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에 나타난 초일류 대한민국 자화상
[시사칼럼=임청화 교수] 영화 건국전쟁에 나타난 초일류 대한민국 자화상 »
이 박사님 사후(死後) 60년 앞두고 영화 “건국전쟁”으로 부활하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사업회 이사이며 문화예술위원장인 필자는 이 영화를 CGV에서 여러 차례 보고 1965년 7월19일 서거한 이 박사님께서 사후(死後) 60년을 앞두고 부활한 듯 여겨지고 제2의 이승만 Kids들이 나타나서 왜곡된 건국 역사를 바로 잡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기독인의 마음과 다음세대를 올바로 세우는 교육자의 심정으로 이 글을 기고하고자 한다.
이승만의 노래
먼저, ‘건국전쟁(김덕영 감독)’ 이란 영화를 오랜 시간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완벽한 팩트를 가지고 다큐영화로 만들어 주신 김덕영 감독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노래’가 이 영화의 전반부나 마지막 피날레로 나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승만의 노래’는 사대부의 나라였던 대한제국에서 국민의 나라인 대한민국으로의 전환을 살신성인의 자세로 대한의 등불이 되신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노래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농지환원제로 농민의 사유재산제를 통해서 북한 공산당의 독재자끼리 나눠먹는 토지개혁이란 사회민주주의를 이긴 절묘한 지략으로 오늘까지 대한민국이 존속하게 한 것은 이승만 박사가 현존하는 최고의 국제 정치 전략가라고 하는 고(故) 헨리 키신저 박사를 능가하는 신(神)의 한수였다고 본다. 오히려 네덜란드의 국부이셨던 아브라함 카이퍼 수상과 같은 차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고 온 국민이 다시 이 박사님의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대한민국이 존재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전은 일본이 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서 그 야심으로 만국견학유람단을 유럽에 보냈듯이 이승만 대통령도 일본 그 이상의 월등한 혜안을 가지시고 미국으로 수많은 영재들을 국비유학을 보내서 미국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배워오게 함으로써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과학자들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이 오늘날 G-7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수많은 영재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철학, 과학, 서비스 등 모든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서 세계 속의 한국을 빛내고 있다.
이 박사님께서 세우고자 했던 나라는 기독교 민주국가였다. 이 박사님께서 즐겨 읽던 성경은 신약성경 마태복음이었는데, 특히 좋아하는 구절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서있지 못하리라‘, 그리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등이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한 것은 바로 이박사님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ibid., 93.)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최초의 원인자(the first cause)이신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첫 사랑을 한국 국민과 미국의 교포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단합하여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시민권자인 서재필 선생을 앞세우고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이념 정신을 철저히 지우고자 했던 좌파 정권은 회개해야 한다. 이는 고(故) 백범 김구 선생 조차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님이 세우신 하와이 기독연합교회를 방문했던 필자로서는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에서의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마음을 반드시 담아야 하고 더구나 보은의 차원에서 맥아더 장군, 벤 플리트 부자, 윌리엄 쇼 부자, 딘 헤스 공군 대령,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대령, 윌리엄 웨버 대령, 에밀 카폰 신부, 레드 클라우드, 로버트 티몬스 대위, 고(故) 죤 워너 상원의원 등 54,000여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주한 미군에 대한 소개도 ‘건국 전쟁’ 후속편에서는 필요하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전쟁’ 영화와 연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글로벌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예지력, 예언력, 글로벌 마인드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故) 김동길 박사께서도 생전에 이승만 박사님을 대한민국의 최고의 영도자로 본받아야 한다고 이승만 연구소 창립식의 축사에서 말씀하신 것은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것이었다.
2024년 현재 우리는 미국의 핵(核)우산 안에서 스스로 생존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하에서 국가안보를 유지해야 한다. ‘건국 전쟁’이 후손들에게 교육의 자료로 널리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그동안의 왜곡된 대한민국 건국사가 바로 세워져 진실에 기반하여 새롭게 확립된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을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류 국가 비전을 6R로 표현하고자 한다.
1.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 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Revitalization).
영화 후반에 이 박사님께서 미국 뉴욕에 초청 방문 당시 ‘영웅의 길’ 카퍼레이드 장면은 지금까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실화로서 매우 깊은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후에 환대받고 귀국한 맥아더 장군에 대한 예우와 오버래핑이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연설하는 영상도 감동적이다. 그 당시 필리핀보다도 가난했던 나라의 대통령 방문에 대한 미국의 뜨거운 환대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박사님의 일부 연설에 나타난 남편과 아들을 대한민국 전쟁터에 보내주신 미국의 어머니에 대한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이 박사님의 인간적 애뜻함이 전 미국인의 가슴속에 더욱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겐 처음 공개가 된 다큐 영상이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정보의 왜곡과 역사의 조작은 이 영상이 세상에 공개됨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2.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게 동맹의 소중함을 아는 국제적인 사고를 재확인했다(Rethinking).
이 박사님께서 당시 한국인이 미국이란 나라를 알지도 못할 1907년에 그 엄청난 사이즈의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대 학부를 졸업하고 1908년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시고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이에 앞서 이승만 박사님은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 정신’은 그 이 후의 디히트리히 본 훼퍼의 “옥중 서신”보다 더 애국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각성이었다. 중일전쟁 당시 저술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태평양 전쟁을 예견한 예언서였다. 가히 한반도인을 넘어선 20세기 국제 지도자의 지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박사님은 한국인이 미국 친일 인사를 테러한 샌프란시스코의 전명준 의사 사건을 놓고 일본인이나 서구의 친일 성향 관계인을 감정적으로 쏘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서구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 그들이 일본과 더더욱 밀착해 일본을 도우는 꼴이라며 독립에 도움은 커녕 해악이 된다고 호되게 질책했던 바 있다는 것은 사즉생이 아니라 사즉사로 독배를 마시는 격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 조선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밀사로 파송된 이준 열사도 외교적으로 역울함을 호소하다가 끝내 분사를 한 것이다.
영화에서 이호 목사의 정확하게 왜 이승만 대통령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지 3.15. 부정 선거는 이 대통령과 일단 상관이 없는 것으로 해설하는 장면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총(AI: Amazing Irresistible Grace of God)을 입은 대한민국을 위해 오신 이 박사님은 건국 시기의 대변환을 완성한 구세주라는 통찰력이다.
3. 이승만 대통령의 독트린은 해양 문명으로의 시각을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Reset).
영화는 하와이로 가는 과정을 잘 그렸다. 필자도 15년 전 이 박사님께서 세우신 하와이 한인연합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 박사님께서 끝내 살아생전 고국을 그리워하시다 돌아가셨던 하와이를 마음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를 헐뜯는 흐름의 엄청난 음해성 뉴스가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을 중심으로 쏟아졌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거짓 뉴스로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것은 엉터리 거짓 보도가 먼저 터지게 되면 수용자의 70%가 믿기 때문이다. 하와이로 2주 동안 다녀오려는 계획이 하와이 망명으로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됐다. 그리고 아예 못 오시게 막아버렸다.스위스 은행에 거액이 예치되어 있다는 가짜뉴스도 여론을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실제 하와이에서 살아갈 생활비조차 없는 이 박사님 내외를 몇 분의 지인이 조달했고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어쩌다 갈비를 식탁에 내놓으면 이 박사께서 야단을 치셨다니 마음이 미어질 정도로 이 박사님은 누구보다도 검소하게 살아가며 고국에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건강을 지키려고 운동 삼아 해변을 걸으시며 ‘멀리멀리 갔더니’ 찬송을 부르셨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워싱톤에서 YMCA 활동을 통해서 배우신 대로 초창기 하와이에서의 교민을 위한 교육과 봉사활동도 매우 의미 깊게 다가왔다.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 노동하고 있던 한국인들을 연합시키는 일을 하셨고 조선에서 여자를 업신여겨 온 관행도 선구자적으로 고쳐나갔고 1948년 대선에서 서구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한국 여성에게 최초로 선거권을 준 것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여성 인권의 아버지이신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하와이에서 여러 섬에 흩어진 아이들을 모아서 기숙학교를 시작할 때 특별히 버려지고 한글도 못 배운 어린 여아들과 심지어 사창가에 팔려 간 아이까지 찾아가서 구출하는 등 조선(朝鮮)이란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큰 죄와 같이 여겨지는 현실을 바로 잡으시려고 하는 자세를 한국의 여성 교육자로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당시의 국민소득에 비해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한 과감한 투자는 학생들의 의식을 고양 시켰고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초중고 대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4.19.가 일어난 것이었다. (국민일보, 2024. 2. 2. 이승만 일대기 다큐 나왔다…..농지개혁 등 업적 조명) 결국은 70년 뒤에 북한을 이기는 세계 4위 이내의 두뇌 집단을 이미 1960년대에 기초를 만드신 것이다.
2024년도에 ‘건국전쟁’이란 영화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에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포로에서 70년 뒤의 귀환과 같이 영적으로 대한민국도 해방 후, 70년 뒤에 이 영화를 통해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이번 총선에서 변혁의 촉매제가 될 것을 확신해 본다.
4.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엘리트를 일본, 미국을 포함한 서구 세계에 유학을 시켰다(Raise Up).
구한말 태어나 홀로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외로운 애국자였다. 유학 중 이미 나라는 식민지가 되자 장래가 보장된 대학교수가 아니라 교민사회에서 항일운동을 선택하여 교육자, 종교인, 지도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이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교수에게 배운 지성은 불후의 명저 [일본내막기]를 쓰게 한다. 이 책을 저술하면서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이미 경고했다.
태평양 전쟁을 예견한 저술로 선각자가 된 이승만에게 전쟁 후 예견된 독립을 위한 준비는 주권을 잃은 지도자지만 최고의 자질을 보여준다. 이 박사님의 지성을 알아본 미국의 언론인들은 루즈벨트 정부의 비밀까지 제공하며 한반도 정책을 압박하여 차선, 즉 한반도의 미군 상륙과 주둔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미군정 하에 조국 독립을 위한 외교 성과는 결국 유엔 승인하에 단독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후 이 박사님의 국제적인 사고가 가능한 것은 한학을 통달하고 영어를 배우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조선을 마음에 품고 가슴앓이했으니, 이것이 애국 애족 애민의 마음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출산하여 이 박사님의 국제 정치에 있어서 특히 일본에 대한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예측력이 주목 받으면서 정치 예언자라는 평가도 나왔다.
5.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No Return).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적으로 탱크를 앞세워 남한을 침략했다. 이미 백범 김구는 이 사실을 알고도 김일성에 동조하여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서 밝혀졌고 백범 김구는 애족(愛族)은 한다고 했으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남한의 전쟁 위기를 함구했다. 그 당시 백범과 대만 대사였던 유어만과의 영어 대화 내용을 보면 김일성은 이미 남한을 분명히 침공할 계획을 하고 그 배후에 중공과 소련 스탈린의 계획이 있었고 남한의 우방인 미국은 태평양 너머에 있기 때문에 전시상황 동원에서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가 있어 북한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남한을 적화통일 공산주의 국가로 된다는 선 정보를 알면서도 대한민국 이승만 박사 측에 알리지 않은 것을 볼 때 백범 김구는 애국(愛國)은 하지 않은 것으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6.25 전에 미군의 철수가 소련과 중공 그리고 북한의 악의 3축에 전쟁의 빌미를 준 것이다. UN이 참여하여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비롯한 남한은 미국의 원조로 또한 이후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등의 등장으로 세계에서 잘사는 중진국 국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미 53,000명의 미군이 죽고 있는 현실에서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며 순환 근무제를 하는 군대를 빼려 하던 미국을 상대로 이 박사님은 거제도의 자유 포로를 석방하면서 군대 지원, 미국 원조, 1953년 10월 1일 한미방위수호조약을 이끌어 낸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서의 한반도의 공동 경영이라는 공동 숙제를 미국에게 준 것이 이승만 대통령께서 제2의 이순신과 같은 국제적인 군사 전략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한국은 벌써 종전 후 소련, 중국, 북한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을 것은 일목요연(一目瞭然)하다.
우리가 ‘건국전쟁’ 영화를 보고 나오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음을 평가하고 이런 전후 사정을 꿰뚫고 있는 이 박사님이 대단한 능력자였음에도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한강대교 폭파 당시 경찰과 군인은 한강 다리 밑에 부교를 설치했고 민간인이 이를 통해 건너게 했다. 실제 폭파 시에는 아무도 없었고 민간인 희생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도 이번에 각인이 되었기에 오해가 없어졌다. 이 박사님에게 외국에 나가 망명 정부를 세우라 (망명 정부라면 지긋지긋한 은발의 노신사에게 망명은 망언이다. 그런데 그가 하와이에 망명을 당한 것이다.)는 압박에도 한국에 남아 전선을 지휘하였다고 수많은 참전 군인들은 증언한다. 실제 전투를 앞둔 군부대를 200회 넘게 방문해 연설하며 격려하셨다. 제주 4.3 사건의 핵심은 남로당의 지시로 북한과 연계되어 남한의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빨치산이 군경을 기습한 것이다. 일부 좌익 좌파는 이후 반란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생긴 것만을 침소봉대해 왔다.
6.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formation).
한국인의 속성을 이야기하며 한국인은 지난 70년간 경제성장만을 위해 무한경쟁의 국제사회라는 냄비 속에서 살고자 했던 것이 ‘냄비 속의 개구리(Frog in the Kettle)’라고 비유하는 데 이제는 K-개구리가 냄비 사우나탕에서 나와서 경제 기적을 일구어 세계 7대 강국이 된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미국의 어느 앵커의 이야기를 돌이켜 보니, 이승만 대통령의 근면과 중화학공업과 원자력 등 기간산업에 기반을 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이룬 것이다. 김일성의 공산주의는 스탈린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개혁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서도 여러 증언과 문서로 일반인들이 대부분 모르고 있을 사항을 깊게 다룬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올라가서 일방적인 김일성 문서에 서명하고 내려온 사실이 있고 이는 명백한 역적 행위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국제적 정세 흐름을 파악할 능력이 부족한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건국을 방해했던 세력과 남한 공산화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세력은 엄연히 존재했었고 지금도 노골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좌익 좌파가 백범 김구를 띄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학과 산업화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6.25 중 북진에서 북한의 산업시설을 둘러보는 인사를 미군과 함께 파견하기도 하였고, 용돈을 유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다. 전쟁 복구 당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하여 군사정부에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원자력 분야 장학생을 파견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1970년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초대 원장이셨던 장인순 박사님과 2번의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신 정근모 박사님이 정신적으로 양대 기둥의 역할을 해주셨다고 기억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19년에서 25년까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맡았고 1948년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 취임한다.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여러 가지 남은 과제로 4대 대통령 출마를 하게 된다. 야당의 후보자 조병옥 박사는 심장마비로 급사,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때였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부통령 야당 후보인 장면이 인기가 있어 밑에서 이 박사와 무관하게 이기붕을 세우는 과정에 무리가 생긴 것이다. 이것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이 부정적인 평가를 한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박사의 자서전을 쓴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4.19혁명 이후 선거까지 일련의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이념적으로 소련 위성국의 그릇된 길을 택함으로써 국토 분단과 동족 살육의 전쟁범죄자로서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 박사를 완전히 단죄한 듯하다. 오히려,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져야 할 김일성이 자기 죄를 역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는 대남 심리전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것과 같이 성령의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고범죄이다.
그러나, 그다음에 4.19 혁명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을 위문하시며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어떻게 이리되었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영화의 장면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의 증언도 나온다. 여기에 인정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국민들이 이 박사님과 같이 세계 속의 문화 한국인, 한국 속의 문화 세계인으로 사는 것이 살길 임을 알려주셨으니 마땅히 건국 대통령 예우를 해야 할 것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지도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를 근거 없이 공공연히 폄훼하는 한국과 한국인은 과연 아리랑(along with God)의 개념을 알고 아리랑 꽃을 피우는 초일류 문화 국민이라 할 수 있는가?
한민족으로서의 우리는 통일된 미래 한국을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선진국에 진입된 우리 대한민국을 이번 4.10 총선에서 기필코 정직한 도덕 사회의 국민 자세를 기반으로 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하는 개개 후보들이 승리하여 국회에 입성하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 대한민국을 중국에 받치려는 거짓 정치 지도자들로 인하여 사회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주역이 되는 아리랑 꽃이 되어 무궁화꽃으로 피어나야 한다. 무궁화는 샤론의 꽃이고 예수 그리스도이다.
특별기고: 샛별 임청화 교수 (백석대 교수,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사업회 이사)/ 천안 백석대 연구실에서,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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