定陽)을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
1882년5월 22일에 해양 국가이며 기독교권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짐으로 그 다음 해에 한성에 최초의 서양국가의 공사관이 설립되어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무엇보다도 문화 교류보다는 조선과의 상업적 교역을 기대하였으나 일본과는 달리 별무 상태였다. 그당시 조선은 그만큼 일본과는 상대적으로 상업적 수준이 빈약하였기에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1884년 9월에 미공사관의 공의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에 의해 조선 왕실은 미국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 당시 조선의 재성 상태는 거의 파탄 상태로서 공직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못주고 있는 상태였고 국내의 상업적 상황이 활발하지 못함으로 징세가 필요한 만큼 징수되지 못하였으며 고종은 별도로 자신의 왕실 재정을 챙겼다. 그로인해 국가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있었다. 고종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평정된 후 알렌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기에 국정을 함께 논할 정도였고 그로부터 많은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런 관계 속에서 알렌은 주미 공사의 참찬관직을 맡아 조미외교에 기초를 놓았으며 다시 역으로 주한공사관의 대리총공사로 역임하면서 고종과의 관계는 더욱 친밀하였다. 고종은 알렌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외채를 빌려오도록 청하였으나 그 당시 조선의 형세가 늘 불안하였기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알렌은 조선의 열악한 비위생적 환경으로 해마다 수인성 콜렐라로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을 당하자 근대식 상수도 시설을 통해 가장 위생적인 상수를 조선인들이 음용토록하는 일에 앞장서서 1898년 2월 15일에 미국의 콜브란과 보스트윅 상사(The Collbran & Bostwick Company)와 계약을 성사기킴으로 한성 인구 20만 명이 사용토록 최초의 근대식 상수도 공사를 행하였다. 이 당시 고종으로서도 빈약한 조선의 재정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단한 결실이었다. 이처럼 의료분야의 광혜원 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근대 문명화의 쾌보를 내디딘 것이었다.
그리고 2년 전인 1896년 3월 29일에는 알렌이 한성(서울)과 제물포간 철도 부설에 미국 자본이 동원되도록 조성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었다. 이 철도 공사 부설에는 미국의 모오스(J.Morse)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막중한 공사비를 왕실에서 감당키 어려웠기에 미국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통해 공사비를 충당코자 했지만, 미국 은행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조선을 신뢰하질 못하였기에 기공식만 하고 중단된 상태였는데, 놀랍게도 일본이 이 철도 공사를 인수하기로 하고 5만 달러를 미국 업자에게 지불하고 양도계약으로 이 사업이 다시 추진되었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미국이 아닌 일본이 철도 부설권이 양도된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하였고 장차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배가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미국의 개인 업자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시도한 것이었고 일본 측에서는 조선의 영향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기에 당사국이 조선으로서는 수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어서 1898년 2월 29일에 한성 시내에 전차 궤도의 부설과 운영을 미국 콜부란트 보스트윅사와 황실과의 공동 사업 형식으로 계약이 체결되어 위촉되었다. 이 구간은 남대문과 종각을 거쳐서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는 홍능까지 약 10여 킬로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회사의 자본금은 150만원 이상으로 하고 이 수익의 절반은 한국 황실에 귀속되고 다른 절반은 콜부란트 회사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계약 기간은 15년이었다. 회사의 명칭은 <한성전기회사>로 하였다가 후에는 <한미전기회사>로 개칭되었다. 이 건설 공사는 1898년10월17일에 기공하여 1899년 5월 17일에 성대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이 전차에는 남녀 구별석을 마련하여 운영되었다.
이 전차의 운영은 선교사나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각별한 관계였다. 알렌과 황실과의 친밀은 그의 입국 바로 그 첫날 부터의 일이였고 민비와의 관계 역시 선교사들과 선교사 부인과 잊혀질 수 없는 인간적 관계였다. 특히 민비와 여의사 선교사들 관계는 어의로서의 공신 관계이기도 하였다. 이전차는 선교사들의 다양한 사역의 활동 범위와 시간적으로도 매우 유익을 주었다. 그 당시 여자 선교사들은 가마나 자전거나 도보로 다니며 활동해야 했었다.
이 전차의 운영에는 여러 부작용과 불상사도 따랐다. 이 당시 조선인들은 이 전차가 바퀴달린 큰 짐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달리는 전차에 교통사고가 나면 조선인들은 전차를 괴물로 인식하였기에 사망하면 아이를 죽인 것 처럼 알고 청년들이 흥분하여 전차를 뒤집어 엎고 몽둥이로 때려 부수고 불태우기도 하였다. 어느 술취한 성인은 철로를 궤고 잠을 자다가 안개낀 날에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전차의 출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인력거꾼들이었다. 이들은 생계에 위기를 느끼고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서양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이와같은 조선의 개화기에 조선인들은 개화의 모든 과정에 의심과 불신과 특히 미신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기후상에 가뭄이나 장마나 전염병의 창궐이 생기면 이 탓으로 돌리며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전차 활용이 일반화되었기에 많은 편리를 얻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전차를 타보기 위해 상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근대화된 교통편은 조선인들의 개화 의식에 진보적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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